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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 2 - 대성당에서 바이킹 노르만공작 롤로를 생각하다!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4.07.22|조회수60 목록 댓글 2

 

루앙 여행2 - 시내를 걸어서 대성당을 보며 바이킹 노르만 공작 롤로를 생각하다!

 

 

5월 26일 루앙 에서 르아브르 를 거쳐서 옹플레르 Honfleur 와 트루빌- 도빌 Trouville

Deauville 를 구경하고 기차로 리시우 Lisieux 역에 도착해 시가지 까지 둘러봅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오후 7시 5분에  루앙 리브드로테역  Rouen-Rive- Droite 에

도착해 사흘후인 5월 29일 "렌에서 파리로 가는 떼제베"  기차를 예약합니다.

 

 

 루앙 Rouen 은 세느강이 흐르는 내륙으로 120km 들어왔지만 강이 넓고 수심이 깊은지라

대양을 항해하는 배들이 들어올 수 있으니 전국 3위의 항구 인데 400연 전에는 프랑스

제2의 도시로 도자기, 유리제조, 섬유 및 인쇄업에 제지 공업이 발달해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고는 역을 등지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호텔을 지나 잔다르크 탑 Tour Jeanne

d'Arc 을 지나서 16세기 이후 프랑스와 플랑드르 및 이탈리아의 회화와

루앙 도기를 다수 전시하고 있다는 루앙 미술관 Musee des Beaux

Arts de Rouen 이 자리하고 있는 베로드렐 광장 Sq. Verdral 에 도착합니다.

 

 

베로드렐 광장 Sq. Verdral 에 있는 유서깊은 루앙 노트르담 대성당 은 고딕양식 성당이고

생마클루 성당은 플랑부아양 양식이며 생투앙 성당은 창문으로 유명하고 고딕 양식의

재판소 청사에다가 보기에도 멋진 오래된 시계탑 이 도시를 한층 더 고풍스럽게 만듭니다.

 

 

16세기 이후 프랑스와 플랑드르 및 이탈리아의 회화를 전시한다는 루앙 미술관

Musee des Beaux Arts 과 프랑스에서도 유명한 루앙 자기를 소장하고

있다는 도자기 박물관 은 시간이 늦은지라 문이 닫혔으니 그냥 외관만 구경합니다.

 

 

또 오래된 도시 루앙 Rouen 은 400년 전인 17세기에 스페인에서 이슬람 600년 지배를

몰아낸 파란만장한 어느 기독교도 영웅 의 이야기인 희곡 “르 시드(Le Cid)”

를 쓴  시인 피에르 코르네유  (Pierre Corneille)  의  출생지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역사가 오래된 유서깊은 도시 루앙 Rouen 은 노르망디의 중심으로 일찍이 해적 으로

악명을 떨쳤던 노르만 바이킹족 이 상륙해 이 도시를 함락하고 세느강을

따라 파리를 공격 하였는데... 911년에 이르러서는 “노르망디공국의 수도”가 됩니다.

 

 

게르만 프랑크족 이 프랑스를 침략해 차지하고서 세운 메로빙거 왕조 에서 궁재 피핀 

무느뜨리고 카롤링거 왕조 를 세우니 아들 샤를 마르텔 은 독일과 북이탈리아 까지

포함한 대 왕국 을 건설했으나... 손자 넷은 왕국을 분할해 서로 골육상잔을 벌이다

843년에 베르됭 조약 으로 셋으로 나뉘게 되니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북이탈리아 입니다.

 

 

10세기초 노르만 데인족의 롤로 는 운명을 함께할 자들을 모아 잉글랜드를 급습했고 이듬해

프랑스의 리주를 약탈 했는데 이후 노르만족 바이킹은 600척의 배 로 루아르강을 따라

낭트까지 올라가며 기옌과 앙주 를 점령하고 주력은 센강을 따라 올라와 루앙을 점령

하고는 진군해 파리로 쳐들어가 시테섬에서 위그 카페의 증조부 강성공 로베르를 죽입니다.

 

 

프랑스왕 샤를 2세 는 공포에 질려 파리를 버리고 도망친후 노르만족에 협상을 제의하니

바이킹 해적들은 7천리브르를 받는 댓가로 강화 하고 철수해 노르망디로 돌아가는데

911년 노르만의 수장 롤로 에게 은 7천리브르 외에 노르망디 땅과 공작 작위 를 주니

후손인 노르망디공 윌리엄 1세 는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 를 세웁니다.

