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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피란2 - 해양박물관을 보며 옛날 지배자 베네치아를 생각하다!
2022년 5월 4일 슬로베니아의 코페르 Koper 에서 1.8유로 하는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이졸라
Izola 에 도착해 요트와 보트가 빽빽이 정박중인 항구를 구경하고는 다시 4.5 유로
하는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달려서 서너군데 도시를 거쳐 한시간 만에 피란 Piran 에 도착합니다.
골목길로 들어가서 우리 호텔을 찾았으나 지금 시간이 13시 20분으로 12시부터 3시간
동안은 점심시간 이니 호텔 문이 딛혔기로 골목 입구로 나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배낭을 메고 해변과 부두를 구경한후 3시가 되어 호텔로 찾아가 체크인을 합니다.
B&B Miracolo di Mare Retro : Tomšičeva 23 6330 Piran ☎ +386 5144 5522
요금은 EUR 85.00 이나 도시세가 1인당 무려 € 5 이니 도합
95유로로 한화로는 ₩128,000 원 정도이니 방에 배낭을 넣고는 밖으로 나옵니다.
피란 Piran 은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만 건너편에 이등변삼각형 모양으로 돌출된
반도로 남부는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고 북부 해상은 이탈리아와 접합니다.
도시에 염전이 있어 일찍이 소금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고 13~18세기에는 베네치아의 지배 를 받았으며
구시가지는 돌이 깔린 골목과 역사적 건축물이 해안선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합니다.
피란은 큰 항구도시로 부두에는 요트와 보트 가 빽빽하게 정박중이며 유명한 겨울 휴양지인 탓인지 관광객
들도 많이 보이는데 천천히 걸어서 도시의 중심 광장으로 가다가 도중에 해양박물관 이 보여 들어갑니다.
해양박물관 Pomorski Muzej 은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 지배 아래 항구 도시로 발전해 온
피란의 해양역사와 또 소금을 구산지이니 제염역사를 전시하고 있는데....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서부 달마치아 는 베네치아를 빼놓고는 역사를 말할수 없습니다.
베네치아 는 유리공업을 일으켰고 선박을 만들어 동방무역 에 나서니 이탈리아의 무역도시는 제노바, 피사,
아말피 와 4개도시이고 여기다가 크로아티아의 라구사(두브로브니크) 와 함께 5대 무역국으로 불립니다.
이 5개 나라는 콘스탄티노플과 흑해, 오늘날 레바논인 레반트 지역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교역해 비단과 후추를 비롯 향신료 등 동방무역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서로 싸우다가 제노바와 베네치아 두 도시가 살아남았고 이 두 도시는 오래토록 전쟁을 벌입니다.
베네치아 는 아드리아해를 내려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돌아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로 가는데....... 그 도중에 슬로베니아의 피란 과 크로아티아의 여러 해변 도시들을 장악합니다.
5세기경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훈족의 침입 으로 북이탈리아가 쑥대밭이 되자 이탈리아 반도 동북부
아퀼레이아의 석호로 도망쳐 들어오는데 7세기 경에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동로마제국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697년에 최초의 베네치아 도제 가 선출되었다고 합니다.
서로마 멸망후 훈족과 여러 게르만족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었다가 중세 성기(11세기-13세기) 후 하나 둘씩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던 다른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달리, 베네치아는 로마제국 자체의 인프라와 정통성 을 잘 보존한 자치 공화국으로 시작합니다.
즉 베네치아는 북이탈리아의 대다수 지역들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없었으니 이런 독자적인 역사적 기원 은 먼 훗날 중세의 전성기를 거쳐 근세의
시련과 위기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이데올로기적 원천이 되었습니다.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지중해 패권 상실로 8세기 중엽에 베네치아는 북이탈리아에 남은 유일한 동로마의
거점 이 되었으니 이때 베네치아는 친동로마, 친프랑크, 친랑고바르드, 완전한 자주국으로의
독립을 원하는 세력이 나뉘어 있었으니 이들은 끊임없이 경쟁하여 세습왕조가 창건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베네치아 는 이 시기부터 어촌에서 무역과 교역의 중심지 로 탈바꿈 하였고 조선업도 발전해
후일 베네치아의 강력한 함대의 기반이 되었으며 810년 프랑크의 피핀 3세와 전투해
승리한후 베네치아는 사실상 독립했으니, 9세기 중반 부터 베네치아의 해군력
은 강해졌으니 여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이스트라 반도 도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됩니다.
