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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13 - 바르샤바 시가지를 걸어 민중 봉기 박물관에 가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4.05.20|조회수66 목록 댓글 4

 

폴란드 13 - 호텔을 나와 바르샤바 시가지를 걸어서 민중 봉기 박물관에 가다!

 

 

어제 5월 10일 바르샤바에서 기차로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에 가서 바르비칸

과 크라쿠프 중앙시장광장에 프란체스카성당과 바벨 성을 구경하고는

15에 기차를 타고 17시 40분에 바르샤바 중앙역 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잤습니다.

 

 

5월 11일 아침에 호텔에서 주는 뷔페식 아침을 먹고는 호텔을 나서는데 호텔과 기차역 주변은

신시가지로 하늘 높이 치솟은 러시아식 건물인 문화과학궁전 Pałac Kultury i Nauki

(PKiN.) 이 보이는데 저긴 어제 보았으니 오늘은 도로를 건너 민중봉기 박물관 으로 향합니다.

 

 

폴란드는 과거 원수이자 적국 으로 더욱 종교도 다른 북방신화를 믿는 이민족인 이웃나라 리투아니아

와 손을 잡으니 폴란드 공주가 시집을 가서 두 나라가 합쳐지고, 이교도 리투아니아 왕의 지배 

받으며 400년간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까지 지배한 강대국 이었으나.... 18세기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 에 의해 나라가 3분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가 1차 대전 후에 독립을 되찾습니다.

 

 

폴란드는 독립을 되찾은지 불과 20년 만인 1939년에 독일과 소련 에 거의 동시에 침공을 받아 분할

점령 되었으니 독일 점령 지역에 총독부가 들어섰으며 독일도 소련 처럼 폴란드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아우슈비츠 로 대표되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지가 되었으니수도 인 바르샤바는

1944년 8월 봉기 때 독일군이 도시 전체를 다 쓸어버려서 아무것도 안 남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두 나라에 점령돼 망해버린 폴란드 정부 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가 독일의 프랑스를 침공하자 런던으로

옮겨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소련에 억류된 폴란드인과 망명 폴란드인들을 모아서 자유 폴란드군

을 조직해서는 연합군과 함께 영국 상공과 이탈리아노르망디네덜란드 등지에서 처참하게 싸웠습니다.

 

 

연합군 내에서 나라도 없는 폴란드군이 네다섯번째로 큰 군대 였는데 하지만 망명정부는 소련군

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기 전에 자력으로 폴란드 땅을 탈환코자 40만 병력을 보유한

국내군(Armia Krajowa) 은 1944년 8월에 바르샤바 봉기 를 일으켰다가 참혹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또한 폴란드는 2차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 를 본 국가 중에 하나로연합국 기준으로 소련과 중국에 이어

사망자가 3번째 로 많은 나라인데, 여기서 사망자는 민간인과 군인의 사망을 모두 포함한 수치로

6년간 전 인구의 20% 인 800만명이나 죽었으며 특히 유대계는 열명 중에서 아홉명이 학살 당했습니다.

 

 

허리우드 영화 때문인지 2차대전이 미군과 독일군이 싸운 전쟁으로 알지만 사망자를 보면 미국 29만명,

영국 35만명, 프랑스 56만명에... 일본 (한국인 약간 포함) 군인 130만 + 민간인 67만명,  중국 군인

205만 + 민간인 775만,  독일 군인 350만 + 민간인 280만명에, 폴란드인은 무려 800만명 이고, 소련은

군인 1,370만 민간인 700만명 으로 전세계 희생자 절반을 차지하니.....  "독일과 소련의 전쟁"  입니다!

 

 

처음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과 싸우면서 힘이 부치니 소렴의 참전 을 강하게 희망했고 미국을

끌어들였는데.... 프랑스를 내어주자 독일군은 소련땅으로 쳐들어 갔으니 이때 소련군과

국민들은  무려 2천만명 이 넘게 죽은지라, 폴란드군이 연합군에 서서 수없이 죽었지만

영국등 연합국에게 토사구팽을 당해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이 점령한 동쪽 땅을 바쳐야 했습니다.

