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프로방스의 성벽 도시 아비뇽에서 아비뇽유수를 생각하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3.06.05|조회수179 목록 댓글 0

 

아비뇽 여행 - 프로방스의 성벽 도시 아비뇽의 구시가지에서 아비뇽유수를 생각하다!

 

 

5월 23일 아침에 엑상 프로방스 Aix en Provence 에서 프랑스 국영철도 SNCF

가 파업 중이라 기차편이 없으니 7시 50분에 철도에서 운영하는

Autocar 버스 를 타고는 마르세유 Marseille Saint Charles 역에 도착합니다.

 

 

마르세유역 에서 긴 줄을 서서는 부르고뉴 본 으로 가는 떼제베 기차 좌석을

예약하고는 역을 나와 대로를 걸어서 마르세유 시내 를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마르세유 상 샤를 Marseille Saint Charles 역으로 돌아와 12시에

출발하는 파리행 떼제베 TGV 기차 를 타는데 우리 차량은 5호선이니...

 

 

 

 마눌이 오른쪽으로 들어가려기에 왼쪽이라고 하니 고개를 갸웃거리기에 왼쪽 문 위에

써 있는 번호  “5”  를 확인시켜 주는데...... 자칫 잘못하면 혼동하기 쉽습니다.

 

 

열차는 북쪽으로 달려서는 13시에 서는데 보니 여긴 아비뇽 교외 에 자리한

아비뇽 떼제베역  이니 참으로 특이한게 역사가 원통형 으로 생겼는데.... 

 

 

불현듯 옛날에 아비뇽 민박집에 2박을 하면서 아비뇽 구시가지 는 물론이고 기차를 타고

 을 거쳐 고흐의 자취를 찾아 아를 그리고 생 레미 를 보았던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아비뇽 상트레역 에서 도로를 건너 성벽으로 둘러쌓인 아비뇽 구시가지 

레퓌블리크 문 으로 들어가면 장 조레스 거리 Cours Jean Jaures 입니다.

 

 

 

관광안내소  Office de Tourisme  6개국 언어 로 환영한다는 글귀가 씌여져

있으니  Bienvenue (프랑스), Welcome (영어), Benvenut.o (이탈리아),

Willkommen (독일), Bienvenidos (스페인) 그리고 ようこそ (일본어) 입니다.

 

 

 

그리고 거리를 따라 걸으면 바로크식 건물인  아비뇽 시청  Hotel de Ville 이 나오고

내쳐 걸으면 오페라 극장 Theatre 이며 다시 레스토랑과 카페가 늘어선 거리

걸어서 꼭두각시 인형이 움직이는 카리용이 명물이라는 시계탑 광장 

 Place de I'Horloge 을 거쳐 좁은 골목길을 지나면 바로 "교황청 궁전" 이 나옵니다!

 

 

아비뇽 Avignon 은 파리 남쪽 680km 론강에 위치하는데 11∼12세기에 독립하여 번영 

누렸으나.... 1226년에 소위 이단인 알비파 에 가담했기 때문에 프랑스왕

루이 8세가 점령 하였으며 그 후에는 툴루즈 백작과 프로방스 백작 의 지배를

받았고 1309∼1377년에는 로마에서 피신해온 교황들이 교황청 을 세우고 체재하였습니다.

 

 

 

시칠리아의 여왕 잔 1세 가 여기 아비뇽 지역을 교황청에 팔았기 때문에 아비뇽시는

1791년 프랑스에 통합되기 전 까지는 프랑스 영토가 아닌 "교황령" 이었으니,

교황청등 구시가지는 성벽 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세도시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데...... 론강에는 민요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로 유명한 생 베네제교 가 있습니다.

 

 

고대 켈트족 시기에 론 강 유역의 오피둠 아베니오 라는 마을에서 기원한 아비뇽 

이오니아계 고대 그리스의 도시였던 마실리아(마르세유) 의 식민지 

하나 였으며 이후 로마 제국의 속주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에 속하였고

하드리아누스가 도시를 건설하였으나 이 시기의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5세기후  게르만족의 이동 시기  서고트족의 영토  가 되었으며 부르고뉴 왕국과 아를 왕국,

동고트 왕국등이 지배를 거쳐 프랑크족의 메로빙거 왕조 의 영토가 되었는데 736년

아라비아의 이슬람 사라센인 들이 북아프리카를 횡단해 스페인을 정복한후 피레네산맥을

넘어 이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737년 게르만 프랑크족 카를 마르텔이 다시 회복 하였습니다.