10세기 말부터 내부분열이 완화되자,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로 진출을 꾀하게 되니 1000년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2세 오르세올로(Pietro II Orseolo) 는 크로아트 왕국과 아드리아 해에서 암약하는
슬라브 해적들을 때려잡으며 달마티아 일부를 차지한 이후 달마티아 공작 (Dux Dalmatiae)
를 칭했으니..... 1082년 베네치아는 동로마로 부터 금인칙서 를 받아내었고 완전한 독립국이 됩니다.
베네치아 독립이 다른 북부 도시국가들에 비해 늦었던 이유는 아드리아해 일대의 지리적인 특징 때문이니
아드리아해의 양안, 즉 발칸반도와 남이탈리아를 모두 영토로 삼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가
반항할 낌새를 보이면..... 바로 해상봉쇄를 시행하여 베네치아의 목줄 을 죌 수가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하지만 1071년 셀주크 투르크와의 만치케르트 전투 패배로 동방 방어선이 붕괴되어 동로마 제국의 발등
에 급한 불이 떨어지고 동시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기사들이 남이탈리아를 장악 합니다.
노르만이 그리스 본토를 넘보면서 베네치아에 신경쓸 겨를이 없어지게 된 알렉시오스 1세는 그리스를
침공한 노르만인 로베르 기스카르를 몰아내는데 베네치아의 지원 을 받는 조건으로 무역혜택
과 함께 베네치아 도제를 명목상 달마티아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베네치아의 독립 을 승인합니다.
중세 성기(聖期)에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무역을 지배하며 부를 축적 했고 아드리아해 너머로 확장
하기 시작했으니 십자군 전쟁 기간에는 여러 십자군들을 해로로 운송 해주고 더 나아가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에게 보급품이나 해군력을 제공 해 줌에 따라 상당한
정치적, 금전적 영향력을 얻게되었으며 12세기 동안에 베네치아에 대규모의 조선소가 건설됩니다.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황위에 오르게 도와준다면 거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4세를 징벌 하려는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가 직접 앞장서서 전쟁비용이 떨어진 4차 십자군을
꼬셔서 크로아티아 자다르성을 점령 하고 발목잡힌 십자군을 회유해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하는데
성공했는데.... 하지만 이런 술수로 인해 정교회 국가들로부터 배척당하고 교황에게 파문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역이 많이 오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무역 지대에 라틴제국을 세웠던 덕에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이자 동지중해 무역의 독점 국가로 등극하면서 동지중해의 여왕 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부를
과시하게 되었으며...... 또한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크레타, 에우보이아 등 전략적 가치가 큰 영토
들을 획득하게 되었으니, 이때 낙소스도 영향권에 두게 되었고 1221년에는 몽골과도 무역협정 을 맺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인구가 적은지라 배의 선원과 해군은 자국인 으로 충당하고 갤리선의 노를 젓는 노잡이들은
여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서부 도시 들에서 구했으며 코스탄티노플이나 레반트로
가는 배에서 먹을 식량과 채소며 과일과 유제품 도 이쪽 슬로베니아나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선적했습니다.
13세기~14세기에 동방무역 독점을 위해 제노바 공화국과 4차에 걸친 전쟁 을 벌였으니 1차 전쟁을 성 사바스
전쟁(1256 ~ 1270년) 이라 하는데, 십자군 수송과 보급 및 이집트와의 교역으로 세력을 키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필연적으로 패권 경쟁에 나설수 밖에 없었으니 1250년대 들어 신성로마제국의
공위기와 이탈리아 코뮌시대의 개막등 기존 유럽 질서가 무너져가던 시기에 양측의 전쟁은 촉발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중인 레반트의 아크레 (이스라엘 아코)는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의 세 공화국이
상업 지구를 설치한 상태였는데 그중 베네치아와 제노바 구역 사이에는 정교회
소속인 성 사바스 수도원이 소유한 몽조이 라는 이름의 언덕 이 하나 있었으니 수도원
은 베네치아측에 소유권을 이양했는데, 이를 제노바 측이 문제를 삼으며 분쟁이 불거집니다.
