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폴란드14 - 바르샤바에서 걸어서 유대인 봉기 기념관에 가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4.05.23|조회수67 목록 댓글 2

 

폴란드 14 - 바르샤바에서 민중 봉기 박물관을 구경하고는 유대인 봉기 기념관에 가다!

 

 

어제 5월 10일 기차로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에 가서 바르비칸과 중앙시장광장에

프란체스카성당과 바벨 성을 구경하고는 기차를 타고 바르샤바 중앙역 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는  5월 11일 호텔을 나와 걸어서 민중봉기 박물관 으로 갑니다.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나치 독일 치하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지하국이 봉기 를 일으켰으니 영국

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지시한 봉기 계획인 폭풍 작전의 일환으로 소련군이 진입하기 전에 바르샤바를

자력으로 탈환하려고 했는데 소련군에 점령당하면 독립을 할수 없을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회 폴란드인의 봉기에 이어 이번 회에는 유대인의 봉기 를 적어 보기로 하는데, 왜 과거의 일을 길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수도 있겠으나.... 독일에서는 지금 신나치주의자들이 대두 했고

몇 년전에 옛 동독인 드레스텐과 라이프치히 를 구경하면서 옛날 히틀러시대 나치 복장과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활개치는 것을 보고는 미래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 입니다.

 

 

폴란드인들의 바르샤 봉기 가 일어난 전 해에 발생한게 유대인들의 봉기 이니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이송 되는 것에 대항하여

일으킨 봉기로..... 1943년 4월 19일에 일어나  4주 뒤인 5월 16일에야 진압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게토 봉기 당시 폴란드 국내군은 자신들도 빠듯한 와중에 어찌어찌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고나치 점령 이후 처음으로 바르샤바 시내에 걸린 폴란드

국기 를  본 비유대계 폴란드인들은 1년 후에 터질 봉기에 대한 강력한 동기 부여 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슬로건은 이것이다.  우리는 인간답게 죽을 준비 가 되어 있다.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치  (Mordechaj Anielewicz)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한후바르샤바에 유대인을 수용하는 게토 를 만들었으니

유대인들이 과밀 수용되어 봉쇄된 게토 의 상황은 민생이 매우 열악 했습니다.

 

 

강제로 게토에 수용된 유대인들은 질병과 식량 부족물자 부족강제노동 에 시달렸다독일은

1942년 부터 본격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 을 시작하여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은

수용소로 이송되어 처형당하게 되었다이송되어 나간 유대인들이 말살 당하고 있다고

하는 정황은 점차 게토 내부에 알려졌고..... 공포에 질린 유대인들은 대응을 갈구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소수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전투 조직 (Żydowska Organizacja Bojowa, ZOB) 을 조직

하여  독일군에 대한 목숨을 건 저항 을 시도하게 되는데... 사실말이 저항이지 폐쇄되어

외부와의 연락과 물자 반입 조차 어려운 게토에서 제대로 된 전투 준비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소수의 유대인 저항 세력이 당시 유럽 대륙 최강의 군대였던 독일군에 맞서 싸워봤자 어차피 승산은 없었으니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짐승 처럼

도살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저항을 택한 사람들은 무력하게 죽느니 싸우다가 인간답게 죽기를 결심 합니다.

 

 

1943년 1월 9하인리히 힘러 가 바르샤바 게토를 방문하여 유대인들을 이송할 것을 명령합니다.

유대인 전투 조직은 이 명령에 반발하여 게릴라 전술로 저항 했으니몇몇 독일군이

살해되었고 게토 내부에 독일군이 진입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에 이송 작전은 도중에 중지됩니다.

 

 

당시까지 게토의  행정은 나치 독일이 임명한 바르샤바 게토의 자치 조직인  유대인 평의회 가 맡고

있었는데...... 유대인 평의회는 어떻게든 유대인의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하고는 있었지만

애초에 유대인 멸종을 준비 하고 있었던 독일의 움직임 앞에서 평화적인 저항은 성과가 미비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참혹한 절멸이 벌어지는데도 불구하고무력하기만 한 유대인 평의회에 실망한

게토 주민들은 유대인 전투 조직에 열광 했으니....이러한 흐름속에서 유대인 평의회는

게토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게토의 통치는 유대인 전투 조직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전투 조직은 독일의 앞잡이들과 유대인 경찰을 붙잡아 처형 했는데 유대인 경찰의 우두머리였던

유제프 셰린스키 (Józef Szeryński) 는 청산가리를 먹고 음독자살 했으니 죽을 때도 특권을 누렸다는?