 

 

이후 프로방스의 보소 가문이 프로방스의 군주 가 된 이래 879년 까지 독자적인 왕국 

존재하였으나 이후 프랑크 왕국의 지배 를 받게되는데 1033년 콘라트 2세

아를 왕국의 군주 지위를 상실하게 되자.... 프로방스 지역은 1135년 까지

공화정 을 이루어 선출된 집정관에 의해 통치되다가 후일 프랑스 영토로 편입 됩니다.

 

 

교황청 궁전 에 입장해서는 장미 정원 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무슨 낙서 같은게

그려져 있으며..... 더 안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옛 건물이 나타나는데

여긴 오래된 벽화 들이 많이 있어 볼만한데 세월이 흘러 희미해진게 많아 아쉽습니다?

 

 

 

교황청 궁전  Palais des Pape s 은  1309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꼭두각시 였던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 가 교황청 을 로마에서 이 도시 아비뇽 으로 옮겨

지었으며...... 이후 1377년까지 7대 교황이 70년간 살았던 궁전 으로 천연의

방위벽이 되는 바위산을 파고 지었으며 두께 4m 의 벽은 견고한 요새 를 연상시킵니다.

 

 

아비뇽 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문명의 교차점 으로 번영했으나 1789년 대혁명때 파괴와 약탈

을 당해 황폐해졌으며 지금은 여름에 연극과 페스티벌 이 열리는 장소가 되었는데....

역사에서는 교황이 프랑스왕의 손에 들어간지라 아비뇽 유수 라고 부르니

고대에 유대인이 바빌론에 강제 이주된 고사를 본떠  “교황의 바빌론 유수”  라고도 합니다.

 

 

13세기말 교황권에서 벗어나던 프랑스왕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제후와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은후 1303년에 성직자의 국왕에 대한 납세를 금지한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와

싸워 승리한후 교황이 죽고 추기경들이 분열하자 1305년 프랑스왕의 입김으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리옹에서 대관식  을 갖고 왕의 간섭받으며 로마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십자군 전쟁이 실패한후 프랑스로 돌아온 템플(성전) 기사단 은 신도

들로 부터 토지등을 기증을 받아 거대한 부를 축적해 프랑스왕의 시기심 을 샀으니

필리프 4세 는 1307년에 이들을 이단으로 고발 하고 잔인무도한 고문 으로 기사

54명을 화형 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할 때 교황은 국왕의 위세에 굴복하고 동조 하였습니다!

 

 

해서 단테 는 신곡 연옥편 19편에서 클레멘스 5세를 프랑스왕의 꼭두각시 로 법을

무시하고 추악한 일을 행하는 목자이자 제2의 야손 이라고 비난했는데....

리옹에서 즉위한 교황은 초기에 아비뇽 북동쪽에 있는 카르팡트라스에 정청

을 설치하고  아비뇽에  거주했으나  제4대 클레멘스 6세 때인  1348년에 이르러.....

 

 

 

프로방스 백작겸 시칠리아 여왕으로 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파리 왕궁을 모방한 호화스러운

교황청 궁전 을 건축하였는데 제6대인 우르바노 5세 때 일시 로마로 복귀하기도

했지만.....   그레고리오 11세  에 의해 본격적인 로마 복귀가 이루어질 때

까지 역대  프랑스인 교황이  독자적인  프랑스적인  교황청 행정  을 담당 하였습니다.

 

 

유수시대는 교황권의 몰락기나 클레멘스 5세는 교회법과 재판제도의 확립 요한 22세에 의한

교황청 재정 재정비 등 근세적 혁신도 있었고 궁전 건축을 비롯한 미술 에서 번영과

휴머니즘 신장도 있었으니 1309년 즉위한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아비뇽에 교황청을

둔 이래.......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까지  7명의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  이었습니다.

 

 

이후 1378년에  로마에서 우르바노 6세가 교황에  선출되니 1417년 까지  로마와 아비뇽 에

2명의 교황이 분립 하게 되는 교회의 대분열 로 이어지면서 교황권을 더욱 쇠약해지게

되었으니.... 프랑스파는 이에 불만을 품고 대립되는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내세워

또다시 아비뇽에 교황청을 열어 1417년까지 존속시키니 교황이 두명 대립하는 시대 였습니다.

