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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와 비넨호프에 이준열사 기념관!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2.12.02|조회수222 목록 댓글 2

헤이그에 도착해 국제사법재판소와 비넨호프를 보고 이준열사 기념관에 가다!

 

 

파리 북역에서 기차를 타고 브뤼셀 남역 에 내려 코인라카에 배낭 을 넣고 그랑팔라스

광장과 오줌 누는 소년이며 루아얄 광장과 브뤼셀 공원을 보고 내려오는데....

"여론 조사" 를 가장한 학생 소매치기(?) 를 피해 다시 지하철로 브뤼셀 남역에 내립니다.

 

 

 브뤼셀 남역 Bruxelles-Midi ( Brussel-Zuid) 은 플랫폼이 23개 인데 전광판에 보니

오후 4시 2분 부터 11분 까지 10분 동안에만도 무려 16편의 기차 가 출발을

하네요? 서울역이나 부산역에서는 10분 동안에 출발하는 기차가 2~3편이나 될러나?

 

 

 그런데 코인라커 콘시그나를 찾으니 무인 코인라커 로 짐검사 요원도 없는데 영수증에 번호가

없네뇨?  코인라커 번호가 없다니?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다가 영수증을

자세히 살펴보니 바코드 같은게 인쇄되어 있기로 영수증을 기계에 대니 저절로 문이 열립니다?

 

 

  십년감수 했네요? 예전에 로마에서 니스 가는 밤기차를 타는 데, 보관 유효시간이 지난 관계로

라커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했었던 기억이 되살아 나니.... 아깝지만 원래 넣은 금액만큼 더

넣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네요?  자세히 보니벌금이라 너 넣어야 하니 배꼽이 더 큰 것이라!!!

 

 

  오후 4시 18분에 출발한 기차는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들판을 달리는데 초지를 지나고

운하를 건너 2시간만에 헤이그 시가지로 접어듭니다!   시간은 아직 6시 25분

밖에 안되었으나 계절이 이미 10월하순이고 구름까지 끼어 시가지는 매우 캄캄 합니다.

 

 

 헤이그 는 영어식 발음이고, 네델란드어로는 덴하그  “Den Haag”  라고 하니 역 이름도 헤이그가

아닌  Den haag Centraal 인데  중앙역이 아니고  헤이그 Hollands Spoor 역 으로 간판에는

Den Haag HS 라고 적혀 있는데.....  코펜하겐은 영어식 발음이고, 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 

이듯! 예전에 타임 테이블에서 기차시간을 찾는데, 헤이그가 없어 당황했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네요?

 

 

  이미 밤이라 인터넷에서 예약한 호텔 위치 가 확실하지 않기도 해서 역 앞에 주차한

택시에 Scheepmakersstraat 27번지에 Hostel Stayokay Den Haag 로 가자고

하니.....  기사가 요금이 15유로 인 데, 그래도 좋으냐고 물어옵니다. 아니 여기가

후진국이나 러시아도 아니고 가서 미터기 요금대로 주면되지 미리 요금을 정하다니???

 

 

  그때 문득 머리에 짚이는게 있으니..... 이 호스텔이 역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라 기본요금

거리인 데, 유럽은 기본 요금이 아주 소액 이므로 돈이 되지 않는 거리 입니다?

  그런데 역에는 10여대의 택시가 줄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손님을 태우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렸을 것 이 틀림없으니 손님이 “노” 하면 승차 거부 라도 해야할 판입니다!

 

 

  역을 나와서 조금 걸어 도로를 지나가는 택시를 탈 수도 있겠으나 우린 너무 지쳤기도 하고

혹 콜택시 위주로 빈택시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적을 수도 있어 그냥 올라타니

  그런데 얼마 안가서 택시가 내리고 15유로를 지불하자 집사람이 입이 삐죽하니

나온 채 이 정도면 그냥 걸어 올 것이지... 왜 택시를 타서 비싼 요금 냈냐고 불평을 하네요!