 

 

유대인 전투 조직은 본격적인 전투에 대비하여 무기를 비축 했지만 그러나봉쇄된 게토내에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무기를 확보할 수는 없었으니 수백 자루의 권총약간의 소총과 카빈총,

극소량의 기관총폭약화염병수류탄 등을 준비했지만 전투원의 장비는 권총과 수류탄 몇개가 고작이라?

 

 

폴란드계 저항조직이었던 폴란드 국내군 은 유대인 전투 조직에 높은 평가를 내렸지만국내군 자신들도

무기가 부족했기에 무기는 제대로 지급할 수 없었으니...단지 권총 50수류탄 50,

약간의 폭약 을 지급해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무기가 너무 적어서 지원병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지 했고전투원의 수는 유대인 전투 조직과 유대인 군사 동맹을 합쳐도 1,000명 에 못 미쳤습니다.

 

 

그리고 게토 각지에 벙커 를 준비했으니...에어컨과 전기 시설을 갖추고몇 개월은 버틸수 있는 양의 물식량,

의약품을 비축 했는데 언제 전투가 시작될 지 알 수 없었으므로 유대인들의 전투 조직은 훈련을 거듭합니다.

 

 

1943년 4월 18무력으로 게토를 제압하고 이송 작전을 개시한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즉시 게토의

주민들에게 경고가 알려지고 벙커에서 대독 전투 준비를 시작합니다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의 생일인 4월 20일 을 기념하여 무력으로 게토를 소탕하기로 결정했으니 4월 19일은

또 유대인이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첫 번째 날 이기도 했습니다.

 

 

4월 19오전 3시 2,000여 명의 무장친위대 부대가 게토를 포위했는데 이 부대는 그리 전력이 대단치

않아서  훈련이 부족하거나부상에서 회복된지 얼마 안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폴란드 총독부 휘하 폴란드 경찰과 폴란드 소방대도 동원되었지만 전차는 프랑스제 경전차 뿐이었습니다.

 

 

오전 6시 경에 무장친위대 부대가 게토로의 침입 을 시작했는데...유대인 레지스탕스들은

화염병으로 전차를 공격 하고무장친위대 대원들에게 발포했습니다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태만해 있었던 부대는 의외로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7시 30분에 패주합니다.

 

 

하인리히 힘러 는 8시에 지휘관을 교체했고,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사냥은 가차없는 결단력과 냉혹한

방법으로 실시하라공격은 강력할수록 좋다최근의 사례는 유대인이 어떻게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의 격렬한 저항 끝에 오후 5시 독일군

은 전차 1대와 장갑차 1대를 잃고, 게토에서 임시 철수했고 이날의 전투는 이렇게 종료되었습니다.

 

 

여성 레지스탕스 지도자 치비아 루베트킨 (Cywia Lubetkin) 은 이 날의 승리에 대해서 "아주 기뻤다.

내일 일은 신경쓰이지 않았다.  우리들 유대인 투사들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화염병과 수류탄에 겁을 먹고무적의 용사로 보였던 독일군이 후퇴했던 것이다." 라고 회상합니다.

 

 

4월 19일의 승리는 방심하고 전투력도 장비도 변변치 않은 2선급 부대에게 거둔 승리일 뿐이었으니 4월 20,

바르샤바 야전군 사령관 프리츠 로숨 (Fritz Rossum) 소장의 파견 부대가 도착했고 독일군은

시가전에 맞서서 초토화 전술 을 실행했으니 게토에 불을 질러서 숨은 유대인들을 태워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4월 20독일군은 화염방사기를 가지고 게토에 침입 했는데...동시에 국방군이 보유한 고사포와 곡사포

로 포격을 퍼부었습니다게토의 여러 지역은 불타올랐고전기가스의 공급을 완전히

차단 했는데..물이 없어서 불을 끌 수도 없었고 결국 레지스탕스들은 초소를 포기한 채 벙커로 철수합니다.