 

 

그후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직후 국민의 원성을 샀던 가톡릭은 프랑스 국내의 교회 재산이

몰수되고 아비뇽을 프랑스가 합병 함으로써 프랑스와 교황청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던

것이니 이 도시 아비뇽은 더는 교황령이 아니고 이제  프랑스 영토의 일부  가 된 것입니다!

 

 

아비뇽을 비롯한 프랑스 남부는 프로방스 라고 부르니 고대 로마의 속주 인데 곳곳에 로마

제국의 창건자인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이 서 있으니.... 원래 이름인 옥타비아누스 는

시저(카이사르) 암살후 유능한 무장인 안토니우스와 함께 암살자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후 권력투쟁으로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 합니다.

 

 

연세대 김상근 교수는  동아일보 ‘내가 만난 명문장’  칼럼에다가 

"로마를 춤추게 한 직언“  이라는 글을 실었으니....

아우구스투스여, 저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제국을 창건한 아우구스투스의 원래 이름이다.  로마

시민은 옥타비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  라고 고쳐 불렀다.

‘존엄한 자’ 란 뜻이다. 새로운 제국을 창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오랜 세월 누적된 과거의 적폐를 청산해야만 가능한 일이고, 새로운 제국의 정신이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혼란스럽던 로마공화국 말기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제국의 정신 을 로마인에게 제시해 유럽 역사의 빛나는 시대를 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위대한 점은  유능한 참모  를 거느렸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판단이 하늘의 뜻이라 믿는 고집불통의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좌청룡 우백호 

있었으니, 바로 마에케나스와 아그리파 였다. 유비에게 관우와 장비가 있었다면,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지략이 뛰어난 마에케나스와  우직함으로 유명한 아그리파 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을 창건하기 전에 두 참모에게 물었다. 자신이 제국을 창건하는

계획에 대한 조언을 부탁한 것이다. 마에케나스는 유창한 연설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제국을 창건해야 하는 당위성 을 펼쳤다. 아우구스투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을 것이다.  다음은  아그리파의 순서 였다.  그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 된다.”

 

 

“‘제가 아우구스투스 당신에게 황제가 되지 말라고 설득해도 놀라지 말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황제가 된다면 내게는 엄청난 이익 

되겠지만,  저는 단호히 반대 합니다.’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카시우스 디오가  쓴  고전  ‘로마사’  의  제52권  2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러고는 기차는 마르세유를 출발한지 2시간 남짓인 14시 10분 리옹 파르 디외역

 Lyon Part Dieu 에 도착하기로,  내려서 기차역으로 들어가 우린 화이트

와인의 고장 부르고뉴의 본 으로 가야 하니.... 디종 Dijon Ville 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하는지라 모니터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15시 16분 출발로 나옵니다.

 

 

기차역사 내부를 한번 둘러보고는 역 광장으로 나오니 이슬비가 내리는데 몇 년전에 여기

리옹에서 1박하면서 시내와 언덕위에 성당을 둘러본 기억이 되살아나니... 

 리옹은 트램 3개노선에 지하철 4개 노선 이 있으며 1회권은 1.7 유로이며

One Day Free Pass 는 5.2 유로니 신용카드로 1일 교통카드 를 끊어 돌아보면 편리합니다.

 

 

마르세유를 제치고 프랑스 제2 도시가 된 리옹 Lyon 은 "론강과 손강 합류점"  으로 BC 43년

손강 푸르비에르 구릉에 건설된 로마의 식민 도시 루그두눔 에서 기원하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령 갈리아 지방의 수도  였으며 중세에는  비단 제조  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문득 동아일보 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에 나오는 김재혁님의 시

“번역의 유토피아”  가 떠오릅니다.

번역의 유토피아 ― 김재혁 (1959∼)

 

 

이곳엔 사랑이 넘실대지요.

고통도 바지를 걷고 함께 개울을 건넙니다.

수초들은 뒤엉켜 있고,

가끔 미끄러운 돌이 딛는 발을 밀쳐 내는군요.

모두 사연을 갖고 사는 세상입니다.

사연들은 글자로 서서 머릿속을 헤맵니다.

 

 

글자들에게 사연을 물으면

모두 담배나 피워 물 뿐,

수초 속에 숨은 그리움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건넌다는 것은

늘 실패한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쉽지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