 

 

  “콜러부스의 달걀” 이라고, 왔으니 길을 알지, 아니 처음부터 길을 알았니?

그럼 역에서 부터 자기가 앞장서서 찾아오지?   나도 대강의

위치만 알지 가는길을 자세히 모르는데 이런 밤중에는 헤메기 십상이라!!!

 

  유스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는 카드키를 받았는 데, 캐나다 처럼 문에 카드를 대어야만

비로소 바깥 출입문등 육중한 문이 2개 나 차례로 열리는 시스템 이네요....

  마눌은 지쳐서 쉬고 싶다기에, 혼자서 바깥으로 나와서는 운하 옆에 조그만 술집

 이 있어 들어가 맥주를 마시는데 손님은 흑인 남자뿐 이라 2잔만 들고는 들어옵니다.

 

 

  호스텔로 돌아오니 여기서도 맥주를 파는 모양인 데.... 무슨 만남의 밤 행사인지... 젊은

남녀대학생 들이 둥글게 앉아 얘기들을 나누는 모습을 보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로비로 내려가니 한 모퉁이를 돌아가면 식당인데  빵과 우유 로 아침을 떼웁니다.

 

  식당 벽에 “ Love to Travel but don't make the road your home." 이라고

적혀 있는데, " 집으로 갈 길을 만들지 말고  오직 여행을 사랑하라

뭐 그런 뜻일러나?  그러고는 밖으로 나온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거리에는 유난히도 자전거 를 타고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택시를 타고는 도심을 가로 질러서 서북쪽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평화궁 국제

재판소 앞에 내리는데 스헤베닝겐 삼림 공원 Scheveningse Bosjes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국제 사법재판소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는.....

 

 

  평화궁 Viedespaleis 안에 있는 데.....  1913년 미국 카네기 의 기부에 의해  완성했으며

높이 솟은 시계탑과 정원이 볼만하다는데  카네기가 했다는 말 중에  “남자로

태어나 죽을 때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많은 재산을 남기는 것이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건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은 다 하나님의 것”  이라....  단지 내게 잠시 맡기신 것이니 그분의

뜻대로 써야(기부) 하는 것이라..... 그것은 기도 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살다보니 게을러서 그 뜻을 알지못해 재산을 남기게 됐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다는 뜻?

 

 

  10년 전에 부시 대통령이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상속세와 증여세를

폐지  하고자 했을때  빌게이츠,  워런버핏이며....

  조지 소로스 등 혜택을 받게될 부자들이 가장 먼저 강하게 반대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재능과 노력 대신에 부모 잘만나 부를 상속한 자 들이 미래에 미국

의 리더 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는 신문광고를 대대적 으로 했으니

  하여 미국인은 편지 봉투 안에 가계수표를 끊어서 넣고는 봉투에 

“기부금 재중” 이라 는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하다는 설문 조사도 있었던 것이라....

 

 

 “ 내가 어찌 모은 재산인데... 자식한테 몽땅 물려주지 않으려면 무엇하려고 그 고생하며

돈 벌었겠어?” 라는 사고방식이 변하지 않는 우리로서는 먼나라 얘기입니다!!!

  예전에 일본에서는 아들이 시원 찮으면, 공원 중에 중학교 정도 밖에 안나와도

똑똑한 직공이 있으면 대학 나온 딸과 결혼을 시켜 기업을 물려 주기도 했다지만 우린....

 

 

  하지만  국제사법재판소  는 오늘  아침에는 문이 굳게 닫힌채  관광객은 출입할

수 없다고 하므로...  아쉽지만 밖에서 사진만 몇장 찍고는 돌아섭니다!

  일본에서는 "독도를 다께시마"  라 하여 자신들의 고유 영토를 한국이 2차

대전후 불법 점거 하고 있다면서 여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 를 하고자 했으나....

 

 

  우리나라가 응하지 않아 불발 에 그치고 있다고 하네요?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으니

뭐 답답한 곳은 일본일테지.... 하지만 언젠가는 재판이 열릴 날 이 올른지도?