 

 

영토 할양을 폴란드 망명정부 한테는 초대는 커녕 귀띔도 안해줬고 이에 항의하는 망명정부에게 처칠은

'불만이면 언제든지 연합군을 나가도 좋다' 라고 무시했으며, 그래도 소련은 미안했던지 자신들이

점령한 독일의 오데르강 동부를 폴란드 영토로 주었으니 웬만한 폴란드 도시 보다 산업화가

잘 되어 있는게 그나마 위안이었으며.... 결국 폴란드 나라가 지도상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셈 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절대로 일어날수 없는 예를 하나 들자면.... 한국이 함경도를 소련에  뺏기고

미안하게 생각한 소련이 그 대신에 일본 영토 중에 대마도와 규슈를 한국에 넘겨주니

한국이란 나라가 남동쪽으로 이동 하는 식으로, 폴란드라는 나라가 서쪽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러자 폴란드 동부 지방의 주민들은 조상대대로 살던  고향 땅을 소련에 뺏겼으니 서쪽으로 피란민이 되어

쫃겨오자, 소련의 괴뢰정권인 새 폴란드 정부는 이들 피란민들을 모두 서쪽 그러니까 소련이 선물한

독일 동부 땅으로 이 주시키니... 독일인들은 피란민이 되어 독일 중부쪽으로 민족 대 이동을 했던 것입니다?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나치 독일 치하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지하국이 봉기 를 일으켰으니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지시한 폴란드 봉기 계획인 폭풍 작전의 일환으로 소련군이 진입 하기 전에 바르샤바를

자력으로 탈환 하려고 했는데, 소련군에 점령당하면 독립을 할수 없을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1944년 여름에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소련군은 독일군을 격파 하며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진격해

오고 있었으니.... 바르샤바 봉기의 목표는 첫째로 독일 국방군을 바르샤바에서 몰아내는

것이었고둘째로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해방시키기 전에 폴란드인들의 손으로 해방 시키고자 했습니다.

 

 

민중 봉기 초기에 폴란드 지하국가 하의 폴란드 봉기군은 바르샤바 중심가 대부분을 점령 하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봉기군은 주요 요충지인 독일군 무기고를 탈취하는데 실패 하였고

이로 인해 보급품 부족과 무기 고갈 에 시달리며 장기간 봉기를 이끄는 데에 한계를 보이게 됩니다.

 

 

바르샤바 인근에 도착한 소련군은 전력 재정비로 바르샤바 경계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소련은 연합국의

압박에 못이겨 바르샤바에 공중 보급 을 하였지만 대부분 독일군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폴란드 측에

도착한 물품들도 대부분 당장 사용할수 없는 소련제 탄약들과 폴란드의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 가 전부였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반공 성향의  폴란드 지하 국가가 독일군에게 소탕  되기를 바라는 탓에 고의적

으로 폴란드를 방치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원인이 되었는데... 9월에 이르자 상황은 극도로

암울해져 봉기군은 땅 밑의 하수도로 들어가 저항하기 시작했으니 독일군은 도시를 파괴하고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으며 또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하수도의 봉기군을 소탕합니다.

 

 

바르샤바 봉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수많은 저항 운동 중 가장 거대하고 중요했던 봉기 로

꼽히는데, 결국 실패하였으나 폴란드를 끝없이 수탈하던 나치 독일에 대항해 2차 대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봉기 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폴란드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 됩니다.

 

 

1944년 6월 22일 시작된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소련군의 진격에 동부전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독일

부집단군은 궤멸 당했고 동부 지역이 소련의 통제하로 들어갔으니 소련군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어서 폴란드 영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작전이 끝나갈 즈음엔 바르샤바 함락도 목전 이었습니다.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1942년 말부터 '폭풍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내부의 무장봉기를 통해 나치를

몰아내고 자력 독립 하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실행할 단체로 폴란드 지하국가 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1943년 중순부터 계획은 소규모로 실행되기 시작했지만 나치 지배가 강력했기에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폴란드 이동에 주둔중인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붕괴 되고 서진해온

소련군에 의한 폴란드 점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스탈린이 폴란드 독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걸 알고 있여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폴란드 지하국가에게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켜 소련군이 폴란드로 진격하기 전에 먼저 폴란드 각지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라고 지시 합니다.

 

 

이에 따라 르부프루블린크라쿠프비아위스토크우치 등 폴란드 주요 도시에서 7월 말부터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해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남부 도시 르부프가 해방 되었고 이 밖에 폴란드

각지에서 작은 도시들이 다시 탈환 되는 등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가 잇달아 나오고 있었으니

바르샤바에서도 폴란드 국내군을 중심으로 1944년 8월 1일 17시를 기해 바르샤바 봉기 가 시작됩니다.

 

 

폴란드 국내군 과 민족주의 성향의 민족방위군 에다가공산주의 성향의 폴란드 인민군 이 힘을 합쳐

20,000~ 45,000여명 의 대규모의 봉기군  (Uprising Armed Forces)  을 편성하였습니다.