 

 

봉기 시작 2주째는 벙커 를 중심으로 저항했으니 독일군은 하나하나 벙커를 발견하고벙커에 수류탄과 최루탄

을 던져넣어 유대인들을 소탕하자 숨어있었던 게토 주민들 역시 전투에 휘말려 건물에 깔려 죽고벙커

에서 사망했으며 게토의 하수도로 탈출을 시도하는 유대인도 있었지만 독일군은 하수도를 폭파해 저지 합니다.

 

 

체포된 주민들은 열차에 실려서 강제수용소로 이송 되었습니다. 1935년 사진과 비교해봐도 독일군이 얼마나

초토화를 시켰는지 확인할수 있으며 지역이 흔적도 없이 황무지 가 되어버렸고 현재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박물관 이 있습니다. 바르샤바 게토를 파괴하고 유대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무장친위대의 위르겐 슈트로프

 

 

게토 외부에서 폴란드계 레지스탕스 조직인 폴란드 국내군과 폴란드 인민군 이 산발적인 교전으로 지원을

했으며게토 내의 저항 조직원들을 도피시키는 것을 돕기도 했는데 유대인 군사 동맹은 게토의 중심인

무라누프 광장 (Plac Muranowski, Muranów Square) 주변을 거점으로 하여 오랫 동안 처절하게 항전합니다.

 

 

4월 27유대인 군사 동맹의 지도자 다비트 모리츠 아펠바움 (Dawid  Apfelbaum) 이 부상을 입었고

이때헨리크 이반스키 (Henryk Iwański) 소령이 이끄는 국내군 부대가 지하도로 유대인 군사

동맹의 부상자를 옮기고 있었지만,  아펠바움은 게토에서 떠나기를 거부하고 다음날 28일에 사망합니다.

 

 

5월 8유대인 전투 조직의 벙커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었는데...가스탄과 수류탄폭발물 공격으로 유대인

레지스탕스 사상자가 속출했으니 생존자들은 이제 끝이라고 판단하고 서로 총을 겨누어 집단 자살 합니다.

 

 

이틀 뒤수십명의 유대인 레지스탕스가 폴란드 공산주의자의 협력으로 하수구를 통해 게토를 탈출 했습니다.

그 뒤에도 몇몇 전투 부대가 게토에서 전투를 계속하여 5월 15일까지 산발적으로 전투가 진행 되었습니다.

 

 

봉기의 전체 희생자수는 확실하지 않으니 독일군 피해에 관한 공식 발표는 17명 전사에 93명 부상 입니다.

폴란드 측에 의하면 86명 전사에 420명 부상 이었으며유대인 측에 의하면 300여명 사상 이었습니다.

또한 13,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 당했으며56,885명은 학살 수용소로 이송되어 가스실이나 총살대

에서 생애를 마쳤고 극히 운이 좋은 유대인들은 폴란드 국내군과 공산주의자의 지도하에 빠져나왔습니다.

 

 

SS소장 위르겐 슈트로프 장군은 5월 16일에  "더 이상 바르샤바 게토는 없다." 는 선언을 했고 

8시 15분에는 진압 기념으로 바르샤바의 시나고그(유대인 회당가 폭파 되어 해체되었습니다.

 

 

봉기 당시  일시적으로 해방구  가 형성되었을 때 주요 건물엔 폴란드 국기 가 걸렸고당시에

바르샤바 시민들은 몇년만에 처음 본 국기가 제2공화국 당시엔 빈말로도 좋은 사이

였다고 하기 힘든 유대인들의 손 에 걸리는 걸 보고 강력하게 고무 되었다는 증언이 많습니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에서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100여 명의 사람들 은 1944년에 일어난 국내군의 바르샤바

봉기 에서 다시 한 번 침략자이자 학살자들인 나치 독일군에 맞서 목숨을 아끼지 않은 항쟁 을 펼칩니다.

