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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1 - 엑상 프로방스에서 버스로 마르세유에!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3.04.21|조회수251 목록 댓글 2

 

마르세유1 - 엑상 프로방스에서 철도파업으로 버스로 마르세유에 도착해 대학을 보다!

  

 

5월 23일 아침에 엑상 프로방스 Aix en Provence 에서 고대 로마 개선문과 야외극장이

완벽하게 보존된 오랑주 Orange 로 가려고 했으나 프랑스 국영철도 SNCF 가

파업중이라 기차편이 없으니 포기하고는..... 7시 50분에 철도에서 운영하는

Autocar 버스를 타고 40분 만에 마르세유 Marseille Saint Charles 역에 도착합니다.

 

 

 마르세유 는  몇년 전에 지중해 연의 니스와 모나코에 에즈와 방스까지 보고 서쪽으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다가 칸느와 앙티브를 구경하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이 도시에 도착해

역 근처 호텔에 묵으면서 노트르담 사원과 생 빅토르사원에 항구 까지 시내를 구경했습니다.

 

 

버스는 마르세유로 접어들어서 마르세유 생 샤를 기차역 에 

도착하기 직전에 엑스 마르세유 대학교 건물이 보입니다.

 

 

엑상 프로방스의 엑스 대학 과 여기 마르세유 대학이 통합 되어 엑스 마르세유대학

이라고 불리는 것 같은데.....  문득 조선대 이승우 교수의 칼럼

프로방스를 걷다에 올려진 “ 한국학과 외국인 교수의 마지막 강의”  가 떠오릅니다.

 

 

“최근에 지은 엑스 마르세유대 의 문과대학 도서관은 열람실이 넓고 카페처럼 설계된 창가

테이블이 근사해서 요새 자주 이용하고 있다.  도서관 한쪽에서는 소규모 행사가 자주

열리는데.... 며칠 전에는 독일 작가 카렌 쾰러가 와서 학생들과 대담하는 모습을 엿봤다.”

 

 

“한달 쯤 전에는 가오싱젠 센터를 재개관 하는 행사를 구경했다.  이 대학의 중국어과

교수인 노엘 뒤트레중국어로 작품을 써서 노벨문학상 을 받은 두 명의 작가인

가오싱젠과 모옌 의 작품을 번역했는데, 그 인연으로 기념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마지막 강의를  하는  장길도 교수  의 강의실에 갔다.  장길도씨는 이

대학의 한국학과 교수인 장클로드 드크레센조 의 한국 이름이다. 그는 붓글씨를 쓰고

수지침을 놓고 한국가수 노래를 부르고 한국음식과 한국문학 을 사랑하는 프랑스 사람이다”

 

 

“10년 전 프랑스에 한국 문학 을 소개하는 웹진  ‘글마당’  을 만들어 보급했,  자기 이름을

딴 드크레센조 출판사를 통해 한국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일도 한다. 많은 한국 작가의

소설들이 이 출판사를 통해 프랑스에 소개됐다. 이 대학에 한국학과 를 만든 것도 그이다.”

 

 

“처음엔 몇명 지나지 않았던 한국어 전공자가 부전공자 까지 합하면 500명 에 이른다고

한다. 케이팝을 비롯한 한류 의 영향이 컸겠으나 꼭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서프라이즈 퇴임 행사 처럼  치러진  마지막  강의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수강하지 않은 학생들 까지 몰려들어 강의실은 가득 찼고, 작은 선물과 편지들,

진심 어린 감사의 말들이 오고갔다.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편지를 써서

만든 한 권의 노트 를 퇴임을 앞둔 스승에게 증정하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선생과 학생들 간의 관계가  스스럼 없고  구겨져 보이지 않았다.”

 

 

“선생은 권위적이지 않았고, 학생들은 선생을 어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선생은

아버지 같았고 (실제로 학생들 중에는 아버지 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아들딸 처럼 친근하게,  그러면서도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나는

배꼽에 손을 얹고 공손히 인사하는 프랑스의 젊은이들 이 반가우면서도 신기했다.”

 

 

“당연해 보여야 하는 모습이 내 눈에는 왜 낯설었을까. 전에는 흔하고 익숙했지만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풍경 뜻하지 않은 곳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대학생들보다 한국을 배우는 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적인 정서 를,

적어도 표면적인 인상으로는, 더 잘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전에  고국을 떠난  이들로  이루어진  이민사회가 오히려 전통적인 것을  잘 보존 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문화를 습득하는 외국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우리 것이 지켜지고 있는 현장 을 보기 위해 이제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한국의 대학에서 사은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그러자 쓸쓸해

졌다. 사은회만이 아니라 편의와 실용적인 이유들로 인해 많은 좋은

관습이 폐기됐다.  스쿨 버스의 기사에게는 줄 수 있는 캔커피 를 그

차에 타고 있는 선생님에게 건네면 안 되는 법과 제도 는 이상하고 변태적이다.”