 

 

그 중에 2,000-3,500여명은 민족방위군 소속이었고 수십여명은 인민군 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8

중반 부터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해방된 유대인 들도 봉기에 참여했는데 가톨릭 폴란드계로

구성된 제고타 (Zegota)  가 전쟁기간 동안 6만여명의 유대계 시민들을 구출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폴란드 봉기군이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리라는 상당히 낙관적인 희망을 가진 것은 그동안

소련의 반응을 보고 판단한 것이었으니실제로 모스크바에 위치한 폴란드 방송국

에서는  폴란드 국내군에게 계속 봉기를 선동하는 방송을 하였으며외곽에서는

소련군이 거의 바르샤바 시내로 곧장 진입할 것 처럼..... 빠르게 진격해오고 있었던 것 입니다?

 

 

7월 31지도자들이 바르샤바에 모여 회합을 가졌고그들은 다음 날 8월 1일 오후 5시에 봉기 를 개시하기로

하였지만..... 봉기군은 그 때까지 충분한 양의 무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결정적인 실책 이었습니다.

 

 

봉기의 최고 지도자는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 였는데 국내군 최고 지도자이기도 했으며 폴란드 왕국 시기

부터 이어진 군인 귀족 출신 이었는데 봉기가 실패하고 사로잡혀 복역한 그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반공 투쟁에 나섰으나 끝내 런던에서 사망했고 폴란드가 민주화된 1994년에서야 조국에 묻혔습니다.

 

 

8월 1일 오후 5시 봉기가 시작되었는데 독일군은 봉기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나리라

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매우 당황하였고.... 봉기군은 독일군의 기관총 세례를 감내하면서 공격해

나갔으며 그날 바르샤바의 상당 부분이 봉기군에 의해 해방,  8월 2일 부터 봉기군의 신문배부가 시작됩니다.

 

 

8일 부터 자체 라디오 방송인 '섬광' 을 수신하기 시작했고 폴란드 봉기군 소속 조시카(Zośka) 대대와 바첵

(Wacek) 대대는 필사적인 전투 끝에 5일 1943년에 폐허가 되었던 바르샤바 게토를 점령 했고,

겡시우프카에 살고 있던 350명의 유대인들을 구출 하였으니.... 이후 이 유대인들도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저런대포도 없고 전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다니..현대전에서는 아무것도 못할 게요." - 이오시프 스탈린 :

바르샤바 내의 독일군은 7월 말의 병력 증원을 통해 15,000여 명에서 30,000여명 으로 불어난 상황

이었고 외곽에도 90,000명 이 버티고 있었으며 게다가 30,000 병력은 봉기가 시작되자마자 증원되었습니다.

 

 

기습으로 독일군을 공격해 바르샤바 대부분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으나바르샤바의 독일군은 전력을 보존한

채로 방어태세를 갖추는데 성공했고무기고 탈취에 실패했기 때문에 봉기군의 무장상태는 극히

열악했으니 충분한 탄약과 무기를 갖춘 봉기군은 20,000- 45,000 여의 봉기군 중 2,500여명 에 불과했습니다.

 

 

봉기군의 무장 상태를 보면소총은 1,000여정권총은 1,750여정중기관총은 7대전차포는 20

에 불과했으며 기관권총은 300여 정이었고, 25,000여발의 수류탄 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기관단총은 60정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중화기는 커녕 소화기와 탄약의 생산 능력 조차 없었습니다.

 

 

이후 시민들이 수류탄화염병각종 총 과 시보레 밴에 철판을 붙인 간이 장갑차량인 장갑차

쿠부시박격포 등을 제작한 덕분에 계속 보강되었으며 연합국이 공수한 보급품도

도움이 되었고..... 또 폴란드군은 나치 친위대의 군복 저장고를 점령하여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독일군 무기고 탈취가 실패 함에 따라외부의 도움 없이는 오래 지속

하기 힘든 상태에 놓였으며, 여러 대의 전투차량이 폴란드군에 노획되어서

전투에 쓰였고...... 심지어는 5호 전차 판터 2량 까지 노획했습니다만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독일군은 본토에서 재편성한 부대 들이 반격에 나섰고소련 포위를 탈출한 중앙집단군 이 바르샤바

근교에서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으며...... 또한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교량은 철저하게

파괴되거나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으니 14 비스와강을 가로지르는 4개의 대교가 모두 파괴 되었습니다.