  그러고는 뒤돌아 나와 메스다흐가 그린 1점의 세계 최대의 파노라마

풍경화  를 소장하고 있다는  파노라마  메스다흐  Panorema Mesdog  를 찾아갑니다.

 

  마치 “알라마다 센뜨랄에서의 일요일 오후의 꿈” 이라는 단 하나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멕시코시티에 건축된 "디에고 리베라 벽화 미술관"  같은 것인가 보네요?

옛날에 캐나다에서 쿠바 로 가는길에 멕시코에 들러 저 그림을 본 일이 떠오릅니다!

 

 

길거리에서 여러 사람을 붙잡고 묻는데 저마다 방향이 달라 이리저리 한참이나

헤메다가 드디어 찾았는데 시간이 일러 한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니 아쉽지만

돌아섭니다. 우린 오늘 중으로 암스테르담으로 가서는 귀국 비행기를 타야 하니! 

 

   방향 감각을 찾은지라 시내지도를 보고 걸어서 자그만 운하 에 이르니 옛날 18세기

복장을 한  기마와  마차 행열  이 지나가는 데.....  아마도 왕실행차  일러나???

 

 

  그러고는 길가에  “Tao 道”  라는 간판이 보여 저게 도대체 무엇

하는 곳인가 하여 자세히 보니.....   그 아래에

 “Asian fusion & Satay House" 라고 적혀 있으니 그럼 뭔가????

 

 

  거리의 숍에는 화려한 기모노 입은 일본 여성 의 사진도 보이고  새를 소재로 쓴 인디언

풍의 여인 의 모습도 보이니 좀 이국적인 거리인가 봅니다?  시내 지도를 보며 10분

을 걸어서 헤이그 중심으로 과거 영광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비넨호프" 를 찾아 갑니다.

 

 

  아담하지만 고풍스러운 교회를 지나 어느 집 지붕에 범선 의 모형이

장식되어 있는 모습이 17~ 8세기에....   네델란드 상선단이

5대양 6대주 를 누비며 세계 무역 을 주름 잡았던 나라임을 떠올립니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는 인도, 말레이시아 및 인도네시아의 여러 지역

과 섬을 정복하고 직접지배 또는 그 지역의 지배세력을 통제해 이를 통해

후추, 커피, 사탕등 특산품을 강제로 재배하게 해서 향신료무역 을 독점하다가

1652년 부터 영국과 전쟁이 계속 되었고 심한 타격을 입어 상업전쟁에서도 지게됩니다.

 

 

 또 18세기 이후 향신료무역이 부진하게 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식민지 경영 을

주로 하게 되었으며, 1799년에는 영토를 본국 정부에 이양하고 해산했으며

  그 외 영국의 동인도회사 는 1600년 설립되어 쪽이나 면직물을 중심으로 한 인도

무역에 주력했는데 1604년에 설립된 프랑스 동인도회사와 격렬하게 다투게 됩니다.

 

 

  결국 플라시전투 의 승리를 계기로 하여 영국 동인도회사는 프랑스를 밀어내고 인도

무역 을 거의 독점함과 동시에 인도의 식민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고목이 우거진 가로수 공원을 지나 붉은 벽돌 건물은 지도에서

보니 감옥 박물관이지 싶은데 그 옆으로는 4층짜리 우아한 집들이 둘러서 있습니다.

 

 

  그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니 호수가 보이는데, 마침 호수 안에서 분수

 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니.....  시원스러운

느낌이 드는데,  국기가 펄럭이는 다리를 건너서 비넨호프 로 갑니다.

 

 

   비넨호프 Binnenhof 는 13세기에 해자를 두른 백작의 성으로 건축되었다는 데,  해자 

지금은 베이베르 호수가 되었고 건물은 정부청사로 쓰이고 있으니   오래된 문을

지나 안뜰 Ridderzaal 로 들어가니 기사의 성관 이며 국회의사당이보이는 데  

예전에는  빌헬름2세 의 수렵관이었다고 하며....... 금빛이 빛나는 동상이 인상적 입니다.