 

 

“물론 선생을 아버지 처럼 따르는 학생만 없어진 것은 아니고 학생을 자식처럼 대하고 존경

받는 스승도 사라졌다. 여러 분야에 인격적 요소들은 제한되거나 금지 되고 공적 내지

교환가치적 요소들만 권장되고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제공 받는 교환 경제적 관계로 변질된 것은  이 현실의 불미스러운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 사회가 몸을 싣고 내달려온 놀라운 변화의 속도에 대해 생각한다. 변화의 물살에

 휩쓸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라는 생각.  뒤돌아

보면 뒤돌아 보는 시간만큼 속도가 줄기 때문에, 그러면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뒤돌아 보지 말라는 처세술 을  교훈으로 포장해서 주입하고 주입받는 사회라는 생각.”

 

 

“물론 물려받은 것, 전통적인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 가운데 버려야 할 것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무조건 내달리는

속도의 관성에 따라 버리지 말았어야 할 것 까지 모투 내버린  것 또한 사실이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라는 말은  가죽부대(형식) 와 포 도주(내용) 가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뜻이지 새것이 오래된 것보다 좋다는 뜻으로 써먹을 말은 아니다. 오래된 좋은

것이 있고 오래된 나쁜 것이 있는 것처럼, 좋은 새것이 있고 나쁜 새것도 있는 법이다.

필요한 일을 해야하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다른 일을 하지 않을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마르세유역 창구 에 가니 사람들이 많이 몰린지라 줄은 엄청 긴 데.... 떠로 떨어진 창구는

아무래도 기차 시간표를 상담해주는 인포 일 것 같아서 가서 물으니 오랑주 Orange 는

역시나 파업 Strike 때문에 갈수 없다는데 부르고뉴의 본은 역 창구 에서 표를 끊으랍니다.

 

 

해서 다시 창구로 가서는 더 늘어나 버린 긴 줄의 뒤에 섰는데.... 모니터를 보자니 9시에

파리로 가는 떼제베 TGV 가 보입니다. 다음 파리행 기차는 무려 3시간 후인 12시라?

지금 시간은 8시 55분!  해서 황급히 배낭을 둘러메고 마눌을 재촉해 달리는데

끝까지 달려서 찾아가니 플랫폼(Quai) 1번은 Autocar.... 그러니까 버스 플랫폼 이네요?

 

 

다시 되돌아 달려와서는 숨이 턱에 달해  “i”  에 섰는데  (그러니까 모니터에 뜬 플랫폼

Quai 번호 i 를 1번으로 잘못 봄?) 여긴 직원과 경찰이 막아서서 일일이 기차표를

확인하네요? 떼제베 TGV 고속철은 좌석예약 을 해야 탈수있음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우린 유레일 패스 가 있으니 차장이 막지만 않으면 타서 식당칸에 앉아 가도 되는지라....

 

 

시간은 이미 9시 02분으로 기차문은 이미 닫혔는데 늦게온 어느 승객이 기차표를 보이며

사정하지만 차장은 냉정하게 자르고는 기차를 출발 시키니 표도 없는 우리야...

다시 창구로 되돌아와 또다시 긴 줄에 서서 유레일 패스를 보이고 12시

파리행 기차로 부르고뉴의 본 까지 좌석을 예약하는데 예약비는 10유로를 받습니다?

 

 

여기 마르세유 기차역은 테러 대비 때문인지 총을 든 무장 경찰(군인?) 이 많이 보이는데

 또 그 때문인지 코인라카 가 보이지 않는지라..... 마눌에게 쉬면서 배낭을

지키라 이르고는 기차역 밖으로 나오니 멀리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사원이 보입니다.

 

 

마르세유 Marseille 는 예전에 방문해 시내 관광지를 자세히 보았으니 오늘 또다시 볼

필요는 없지만 부르고뉴 본 으로 가는 떼제베 기차시간이 2시간 넘어 남은지라...

한번 더 보기로 하고는 기차역 계단을 내려와 대로를 걸어서 마르세유 항구 로 갑니다.

 

 

고대에 문명을 일으킨 민족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는

남자들이 평시는 물론이고 전쟁 을 할 때도 모두 치마를 입은 공통점 이 있는데...

 

 

말을 타자면 치마가 불편하니 가위로 잘라 양쪽으로 묶은게 바지 인데,  동양에서는 처음

입은게 오랑캐 흉노족 이고 서양에서는 반인반수라는 스키타이족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르세유는  로마인이 갈리아인이라  부르던 켈트족 땅  인데  남자들이 바지를 입고 전차

몰던 민족으로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스위스와 벨기에 및 영국에 거주하던 민족인데,

이 중에 로마 공화정은 BC 3세기말에 북이탈리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아 갈리아 키살피나

라 불렀으며 마르세유등 남프랑스는 BC 118년에 점령해 속주 갈리아 트란살피나 로 부릅니다.

