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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5 - 리예카에서 크로아티아를 되돌아보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3.01.13|조회수115 목록 댓글 4

 

크로아티아 여행5 - 항구 리예카를 구경하면서 크로아티아의 역사를 되돌아보다!

 

 

2022년 4월 30일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렙 시외버스 터미널 Autobusni Kolodvor 정류소

에서 이스트라반도의 모토분 Motovun 으로 가기 위해 파진 Pazin 행 버스를 물으니

코로나 사태로 버스 편수가 많이 줄어들었는지..... 파진행 버스는 오후 4시에나 있다네요?

 

 

4시간 동안 기다릴수는 없는지라 12시 반에 리예카 Rijeka 로 가는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서

3시 30분에 도착해서는 버스터미널에서 물으니 파진은 저녁 7시에 출발한다기에 3시간

반을 기다릴수 없어 4시 출발 로비니행 표를 끊고 항구를 구경하며 크로아티아 역사를 생각합니다.

 

 

유럽은 라틴족(그리스, 로마, 스페인, 포르투갈)과 켈트족(프랑스, 스위스, 영국) 게르만족(독일, 오스트리아,

네델란드)에 노르만족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및 슬라브족으로 나위는데 슬라브족은

동슬라브(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루스크), 서스라브(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및 남슬라브로 대별 됩니다.

 

 

 

크로아티아 민족은 남슬라브(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족에 속하니 언어도 옆나라인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와 거의 같으며 유고 슬라비아 시절에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불렸습니다.

 

 

크로아티아 왕국은 925년경 토미슬라브(Tomislav)를 최초의 국오아으로 보지만 그 후임인

스트예판 드르지슬라브(Stjepan Držislav)를 최초의 크로아티아 왕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후 페타르 크레쉬미르 4세 재위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으이 노르만족의 침략을 받아 죽습니다.

 

 

아들이 없었으니 드미타르 즈보니미르(Dmitar Zvonimir, 재위 1075~1089)가 로마 교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으나 1089년에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다가 국력 소모와 재정파탄을 이유로 원정을 반대하던

귀족들에게 시해당하고 스트예판 2세(Stjepan II, )가 옹립되었지만 후손없이 죽자 계승 분쟁이 발생합니다.

 

이 광경을 보다못한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의 왕비 옐레나 리예파 (Jelena Lijepa, ? ~

1091)는 즈보니미르의 처남이자 그녀의 오빠였던 헝가리 왕국 왕 라슬로 1세

에게 크로아티아 왕위를 제안했고 제안을 수락한 라슬로 1세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합니다.

 

하지만 헝가리왕은 슬라보니아(Slavonia) 의 반(Ban) 페타르 스나치치(Petar Snačić, 재위 1093~1097) 를

왕으로 추대한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반발에 결국 크로아티아의 왕위를 얻지는 못했는데 자그레브

라는 도시 이름은 이때인 1094년에 처음 보이니 교구가 설치되고 대성당의 토대가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그후 1097년 라슬로 1세 뒤를 이은 칼만 1세(Kálmán I, 재위 1095~1116)가 스나치치를 살해하고 슬라보니아

점령에 성공하지만, 달마티아 지역 귀족들의 저항에 못이겨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해주되 칼만 1세가

크로아티아 왕위를 겸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이로써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동군연합이 성립합니다.

 

 

1242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벨라 4세는 그라데치(자그렙)를 독립적인 시장 선출권을 포함한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수여하며 자그렙을 하나의 자치도시로 인정하니 그라데비치는 성벽과 탑

으로 요새화할 것을 약속했으며 여러개의 성문을 만들었는데 현재 남은 것은 스톤게이트가 유일합니다.

 

 

그후 13세기 헝가리의 왕권이 완전히 무너지자 지역 영주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기 시작

했으니 14세기에는 세르비아 제국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으나

헝가리가 다시 중흥을 맞이하고 세르비아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위협을 떨쳐냈습니다.

 

 

그러나 15세기 헝가리 국왕이자 보헤미안 국왕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당선되는 등 헝가리가 유럽 정세 한복판에 깊숙히

말려들기 시작하면서 베네치아가 달마티아를 탈취하는 등의 영토 상실이 있었습니다.

 

 

15세기 후반부터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군의 피상적인 침공과 약탈을 겪었지만, 크로아티아가

오스만 제국과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전반에 들어서니 1526년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 왕국을 침공했고 이에 모하치 전투가 벌어집니다.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3개국의 국왕을 겸하고 있었던 야기에우워 가문의 러요시 2세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헝가리군은 대패하여 사실상 멸망했는데 이때 러요시 1세의 자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가 러요시 2세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합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크로아티아 왕국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신속하게 페르디난트 1세를 국왕으로 인정 했으니 동시에

보헤미아, 서부 헝가리도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에 귀속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회상을 접고는 버스에 오르니 자그렙에서 리예카는 1인당 77쿠나였는데 비해 리예카에서 로비니

로 가는 요금은 무려 120 쿠나이니 해안을 돌아 풀라를 거쳐 가는지라 거리가 멀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리예카에서 기다렸다가 7시 파진행 버스를 탈걸 하고 후회를 하기도 햇는데 해안 도시인 오파티야

를 지나면서 보니.... 그 풍광이 아름답기로 오히려 이 선택이 더 좋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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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드보라공주 | 작성시간 23.01.13 꾸준하게 코로나 19 가운데서도 여행 다니시니 대단하십니다.
    올해도 여행기 많이 올려 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1.14 고마운 말씀입니다. 코로나로 움츠렸다가
    금년에 다시 유럽 9개국을 여행하고 왔습습니다.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3.01.13
    청춘은 다시오지 않는다.
    하루해는 다시 밝기 어렵다.
    좋은 시절에 부지런히 힘쓸지니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도연명
    건강과행운이 늘 함께하시길 빕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1.14 아는 말이기는 하지만....
    실천은 또다른 문제인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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