 

 

  모우리츠후이스   왕립미술관   Mauritschuis Museum   은  호프

베이베르 연못 주변에 왕가의 컬렉션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렘브란트와 베르메르, 루벤스의 회화를 소장하고 있다지만....

 

 

  오늘중으로 암스테르담 에 가서 귀국 비행기를 타야하니 마음이 급해 율리아나 전

여왕의 주거지를 고쳐 개관한  랑헤보르호우트 광장 Lange Voorhout

왕궁 미술관도 패스...  하지만 헤이그 까지 왔으니 아무리 바빠도 들러야

할 곳이 있는지라  마음이 급하니 서둘러 시가지를 걸어 시청사 앞을 지나서는.....

 

 

시내 지도를 보면서 또 물어 가며 우회전 하여 걸어가다가 Wagenstraat 라는 거리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니..... 바로 이준 열사 기념관 입니다.

  이준열사 기념관 Yi Jun Peace Museum 은 Wagenstraat 124번지에 있는 1620

년대 건물로 이준 열사가 투숙했던 호텔 을 교포가 구입해 1995년 기념관이 되었습니다.

 

 

  1907년 6월 고종의 밀명으로 이상설, 이위종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에 참석해 을사

조약의 무효와 대한 제국의 독립을 알리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 했던 곳인데,

  문이 잠겨 있기에 보니 10시 30분 부터 오후 5시까지 개관한다고 적혀 있기로

30 여분간 남는 시간에 이 골목을 나와 반대편 골목에 있는 차이나타운 을 구경합니다.

 

 

참 중국인들은 대단히 진취적인데다가 잘 뭉치는 민족이어서 자기 고향을 떠나

기가 쉽지않은데도 전세계로 나가서 차이나타운 을 건설하고는....   더욱

중국 본토 보다 더 중국적인 거리를 만들어 자기네 중화문화 를 간직하며

거기다가 중국어 까지 일상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중화민족의 우월감 일러나?

 

 

  미국이며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한국말도 못하지만” 얘 들 중국인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 현지 민족과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네 

중화민족의 아이덴티티 를 간직하는 것은 자기네 문화에 대한 자부심 일까요?

조선인은 "신체발부수지부모"  라고 외국에 가는걸 꺼렸지만 가서는 동화 되고 맙니다!

 

 

  다시 이준 열사 기념관 으로 돌아와 시간이 되었기로 초인종을 울리니 문을 열어 주지도

않을뿐더러 안에서는 인기척도 없네요? 입구에는 전화 번호 조차 없으니 달리....

어쩔 도리가 없네요? 이것 하나 보자고 그 먼길 을 왔는데 이렇게 돌아서야 하다니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스페인 마요르카섬에 애국가 안익태 선생 댁도 헛걸음을 했는데?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은 북간도로 망명해 용정 인근 명동에 우국지사 김약연이 

세운 명동서숙 에서 교편을 잡습니다.   이때 이동녕, 이동휘 그리고 안중근 

참여하기도 했다는데.... 학생으로는 윤동주,나운규, 김광진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905년에 을사조약(늑약) 으로 나라를 뺏기게 되자 이상설이 아이디어 를 내

평리원 검사 이준 과 함께 고종의 밀지를 받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를 탔던 것이니...

 을사조약후 미국, 영국 등 세계 열강들이 모두 한성의 공사관을 철수하고 "일본을

지지" 할 때, 오직 러시아 만은 러일전쟁의 패배 도 있고 해서 밀사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니 그새 일본과 러시아 는 밀약 

맺은 탓으로 밀사들을 냉대해 황제의 알현조차 거부하고 협조를 철회 합니다.

  그렇다고 조선으로 되돌아 갈수도 없는지라, 전 러시아 공사의 아들 

이위종을 통역 겸 안내역으로 삼아 여기 헤이그 까지 어찌 어찌 오기는 했는데.....