 

 

친위대 제국지도자인 하인리히 힘러 가 봉기 진압군의 총사령관으로 나섰고실제 지휘는 빨치산

진압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SS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장군이 맡았는데,

폴란드 국내군은 무기가 너무 부족했던 탓에 독일군 군사 요충지에 큰 피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연합군의 요청에 마지못해 출격한 소련군이 투하한 공중 보급품 중 30% 만이 봉기군 점령지로

투하되었으며 나머지는 독일군의 손에 들어갔고, 낙하산도 없이 보급품들을 투하하여

대다수가 파손 되었기 때문에 사용불능 상태였으며... 그나마 온전한 탄약이나 총기류들도

소련제였기에 독일제 장비를 노획하여 사용 하던 봉기군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될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정치적 이유뿐만 아니라 군사적 이유로도 진공이 어려웠으니 선봉 부대가 바르샤바 교외 라지민

(Radzymin) 에서 발터 모델의 독일군에게 괴멸 되어 바르샤바를 지원하기 힘들었으며 그래도 도시를

양분하는 비스와 강 동안을 점령 하긴 했지만정작 바르샤바를 지원하기 위한 행동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총통각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축복이나 다름 없습니다.  우린 기껏해야 5~ 6주면 이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700년 동안 독일의 동쪽을 가로막았던 1,700만명 폴란드인의 수도 바르샤바는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폴란드는 더 이상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큰 문제가 안될 겁니다."  - 하인리히 힘러, 44년 8월 1

 

 

독일군은 첫 날부터 강력한 진압에 나섰으며 디를레방어 여단카민스키 여단아제르바이잔계로 구성된 제111

보병대대 등이 합세헸는데, 이들은 인간백정들로 구성된 병력 이었으니, 국방군은 물론 무장 친위대 부대들

마저 기겁하면서 카민스키 여단장은 습격으로 위장한 암살 을 당하고 디를레방어 여단장은 보직 해임됐습니다.

 

 

이 부대가 바르샤바로 투입된 초기 며칠간 6만 5천 바르샤바 시민들이 죽었으며 뒤이어 한스 랄너 휘하 제19

기갑사단이 진압을 위해 바르샤바로 차출되었으니, 2개 집단이된 독일군은 보급로 개방을 위해 오호타

(Ochota) 지구를 공격했는데...이 과정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처럼 집집마다 치열한 전투 가 벌어졌습니다.

 

 

봉기 개시 2주후독일군은 도심에서 기갑병력을 동원해 봉기군을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봉기군은 반격했으나 독일군이 장갑열차를 동원하는 바람에 실패 했으며 독일군의 폭격과 포격에

대공망이 전무한 봉기군은 대응할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은 초토화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부상당한 봉기군의 병원에까지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로 공격 했고성 라자루스 병원에서 1,360

이상의 환자와 병원 직원들이 집단학살 당했으며 구시가지는 8월 14일 독일군에 함락당했으니

봉기군과 독일군은 각 7천 5, 4천의 사상자를 냈고시민도 3만여명이 사망하고 7천명이 부상 당했습니다.

 

 

부상자가 포함된 3만 7천여 명이 바르샤바 시내로 도피 했는데 구시가지에 남겨진 민간인들은 독일군이

점령하는 과정에서 모두 학살 당했으니 구시가지에서의 봉기군의 영웅적인 항전은 후에

폴란드인들의 뇌리 속에 깊이 뿌리박혔으며.... 9월 2일 경 봉기군은 구시가지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구시가지가 독일에 점령된후 뒤이어 바르샤바 수력발전소가 독일군에 함락되었고, 8월 17

무렵 독일은 600mm 자주박격포 칼 과 800mm K(E), 원격 조종 대전차폭탄 골리아트

등을 투입시켰으니 18일까지 봉기군과 구시가지의 시민들은 도심으로 쫓겨 들어가

바르샤바 곳곳에서 매우 치열한 시가전 이 벌어졌으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견됐습니다.

 

 

폴란드 민중 봉기가 한국에서 발생했다고 가정하면,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미군이 오키나와

점령했고  한반도로 진입할 예정이며 소련군도 곧 만주와 함경도로 들어갈 것이니 봉기하라 호소하고,

중경 임시정부도 미군 OSS 에게 훈련받은 광복군을 십여명 파견하자 고무된 한국인들은 1945년 6월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해 도시를 점령 했으나.... 곧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진압에 나서니 수십만명의

한국인들이 살해 당하고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롯 서울 주택의 60% 가 불타고 이재민 이 된 그런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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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4.05.20 즐거운 시간되세요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20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 작성자카페여행 | 작성시간 24.05.21 여행은 즐기는 자의것이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21 그렇지요? 즐긴다는 것......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즐길수 있는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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