 

 

이후 카이사르 는 BC 58~ BC 51년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해 갈리아 전역을 평정하여 로마

영토로 만들었는데 로마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AD 21년 이후로는 갈리아인의 저항이

완전히 없어졌으며...... 로마제정기에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 갈리아 아퀴타니아·

갈리아 루구두넨시스· 갈리아 벨기카의 4주(州)로 나누어져 로마화가 더욱 진행되었습니다.

 

 

포도주 · 곡물 · 치즈 · 맥주등 식품과 도기(陶器) 의 생산과 직물업 · 금속업 등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도 발전하였으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부터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기 시작했고.... 4세기에 알라만족· 프랑크족· 작센족이 침입했고 5세기에는

부르군트족 · 서고트족도 들어와 5세기 말에는  갈리아 전체가 게르만인에게 점령  됩니다.

 

 

갈리아 트란살피나는 갈리아를 완전히 정복해 행정구역으로 나뉘면서 나르보 마르티우스

(현재의 나르본) 가 주도로 되면서 갈리아 나르본네시스 라고 이름이 바뀌는데 근대에

속주를 뜻하는 ‘프로빈키아’  라는 말이 변해서 프로방스 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갈리아 트란살피나 의 영유는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간의

육상교통로, 갈리아 부족들의 공격에 대한 완충지, 론 강을 통한 갈리아와 마살리아

(마르세유) 간 교역로 확보등 이유로 고대 로마에서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동쪽인 갈리아 키살피나 는 공화정 로마의 속주였으니 현재 이탈리아 북부의 에밀리아와

롬바르디아 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속주 수도는 무티나(현재 모데나) 인데....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의 군대가 속주 총독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물리친 곳이기도 하며.....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과 침입으로 로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후 훈족의 침입으로 게르만인들의 민족이동 이 시작된 이래 프랑스에서는 게르만

프랑크서고트족을 격파하고 메로빙거 왕조를를 세웠는데, 그후 궁재

카를 마르텔(샤를 마뉴) 에 의해 카롤링거 왕조 프랑스로 교체되며 이후 

서 프랑크는 프랑스,  동프랑크는 독일, 남 프랑크는 북부 이탈리아로 상속됩니다.

 

 

카롤링거 왕조 후대에 이르러 노르만족들이 노르망디에 상륙해 루앙 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수도 파리를 노리게 되자 프랑스는 각지의 유력한 제후를 중심으로 거의 자치를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프랑스인들은 반란을 일으키는데... 936년 서프랑크왕이 죽자

네스트리우스 제후 위그 대공은 영국으로 피신했던 왕자를 루이 4세 왕으로 추대합니다.

 

 

추대된 서 프랑크왕인 루이 4세는 프랑스인들을 믿지 못하니 왕권 안정을 위해 

948에 적인 독일왕 오토 1세와 동맹 을 맺자 튜턴족의 간섭을 받게된

프랑스 귀족 들은 이에 반대해 위그 대공 을 추대하니 루이의

군대와 전투에 들어가는데 민족 진영이 승리해 루이 4세는 포로로 잡힙니다.

 

 

그러자 왕비 게르베르가는 오빠인 독일왕 오토에게 원군을 청하며 로렌을 포함한

일부 프랑스 영토를 독일에 넘겨주기로 하니 오토 1세 는 갈리아 키살피나왕

(북이탈리아) 콘라드와 함께 독일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침략해 루앙으로 진군합니다.

 

 

그러자 프랑스 민족 진영의 위그 등은 노르망디로 퇴각하는데 루이 4세는 왕위를 찾지만

원군들이 귀국해버리자 위그대공이 궐기 하니 루이 4세는 말에서 떨어져 죽게되고 그후

987년 위그 대공의 아들인 위그 카페가 왕 으로 추대하니 프랑스 카페 왕조의 탄생 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왕의 직할지는 소규모로 프랑스는 10여개의 제후국 으로 나뉘어 졌는

데....  그 제후국들 조차 자신의 영지내에 직할지는 크지 않고 다시 수십개의

소 제후국으로 나뉘어 지니 이른바 봉건 시대 라고 불리는 중세 시대인 것입니다.

 

 

이후 프랑스 카페 왕조는 발루아 왕조로 교체 되고 이후 다시 부르봉

왕조 이어지니.... 영국등 외세와 전쟁 을 치르면서

프랑스 내의  제후국들을  잠식해는  서서히  왕권을 키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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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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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3.04.21 “화내도 하루” “웃어도 하루”
    어차피 주어진 시간은 “똑 같은 하루”
    기왕이면 불평 대신 감사! 부정 대신 긍정! 절망 대신 희망!
    고맙습니다.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3.04.2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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