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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니 2 - 올드타운 골목길을 걸어 푸른 해변을 구경하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3.01.26|조회수75 목록 댓글 0

 

크로아티아 로비니2 - 로비니 올드타운 골목길을 걸어 푸르른 해변을 구경하다!

 

 

2022년 4월 30일 자그렙에서 버스로 3시간 걸려 이스트라 반도 항구 도시  리예카 Rijeka

를 구경하고는 다시 버스를 타고 고급 리조트가 늘어선 해변 오파티야와

로브란을 거쳐 내륙에 라빈을 지나 풀라를 거쳐 북상해 로비니 에 도착하니 오후 7시 입니다.

 

 

배낭을 메고 시내로 들어가 해변가 환전소에서 환율 을 물으니 유명 관광지에다가 마침 오늘이 주말

토요일 저녁이라 할증이 붙어 자그렙에서 7.5 쿠나이던게 1유로에 6.2 쿠나니 50유로만 환전

하고는 3거리 티타 광장 Trg M. Tita 에 도착해 이스토리아 호텔에 방이 없기로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골목에 문이 닫힌  여인숙 같은 아파트먼트를 발견했는데 마침 지나가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휴대폰

을 주며 전화를 부탁하니 자기가 아는 호텔 이 있다기에 따라 가서는 2인 1실 1박에 115유로

를 주고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쿠폰을 얻어 인근 이스토리아 호텔 에 가서 아침을 먹습니다.

 

 

그러고는 호텔에 체크 아웃을 하고는 방파제를 구경하다가 다시 골목길을 올라가서는 인터넷

으로 예약한 아파트먼트 주소 Apartments Villa Bianca 를 찾아 체크인을 하고는

배낭을 던져넣고 바로 나와 골목길을 올라 가면서 기념품가게며 옷집과 카페들을 구경합니다.

 

 

이 도시 로비니 Rovinj 는 달걀 처럼 생긴 육지가 바닷가에 놓여있으니 아담한 언덕 꼭대기에는 유페미아

사원 이 우뚝 솟아있고 경사를 따라 주황색 지붕이 빼곡이 흘러내려 마을을 이루니.......

프리모스텐과 코르출라가 그러한데 자료를 찾아보니 원래 섬이 18세기에 섬과 해안을 매립 했다고 합니다.

 

 

여기 로비니등 이스트라 반도는 고대에는 일리리아 Illyria 라고 불리며 로마 의 지배를

받았으며 13세기부터 500년간 베네치아 통치 를 거쳐 오스트리아 지배 

받았으니 비엔나 분위기도 나는데 1763년에 섬과 해안을 매립해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1차대전 후인 1918년 부터 1947년 까지는 패전국인 오스트리아는 물러가고 승전국인 이탈리아 

지배를 받았으니.... 그런 역사적인 영향을 받아 지금도 주민의 10% 는 이탈리아계 라고 합니다.

 

 

로비니는 이탈리아어로는 로비뇨 Rovigno 라고 하며 구시가는 좁아 길을 잃기 쉬우며 항구를

따라 다채로운 건물과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고 페리 선착장에는 리조트

섬인 산타 카타리나 Sv. Katirina 으로 가는 페리가 있으며 방파제가 거닐기에 아주 좋습니다.

 

 

이 나라 크로아티아 국장 (Grb) 에는  16세기 크로아티아 왕국에서  부터 사용된

체크무늬 (Šahovnica) 가 들어가 있으니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

도 이 무늬가 있을만큼......  크로아티아인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방패 상단의 다섯 문양은 중앙은 크로아티아 (Središnja Hrvatska) 이고 그외 브로브니크 (Dubrovnik),

달마티아(Dalmacija),   이스트라(Istra),   슬라보니아 (Slavonija)  지방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체크무늬  유래는 13세기에 무려 500년 간이나 이탈리아 동북에 자리하면서 흑해와 레반트며 이집트와 무역

을 하던 해운 강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 의 보호국이었던 달마티아 왕국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달마티아 국왕 스테판 1세 와 달마티아를 장악하려고 노리던 아드리아해 북쪽 베네치아의

피에트로 총독 간에 체스 대결에서 피에트로 총독이 스테판 1세를 붙잡았을

때, 그에게  "만일 나와의 체스 대결에서 이기면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  라고 말했습니다.

 

 

스테판 1세는 "만일 각하와의 체스 대결에서 내가 이기면, 나를 풀어 달라." 고 요청 했다는데 둘 다

체스광이었으나..... 실력은 달마티아의 국왕 스테판 1세가 앞섰는지 결국 그가 이겼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소원대로 피에트로 총독은 스테판 1세를 풀어주어야 했으며 이후 베네치아

의 간섭을 피해 달마티아의 자주 독립 을 지키려 노력한 스테판 1세 를 기려,

크로아티아 전체의 상징으로.... 체스 무늬인 빨간색 체크무늬 로 굳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어 저 악명높은 가톨릭 교권 파시즘 단체이자 2차 세게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부역한 우스타샤 도 이 무늬를 사용 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을 보고 우스타샤를 방불케 한다며 반감 을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의 나치와 협력한 크로아티아

측에 의해 학살을 겪었던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등 구유고권 다른 나라들에서

많이 나온다니....  그럼 한국인들이 마치 일본의 욱일기 를 보는 것과 같은 듯 합니다.