어느날 밤을 틈타 제노바인들이 언덕을 점거 하였고 이에 베네치아 측이 항의하니
제노바인들은 피사인들과 함께 베네치아 구역을 약탈 하였고 양측의
갈등은 증폭되었으나 아크레 정부의 중재로 1256년 초에 간신히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아크레 북쪽 도시 티레(레바논) 역시 제노바와 베네치아 구역이 병존하였는데, 영주이자 베네치아를 탐탁치
않아하던 필리프 드 몽포르는 베네치아 상인들을 도시에서 축출 하였으니 베네치아 측은 이를 제노바인
들이 사주한 것이라며 분노하였고 이에 제노바측이 중재에 나섰으나 별 효과가 없자 갈등은 재점화됩니다.
아크레의 베네치아 지휘관 주스트니아니 는 예루살렘 왕국의 제후이면서도 독립적인 행보를 이어간 티레
를 경계하던 섭정 장 드 이벨린과 연합 하였으며 한편 추이를 지켜보던 피사인들은 제노바를
배신하고 베네치아측에 붙었으니 그러자 열세에 놓인 제노바가 티레와 동맹하며 십자군 세력은 양분됩니다.
1258년 6월 무력으로 상권을 탈취 하기로 결정한 제노바 공화국은 로소 델라 투르카 제독을 티레
에 파견했으니...... 그는 티레에 당도한 직후 현지 함대를 합친 50여척의 대함대로 아크레
로 향하였고 동시에 티레의 영주인 필리프 드 몽포르도 기사들을 이끌고 아크레 공격에 나섭니다.
이 소식에 고무된 아크레의 제노바인들이 베네치아 구역을 공격 하였고 아크레 정부는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데
50척 제노바 함대는 베네치아의 제독 로렌초 티에폴로 휘하 40여척의 함대 앞에 기습적으로 등장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델라 투르카 제독이 머뭇거리는 사이 전열을 정비한 베네치아 측이 공격해오자 대패 합니다.
24척의 전함과 1,700명의 병력을 상실한 제노바 함대는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 덕에 추격을 받지
않고 티레로 도주 할 수 있었으며 티레의 육군 또한 아크레 민병대에 의해 격퇴되었으며
승리후 베네치아 함대는 제노바인들이 항구에 쳐놓은 쇠사슬을 끊고 진입하여 베네치아
구역을 회복하고 제노바 구역을 포위 하니 제노바인들은 석궁병들의 활약으로 포위를 버텨냅니었다.
1258년 7월 보다못한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개입하여 양측의 휴전을 지시하였으니 아크레의 제노바 구역
을 뺴앗고 대신 티레에서의 권리를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었는데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의 사절단이
아크레(아코) 로 파견되었고 비슷한 시기 몽골군의 위협이 고조 되며 싸움은 자연히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1260년 몽골군이 레바논 항구 시돈을 공격 하는등 레반트에 전운이 드리우자 다급해진 기독교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의 주선으로 협상이 시작돼 1261년 1월, 양측은 앞서 제시된 교황의
제안대로 휴전을 체결하였으니 제노바는 티레, 베네치아와 피사는 아크레의 상권 을 나눠 가집니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3월, 제노바 공화국은 동로마와 님파이온 협약을 체결하며 에게해와
흑해에서의 독점 무역권을 확보하였으니, 미카일 8세의 예상과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은 제노바의 도움 없이 이루어졌지만 제노바-동로마 동맹 은 이후 반세기 가량 지속됩니다.
휴전중 1262년 베네치아 선박들이 동로마의 마르마라 해역을 약탈 하다가 동로마-제노바 선박에게 격퇴되는
등 양측의 적대감은 지속되었는데.... 그러던 1263년 동로마의 아카이아 원정을 돕기위해 그리스 남부
를 항해하던 48척의 제노바 함대는 세타포치 섬에서 32척의 베네치아 함대와 조우하니 세타포치 해전입니다.
