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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블라냐에서 기차로 들판을 달리다가 열하일기를 떠올리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3.06.08|조회수90 목록 댓글 2

 

류블라냐역에서 기차를 타고 끝없이 너른 들판을 달리다가 열하일기를 떠올리다!

 

 

2022년 5월 6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라냐 의 호텔에서 주는 뷔페식 아침을 들고는

호텔에  체크아웃을 한 후에 걸어서 5분 거리인 류블라냐 기차역 에 가는데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로 가는 기차표는 어제 1인당 19유로를 주고 구입했었습니다.

 

 

기차시간표 http://reiseauskunft.bahn.de/bin/query.exe/en  에 보면 류블라냐 Ljubljana 역에서 9

35분에 출발하는 IC 247 기차는 평원이 이어지는 동쪽으로 달려서 국경을 지나  7시간

24분만인 16시 59분에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델리역 Budapest-Déli 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어제 류블라냐역에서 기차표를 끊을 때 7시간 반 을 기차를 탄다는게 고역이라 도중에 13

37분에  헝가리 남부지방의 큰 도시인 졸로에게르세그 (젤러에게르세그) Zalaegerszeg

(젤러 Zala 주의 수도 에 내려서 2시간 정도 휴식을 하며 시내도 둘러보고 점심을 먹습니다.

 

 

그러고는 졸로에게르세그역에서 다음 기차인 15시 49분 IC 953 기차를 타면 18시 59분 부다페스트 남역

Budapest-Déli pu 에 도착하면 되겠다 싶어 창구에 기차표 2장을 요구했으나.... 무슨 일인지

역무원이 모니터를 보며 쩔쩔 메다가 상급자가 와도 잘 안되기에 그냥 포기하고 바로 가기로 한 것입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행 기차가 출발하는 플랫폼은 지하 보도를 한참 걸어서 멀리

끝자락에 있는지라.... 시간이 없으면 자칫 당황할 법 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기차는 장거리를 가는 탓인지 차량 내부는 6인실 컴파너먼트 가 10개쯤  들어 있는데

이제 오래토록 기차를 타야 하는지라..... 사람이 많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했더니 다른 승객 한명에 우리 부부 3명이니 그럭저럭 편하게 갈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부부는 421, 422 번호가 적힌 컴파너먼트 에 들어갔는데..... 함께 탄 사람은 얼핏 헝가리인으로

보였지만 서툰 영어로 몇마디 말을 나눠보니 헝가리인이 아니라 슬로베니아인으로 교수 라고 합니다.

 

 

Ljubljana  역에서 9시 35 에 출발한 기차는 10:10 Zagorje 10:16 Trbovlje 10:30 Zidani Most

10:38 Rimske Toplice 10:45 Lasko 10:56 Celje 11:22 Poljcane 11:35 Pragersko

11:46 Ptuj 12:00 Ormoz 12:06 Ivanjkovci 12:15 Ljutomer mesto

12:25 Lipovci 그리고 12시 30분에 국경 도시인 무르스카 소보타 Murska Sobota 역 입니다.

 

 

수도 류블라냐 Ljubljana 가 슬로베니아의 중앙에 자리한 도시인데 거기서 동쪽으로 평원이

기차로 3시간이나 달리는 거리이니..... 그럼 슬로베니아의 서쪽

아드리아해의 항구 피란에서 6시간 거리 라면 슬로베니아도 마냥 작은 나라는 아닌 셈입니다.

 

 

기차는 끝도 없이 너른 들판을 동쪽으로 달리니 물끄러미 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초원 을 바라보다가 문득

"박지원의 열하일기" 에 나오는 만주 벌판 이 떠오르는데.... 박지원은 갑자기 대성통곡하자 모두들

크게 놀라서 왜 우느냐고 물으니....  사내로 태어나서 한번 울어볼만한 너른 들판 이 아니냐” 고 말했다는?

 

 

열하일기’(熱河日記) 는 조선 정조때 북학파인 박지원이 1780년에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 (萬壽節,칠순 잔치)  축하 사절로 중국의 북경(연경에 갔을 때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로 러허강(열하강) 까지 다녀온 감상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열하(熱河) 는 중국어로 "러허" 라는 청나라 븍쪽 지방의 이름으로 허베이성 청더 (承德,

승덕이며최종 목적지는 열하행궁 또는 피서산장으로 불리는 건륭제의 여름

별궁이었는데.... 박지원(朴趾源의 연행일기 (燕行日記는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강록 은 압록강으로 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등 이용 후생에

관심을 보여주며성경잡지 는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을 필담(筆談중심으로

엮으며 일신수필 은 신광녕(新廣寧으로 부터 산해관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합니다.

 

 

관내정사 는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 에 이르는 기록이니 백이(伯夷숙제(叔齊이야기와 호질 虎叱

이 실려 있고 막북행정록 은 연경(북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리며  태학

유관록 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입니다.

 

 

구외이문 은 고북구(古北口밖에서 들은 60여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고 환연도중록 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 제도에 대하여 서술했으며

금료소초 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이고 옥갑야화 는 역관들의 신용문제

이야기 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니 뒷날 고전소설 허생전」 의 원본 입니다.

 

 

황도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38종을 기록한 것이고 알성퇴술은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

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이며 앙엽기 는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 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고 경개록 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 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황교문답 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종족과 종교에 대해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며 행재잡록 은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니 그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 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반선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입니다.