 

 

지중해 해운강국  베네치아는 레판토 해전 에서 승리해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  의 유럽

침공을 막아내는등 유럽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로 이름을 날렸으나 16세기 초에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과 포르투칼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항로 를 발견합니다.

 

 

인도의 고아를 점령한 포르투갈이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던 후추등 향료 무역을 독점 하자

엄청난 타격을 받은 베네치아는 북부 이탈리아로 진출해 농장 을 사들이니......

무역선 선장에서 대농장주로 변신해 안일에 빠지자 진취적인 기상을 잃고 쇠락 하게 됩니다.

 

 

19세기 초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대가 북이탈리아로 침공해 오스트리아군과 싸우자 베네치아는 중립 을

선언했는데 베네치아의 농장들이 점령당하자 동원령을 선포하니 나폴레옹은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자

해제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나폴레옹은 돌연 베네치아를 침략 하니 힘도 못써 보고 항복합니다.

 

 

나폴레옹은 북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아 국제정세가 비 우호적으로 흐르지 달래기

위해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 양도 하니..... 여기 이스트리아 반도와 더 남쪽

자다르등 500년간  베네치아 속국이었던 지방도 덩달아 오스트리아 로  소유권이 넘어 갑니다.

 

 

베네치아와 속국들을 손에 넣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할때까지

지속되었는데...... 다민족으로 구성된 방대한 영토를 통치했던 합스부르크가는 현지의 문화와

자치권을 상당부분 인정하는 관용정책을 펼쳤으니 이에 크로아티아도 상당한 자치 를 누릴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에 귀속된 이후 크로아티아의 영토 대부분은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거듭된

공세 를 받는 변경 지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국토가 쑥대밭 이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국가는  "아름다운 우리 조국 (Lijepa naša domovino)"  이니 시인인 안툰

미하노비치가 1835년 3월 14일에 발표한 〈 조국 크로아티아(Horvatska domovina) 〉

가 원작으로 곡조는   세르비아인 작곡가인  요시프 루냐닌이 1846년에 작곡 하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대와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거쳐 1972년 2월 29일에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에서 크로아티아의 국가로 다시 채택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국가로는 1990년 12월 21일에 채택되었습니다.

 

 

여기 해변에는 개를 데리고 산책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러다가 홀로 돌아다니는 개 인 듯

목줄도 없는게 시커멓고 꽁지가 빠진 모습을 보니 맹견이 아닐까 싶어 조심이 되니, 문득

우리나라에서 실종소녀를 구했던 군견 달관이 가  ‘전역 멍 받았습니다’  라는 신문 기사가 떠오릅니다.

 

 

2019년 충북 청주시 일대에서 실종된 조은누리 양(14세) 수색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수컷 셰퍼드 군견  ‘달관이’  가 8일 전역했으니 통상 은퇴식은 여러 군견을 모아

통합 행사로 진행되지만 육군 32사단 장병들은 직접 이날 은퇴식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세종에 위치한 기동대대에서 열린 은퇴식엔 3년전 달관이가 구조했던 조 양과 가족들도 자리했으니 달관이는

3년만에 만난 조 양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응시했다는데 조 양의 아버지 한신씨는 “달관이가 없었다면

이 자리에 우리 가족도 없다” 고 전했으니, 한신씨는 은퇴식에서 손수 작성한 편지를 낭독하며 감정이

복받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장병들은 제2의 인생을 축복하는 꽃목걸이를 달관이에게 선물했습니다.

 

 

달관이는 3년전 일약 ‘국민 영웅’ 으로 떠올랐으니 가족과 등산에 나섰다가 실종된 조 양 수색을

위해 군경등 7,000여 명이 나섰지만 진척이 없던 상황에서 박상진 원사와 함께 달관이는

실종 열흘째 되는 날 야산을 헤집고 다니다거 조 양의 체취를 맡았으니 구조 대상자를

발견했을 때 하는 ‘보고 자세’ 를 취했고, 위치에서 3m 떨어진 바위 구석에서 조 양이 발견됐습니다.

 

 

조양 수색작전을 포함해  작전에 12회나 투입된 달관이는 2012년생으로 올해 나이 10세니 2013년 군견

훈련소에서 20주간 훈련을 받고 그해 32사단 기동대대에 배치됐는데 사람으로 치면 70대 고령으로

수색능력엔 문제가 없지만 매년 받는 건강검진 결과 골반이 좋지 않다는 진단이 나와 전역이 결정됐습니다.

 

 

한때 달관이는 ‘탈영견’ 이기도 했으니 2014년 군견교육대로 보충교육을 받으러 가던 달관이는 중부고속

도로에서 군용트럭의 철망을 뜯고 달아났다가 하루만에 인근 야산에서 생포됐으며 이후 달관이는

2016년 2작전사령부 군견 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을 비롯해 군견 훈련소 보수교육에서도

매년 종합 성적 1, 2 위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군 생활(?) 에 매진 했다고 합니다.

 

 

9년여의 군 생활 동안 달관이와 호흡을 맞춘 군견병은 총 9명으로 은퇴하는 날까지 달관이와

함께한 김민수 일병은 “낯선 군대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신뢰와 우정을 쌓은 소중한

전우”  라며 아쉬움을 전했는데 군 관계자는 “은퇴 후 달관이는 임무를 수행하지 않지만

기존 32사단 기동대대에서 전우들과 제2의 ‘견생(!)’  을 살수 있도록 할 것” 이라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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