베네치아 측이 십자군 깃발 을 들고 전진하자 제노바 측에선 겨우 14척만이 응전하였고 그중 4척이
사로잡혔으며 나머지는 도주하며 동로마에 대한 원조는 무산되었으니.... 이 소식을 접한
동로마 황제 미카일 8세는 이듬해 제노바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베네치아와 협상했지만
결렬되었고 결국 1266년 시칠리아 왕국의 침략 위협에 직면한 미카일은 재차 제노바와 동맹합니다.
제노바는 연이은 승리에 고취된 베네치아의 앞마당을 공격 하기로 결심했으니 17척
의 제노바 함대는 아드리아해(베네치아 만) 로 이동해서는 알바니아 근해의
사세노 섬에 정박한 20척의 베네치아 수송선을 발견하니 사세노 해전(1264년) 입니다.
제노바 제독 시모네 그릴로는 베네치아 호위 함대를 트인 바다로 유인한후 우회하여 따돌렸고 곧장 사세노섬
으로 향하여 정박하고 있던 수송선중 15척을 나포하고 나머지 2척을 격침 하였고 이후 베네치아 함대
가 돌아오기 전에 전장을 빠져나버렸으니..... 일거의 습격으로 베네치아는 10만 리브르의 손해 를 보았습니다.
1263년에 제노바와 티레의 영주 필리프 드 몽포르는 베네치아의 위협에 맞서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체결한 터였기에 다른 십자군 도시들 역시 베네치아 편
이었으니 따라서 1264년 9월, 베네치아 공화국은 레반트에서 제노바의 영향력
을 제거하기 위해 그 거점인 티레를 공격하였으나 격퇴 되었는데 티레 전투(1264년) 로 불립니다.
1266년 봄, 24척의 베네치아 함대가 북아프리카의 튀니스 에 들이닥쳐 정박 중이던 제노바 무역선과
창고를 약탈 하고는 시칠리아로 돌아갔는데, 이에 당시 코르시카에 주둔 중이던 27척의
제노바 함대가 남하하여 시칠리아 서부의 트라파니에서 조우하였으니 트라파니 해전(1266년) 입니다.
베네치아 해군의 연승에 기가 죽은 제노바 함대는 사슬로 함대를 묶어 전투중 이탈을 방지하고자
했으나 역효과가 나서 한꺼번에 격파되었으니 패색이 짙어지자 제노바 병사들은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었고 이로써 베네치아는 모든 적함을 나포하고 8백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육지로 헤엄치던 병사들 중 1,200명이 익사하는등 제노바 측은 대패 했습니다.
1267년 8월, 제노바 공화국은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재차 아크레 탈환을 시도 하였으니 2차 아크레
전투(1267년) 로 루체토 그리말디 휘하 27척의 함대가 거점인 티레를 떠나 아크레로
향하였고 방파제 끄트머리의 필레 탑을 점령해, 그곳을 거점으로 항구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10여일 후에 그리말디는 15척의 함대와 선박의 수리를 위해 티레로 귀환하였고 그 틈에
26척의 베네치아 함대가 남은 제노바 함대를 공격해 5척을 침몰시키며 격파하자
남은 7척의 제노바 함대는 티레로 도주하며 제노바 공화국의 아크레 점령 시도는 무산 되었습니다.
1269년 8차 십자군을 앞둔 프랑스 루이 9세 는 양 도시의 화해를 주선하였으며 교황청과 시칠리아
왕국의 압력까지 더해져 결국 5년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으니 크레모나 조약 (1270년) 입니다.
다만 루이왕의 뜻과는 달리 그해 10월, 도리아 가문의 주도로 기벨린(친독일, 반프랑스) 세력이 제노바 를
장악해 십자군의 원활한 수송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288년에 이르러서야 제노바는 아크레의 상업
구역을 회복할수 있었지만 다만 3년 후에 도시가 이슬람측에 함락되며 십자군은 레반트에서 축출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