 

   만국평화회의 에 참가하자니 어느 한 국가의 안내 가 있어야 하나 그 많은

나라 중에 조선 을 도와주는 나라가 단 한나라도 없었던 것이니.....

   회의장에 입장 조차 거절당하고 실의에 빠진 이준은 호텔인 이 집에서 자살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나라가 전무"  했던 것이지요?

 

 

  이후 12년이 지나서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에 기대어

3.1 만세운동 을 벌이는데, 대다수 조선인들은 만세운동을 8도에서 벌이면 일본이...

  세계 만방의 눈과 여론을 의식해 조선을 독립시켜 줄줄 알았던 것이니! 순진하다 해야

하나, 어리석다  고 해야 하나? 일본은 1차 대전에 미국과 같은 연합국으로 승전국 이네요?

 

패전국 점령지라야 민족자결주의를 기대해 보는데 그마저도 터키 점령지인 이라크와 요르단

은 터키에 대항해 싸우면 독립영국이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차지하는 식이니..승전국 일본은 더 차지해야? )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델란드 등이 조선이 아니라 일본편 을 든 것은... 조선이 독립

하면 자기네 식민지도 독립 시켜 주어야 하는데 어떤 얼빠진 나라가 그러겠는지요?

  당시 일본에는 중국의 손문 은 물론이고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

와 인도의 독립 운동가 들이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투쟁을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일본이 이들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해주면, 세계 각국도 조선이며 베트남 등의 독립운동

들을 탄압해 주는 것이니, 어찌 세계 열강들이 조선의 독립 호소를 들어주리요?  

  또 1945년 8월 15일 (실제로는 16일) 전국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서로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던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웃집의 꼬임에 빠져 비싼 고리채를 내 물정 모르는 투자를 했다가 집을 날리고 이웃에 

월세  살면서 우리 아이들이 주인집 아이에게 구박당해 눈물을 흘렸다고 쳐도... 

 그 못된 이웃인 주인집이 과욕을 부리다가 망하여 집이 경매 에 넘어가게 됐다고 해서

내가 만세를 부르며 기뻐해야할 이유가 있는지.... 그럼  그 집이 다시 내 집  이 되는가요?

 

 

  내가 평소에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눈물겹게 저축 을 해서 모아둔 돈이 있다면 경매 

참여해 낙찰 을 받으면 다시 내집 이 될 수도 있지만 모아둔 돈 이 없다면???

  독립군은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후 일본군에 쫃겨 소련으로 도망쳤다가 시 

사변으로 몰살당하고 살아남은 일부가 만주로 돌아오나 큰 전투를 벌일 힘은 없었습니다.

 

(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 식량과 숙소며 군자금등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조선인 부락

들은 독립군이 소련으로 도망치자...일본군에 의해 모조리 불타고 학살 당합니다! )

 

 

  독립군은 지청천 등이 12년후 1932년 영릉가전투와 흥경성,  쌍성보전투에 1933년 사도하자

전투와 동녕현성 전투등 소규모 몇차례 전투를 끝으로 1934년 양세봉이 사살 되면서... 

  만주에서 쫃겨나 흩어져 버렸고,  좌파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 과 연계된 김일성, 최용건.

김책, 김일 등이 동북항일연군 으로 일본군과 1939년 까지 소규모 전투를 벌였을 뿐입니다.

 

 

   만주에서 쫃겨나 흩어졌던 민족주의자 들은 그후 1940년에 중경에서 광복군 

조직했지만 재정이 열악 하니 광복군 5백명도 유지하기가 힘든지라.....

  일본군을 상대로  단 한차례의 전투 도 벌이지 못했으니 무엇으로 조선의 독립을

주장 할 것인지요? 승전국 미국에 우리가 미군 대신 피를 흘렸다는 실적 을 내 놓아야? 