 

 

 옛날 일에 대한 이런저런 회상을 접고는  다시 10분을 걸어서 시스키 공원 을 구경하면서 구시가지

로 가는데 바르샤바 시내에 오래된 옛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2차대전 중인 1944

8월에 40(?) 병력을 보유한 국내군 (Armia Krajowa) 이 소련군이 오기 전에 나라를

되찾을려고 바르샤바 봉기 를 일으켰다가.... 나치 독일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되었기 때문입니다.

 

 

2차대전 초기에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이 반씩 점령 했는데 전후 소련이 자신의 점령지를

리투아니아와 벨로루시 그리고 우크라이나 에 귀속시켰으며 그 댓가로 구 독일령

지역을 폴란드에 주니.... 폴란드 라는 국가는 지도상에서 서쪽으로 이동(!) 한 것 입니다.

 

 

독일의 동부 지방이었던 이 구 독일령 은 현재까지도 가난한 지역인데다가 폴란드 동부지역을 소련에 빼앗

기면서 전후 폴란드는 주기적인 식량난 에 시달려야 했으며, 게다가 전쟁 초기부터 후반까지 용감하게

싸운 폴란드 입장에서는 독일의 배상이라면 모를까본인들 땅을 빼앗기는 대신 보상으로 얻은 것 입니다.

 

 

새로 얻은 프로이센 지역은 독일인들이 추방되면서 폴란드령 으로 흡수되었는데 1960년대 독일 사회민주당

빌리 브란트 총리가 "영토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 라고 천명했고,  '브란트의 무릎 꿇기'  

1990 독일 통일 당시 폴란드가 차지한 옛 독일 영토에 대한 독일 정부의 포기 선언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일부 폴란드인들은 나치 점령기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협력 하기도 했으니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

은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폴란드 유대인인 자신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의 경험을 그린 만화 에서 폴란드인들도 나치 못지않게 유대인을

박해하고 국수적인 모습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했는데.... 폴란드인을 돼지 로 설정했다는 점 입니다.

 

 

중세 폴란드는 전통적으로 유대인에게 관대 했지만폴란드 민중들은 반유대적 이었고 근대로

넘어오면서 폴란드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반유대주의 도 점점 더 강해져서

박해가 빈발했지만..... 반면에 다른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들을 도와주었으니

'제고타'(Zegota) 이 단체가 게토와 수용소에서 구출한 유대인의 수가 6만여명 에 이릅니다.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있었던 2달간의 바르새바 봉기 는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으니 봉기 기간 동안 바르샤바 시내의 25% 가 파괴 되었고봉기 진압 후

독일군의 조직적인 파괴 때문에 35% 가 더 파괴되었으며 1939년의 공습, 1943

게토 철거그리고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도시의 85% 가 파괴 되었습니다.

 

 

폴란드가 독일과 소렴에 반씩 점령 되니 독일과 소련은 점령지 사람들을 군대에 징집하게 되는데

독일이 소련땅을 침공해 스탈린그라드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및 모스크바 근교 까지

진격했다가 패해 돌아오면서 소련군이 추격해 오니...... 이 과정에서 독일군에 징집된

폴란드인 과 소련군에 징집된 폴란드인 이 원치 않게 전투를 하는 동족상잔의 비극 이 벌어집니다.

 

 

시스키 공원 을 지나 이윽고 구시가지 의 입구인 짐코바(잠코비광장 Pl. Zamkowy 에 도착하는데

옛날에는 성문이 있었지 싶은데 현재 그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광장에 있는 어느 극장

건물을 거쳐 폴란드 왕궁 으로 가는데......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인지라 어떨지 매우 궁급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24.05.24 노년이 되면 누구나 네 가지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孤獨苦 -고독의 고통은 혼자 노는 연습이지만 가까운 친구 몇 명은 두어라.
    無爲苦 - 아무 것도 안하는 것도 고통이니 정할 것 없으면 걷기라도 열심히 해라.
    貧苦 -갈수록 가난해짐도 고통이니 살 날들 만큼 돈을 묶어두어라.
    病苦 -끝내 병고로 세상을 마감하지만, 열심히 병 고쳐가며 살자.
    명은 하늘에, 몸은 의사에 맡기며 살자.
    간강하시고, 행복하시기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25 생노병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체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지요!
    담담하게 끝을 받아들일수만 있다면......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