 

 

희본명목은 다른 본에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

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고,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며 망양록과 심세편은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 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곡정필담은 천문 에 대한 기록이며 동란섭필은 가악(歌樂) 에 대한 잡록이고 산장잡기는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며 환희기와 피서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이 빈곤한 주요 원인을  수레 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으니,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 수단의 미흡함도로망 건설의 소홀 이 조선이 가난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중국인들이 벽돌 을 만들어 간편하고 튼튼하게 집을 짓는 것을 부러워  합니다.

 

 

그러면서 연암은 조선의 수레가 바퀴가 둥글지도 못하고 자국은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는

지적과 함께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 이라며 직접 수레는

만들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비판 부터 하고 보는 정신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또한 연암은 청의 털모자 를 조선이 수입하는 것은 조선의 은을 낭비 하는 행위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고전소설 호질 (호랑이가 꾸짖다을 써서 지배

계급인 양반들의 위선을 웃음거리 로 만들어서 비판하는 풍자를 하기도 했습니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 을 섞어 쓰거나 청나라 여행에 나선 사절들을 돕는 하인들이 한

농담 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기록했으니 당대에 '점잖은 글'  이랍시고 일상에서 상투적으로

쓰던 판에 박힌 것 같은 글 과는 전혀 다른 문체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의 문체를 씁니다.

 

 

또 특유의 해학과 풍자 를 가미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켰으니 무엇보다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 이 열하일기에는 절실히 녹아 있었던 점이 지식인들에게 어필 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 뿐 아니라 문체나 내용의 파격성 으로열하일기》 는 당대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니 정조 임금은 패관잡기” 를 불온시하며 순정문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문체반정 의 중심에도 열하일기》 가 있었으니 정조는 직접 하교까지 내려 박지원의 문장을

저속하다고 지적하고는 문체가 나빠진 까닭이 박지원의 열하일기》 탓이라며 반성문 을 쓰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선 임금 중에서 성군이라고 칭송하는 정조 임금이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정조는

고루하고 완고한 주자학자 로 조금의 융통성도 없는 진부한 유생이며박지원은 중국의 문물을 유심히 관찰

하며 앞선 기술을 배우고 선진제도 를 본받으려 하였지만 정조는 열하일기에서 백성을 잘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안을 도입할 생각은 만분지 도 안하고 오직 그 문체가 점잖지 못하고 비난 했던 것입니다?

 

 

요즘 문풍이 이따위로 된 것은 박 지원의 죄 가 아닌 것이 없다열하일기는 과인도 벌써 읽어봤는데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것인가열하일기》 가 세상에 유행하더니 문체가 이 따위로 변했다.

마땅히 사고를 친 자가 해결 해야 할 것이다속히 한 가지 순정한 글을 지어 곧바로

올려보내어 열하일기의 죄를 속죄 한다면비록 남행(南行의 글이라 한들 어찌 아까울 것이 있으랴?

 

 

로마 는 고조선 때인 기원전 312년에 3번째 도로 로 로마에서 카실리움(카푸아)에 이르는  비아 아피아 를

개통했고 이후 플라미니아 가도카시아 가도아우렐리아 가도가 건설되는데.... 먼저 도로가 놓일 곳을

도로 뿐만 아니라 양 옆으로 수십미터를 벌목하고는 도로가 놓일 땅을단단한 지반이 드러날 때 까지

1.5미터 정도로 깊게 파며 너비는 왕복 2차로는 4미터에 배수로가 양쪽에 2개가 있고 인도가 각 3미터입니다.

 

 

땅을 깊이 판 다음 최하층은 statumen 이라고 해서 자갈을 30cm 높이로 깐 다음 2층은 rudus 라고

돌과 자갈에 점토 를 섞어 깔고 3층은 nucleus 이니 인위적으로 잘게 부순 돌멩이 를 가운데

가 높은 아치형으로 깔며 4층은 pavimentum 이란 바닥길이니 접합면이 딱 들어맞도록

사방 70cm 정도의 자른 마름돌 을 빈틈없이 맞추는데 당시 시멘트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돌을 기반 으로 놓고 위에 작은 돌들을 놓으며모래로 돌의 틈을 메꾸고 다시 자갈과 점토

를 섞어 붓는데 수평의 널판지에 의해 평평해지고이어서 롤러에 의해 평탄해 지는데......

이 과정들을 반복해 표층이 완성되며 좋은 석회암화산재콘크리트석재를 사용했고 도로의

옆은 살짝 경사가져 있어서비가 오더라도 가운데 고이지 않고 양 옆으로 빠져나가도록 했습니다.

 

 

완성된 표층은 비가 오더라도 젖거나 스며들지 않고 '거북이의 등껍질  같이 빗물을 튕겨내고 흘려 보냈으며,

매끄럽고 평탄했는데 도로 양 옆으로 20m 씩의 지점에는 배수로 를 파고 벌목된 공간 은 야생 동물이

갑작스레 공격하거나 약탈자들이 도로에 매복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는데.... 조선은 흙길이라 큰

비가 오면 유실되며 또 산이 많아 꼬불꼬불 산길이고, 강에 다리가 없으니 화물은 사람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성군 정조는 성리학자이니, 조선의 물자 유통은 도로나 수레 가 없으니 보부상 인 사람이 머리에 이거나 등

에 지고 물자를 운송하는 상황에서, 선진 문물을 배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비를 튼튼히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으니..... 정조 임금님의 생각은 경제적 이익 보다는, 유학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아름다운 풍속이 이어지게 해서 "조선이 사대부 군자의 나라" 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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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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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3.06.08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6.11 박지원이 중국에 다녀오면서
    부러워 했던 것이....
    첫째는 말이 끄는 수레이고
    두번째는 집을 짓는 벽돌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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