 

 

 1941년 12월 진주만 습격으로 태평양전쟁 이 일어났을 때가 기회 니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쌀과 포목등 공출 을 회피하고 징용과 징병을 거부 하며 궐기 하여 일본과 싸웠다면!

  가옥 수십만채가 불타고 조선인 사상자가 수십만명 나왔겠지만 그로 인해 미군과

싸우는 태평양 전선 으로 갈 일본군 50만 정도를 조선에 몇년간 붙잡게 되었더라면.....

 

  미군 1만명의 목숨을 구할수 있었을 것이니.....  조선은 독립을 주장할 자격 이 있게 되는

이고 희생자는 안타까우나 훗날  6.25를 피할수 있었을 것이니 오히려 나았을른지도!!!

 

 

1941년 12월 진주만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한국인들은 미국편에 서서 싸운게 아니고

일본편에 서서 싸웠으니...  군인들 군량인 쌀을 공출하고 징용가서 석탄과 철광석

을 캤으며 공장에서 총과 탄약을 생산한 외에도 한국인 징용자들은 남양군도에서

곡괭이로 활주로 를 만들었으니 거기서 이륙한 일본기는 미국 함정을 격침 시켰습니다.

 

일본군에 입대한 한국인은 10만명 이 넘었으니  미군 및  영국군,  중국군과 싸웠는데 그들중

단 1% 라도  모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두서너명이라도 협력해 탄약고나 유류고를 폭파

하거나, 그도 아니면 혼자서 대대장을 사살하거나 또는 전투 도중에 총을 거꾸로 쏘거나

자기 진영에 수류탄 을 투척한 사람이 10만명  중에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 이 놀랍습니다?

 

 

  일본이 망했는데 왜 조선이 독립 해야 하는지.... 조선이 자력으로 일본을 망하게한 

아니라 미국과 소련 등이 그리했다면 조선은 그들 새 주인의 속국 이 되는 것이라?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천명할 때   “적당한 시기”    에 그리한다고 했던 것이니!

미국은 조선이 독립할 자격도 능력도 없으니 25년간 4대국 신탁통치 를 주장합니다.

실무자 초안은 "가능한 이른시기" 라 되어 있었으나 루스벨트 는 이를 “적절한 시기”

로 고쳤고 처칠과 협의를 통해 “ 적절한 절차를 거쳐 in due course”  로 최종 수정됩니다!

 

 

미국의 경제적 능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련이 25년에 반대해 5년으로 합의 를 보았는데,

한국인들이 격렬하게 반탁데모 를 벌여 4대국 신탁통치는 결국 좌초되게 됩니다.

   만약에 신탁통치 를 받아 들였으면 독일 처럼 경상도는 영국,  평안도와 황해도는 

중국(장개석),  경기와 강원, 충청, 전라는 미국이 맡고  함경도를 소련  이 나누었다면....

 

  전후  미 ,영, 프랑스 신탁통치령이 서독  이 되고 소련령이 동독 이 되었던 것 처럼

한반도 그리 되었다면.... 김일성이 함경도 단 하나를 밑천으로 6.25 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우매한 상념에서 깨어나 운하를 걸어 호스텔로 돌아와 체크

아웃을 하고는  Den Haag HS 역으로 가서는 암스테르담 가는 기차에 올라 탑니다.

 

 

  돌아보니 헤이그 Den haag 는 네델란드 3번째 도시로 16세기에 네델란드 연방이 성립된후

국회의사당 이 설치되었으며 평화궁(국제사법재판소 과 대사관 등이 모여 있습니다.

 도심에는 광대한 공원이 여럿 있으며 베아트릭스 여왕의 궁전과 하우스텐보스 등

볼거리가 많은데 헤이그는 영어식 발음이고 현지에서 덴하그(백작의 울타리) 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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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2.12.02
    사람을 얻는 비결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눈은 먼 곳에 두되
    가까이에 있는 인연에 충실하다 보면
    장차 드넓은 천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스유엔(史源)의《상경(商經)》에서-

    늘 즐겁고 健康 하시고 幸福 하시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2.02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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