 

 

바이킹 노르만 데인족의 롤로 는 루앙을 견고한 요새  만든후 잉글랜드와 브루타뉴 에

프랑스 중심부를 공격 하는데 게르만 프랑크족인 프랑스왕 샤를 3세 는 클레르몽,

르망, 낭트, 앙제와 사르트르에서 토착 갈로 로만인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소요를 일으키자 프랑스의 왕권 안정을 위해 침략자인 노르만족과 손을 잡기로 합니다.

 

 

롤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 하면 기셀라 공주를 신부 로 주겠으며 노르망디 를 떼어주고 이웃

브루타뉴도 노르망디공작의 봉토 로 내어 주겠다고 타협이 되니 911년 솜강에서 생마로

성문 까지를 하사받아 초대 노르망디 공작 이 되는데 생클레르쉬르앱트 협약으로 불립니다.

 

 

노르만족 롤로 는 파리 귀족 로베르에게서 성을 받아 로베르라 칭하며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를 통치하는데 도시를 재건하고 수도원을 보수했으며 땅을 갈고 도둑을 없앴으니...

한편 노르만족에게서 파리를 지키다 전사한 로베르의 후손인 외드는 왕위 에 올랐다가

물러났으나 동생 로베르 는 세력을 키우고 그 아들 위그 카페는 새 프랑스 왕조 를 엽니다. 

 

 

그 과정을 보자면 게르만 프랑크족 카롤링거 왕조의 왕 샤를 3세 는 노르만족의 침입을

방어하지 못하고 무릂을 꿇은데다가 독일에도 저자세 를 취하니 파리(시테섬)를

방어하다가 죽은 강성공 로베르의 후손인 로베르 백작 은 토착 갈로 로만인

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922년 랭스에서 로베르 1세로 프랑스 왕위 에 오릅니다.

 

 

이에 프랑스왕 샤를 3세 는 오베르뉴의 백작 기욤과 툴루즈의 백작 레이몽등 영주들의

군대까지 소집해 앙 동쪽 수아송에서 대진 하는데 로베르 1세는 병사들 눈에

잘 뛰도록 하얀 수염을 투구밖으로 내 놓았으니 그게 표적이 되어 적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전사 했지만 아들 위그는 병사들을 독려해 샤를 3세의 군대를 무찌릅니다.

 

 

위그는 왕위를 처남인 부르고뉴 공작 라울 에게 양보하는데 923년 프랑스왕이 된 라울은,

노르만족이 샤를 3세를 지지한다는 핑계로 침략 해오고 아키텐 공작 윌리엄은 메로빙거

왕조를 재건하겠다며 침입하며 헝가리인들은 상파뉴를 피괴하자 심심이 쇠약해 죽으니

위그 카페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공작의 압력으로 샤를3세 아들을 받아들이니 루이 4세라!

 

 

936년에 왕이된 잉글랜드 웨섹스국의 외손자 루이 4세 는 프랑스인들을 믿지 못하니

왕권 안정을 위해 적인 독일왕 오토 1세와 동맹 을 맺는데, 튜턴족의

간섭을 받게된 프랑스 귀족 들은 이에 반대해 위그를 추대 하니 루이 4세

군대와 전투에 들어가는데 루앙의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솜강에서 암살 당합니다.

 

 

그러자 노르망디 귀족들은 위그를 지지 하니 그는 지도자가 되는데 이에 루이 4세 는 이

도시 루앙으로 진군 하니 위에에 눌린 시민들은 성문을 여는데, 루이 4세는 노르만

족장 하이그롤트 와 면담 장소로 향하다 매복에 걸려 체포되니 왕비 게르베르가 

오빠 독일왕 오토에게 원군을 청하며 로렌을 포함한 일부 프랑스 영토를 넘겨주기로 합니다.

 

 

오토 1세 는 프랑스 남부 갈리아 키살피나왕 콘라드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루앙으로 진군

하자 위그 등은 노르망디로 퇴각 하는데 루이 4세는 왕위를 찾지만 원군들이 귀국해

버리자 위그가 다시 궐기하니 루이 4세는 랭스로 가던중 길을 가로막은 늑대를 추격

하다가 말이 도랑에 빠져서 사망하니 위그의 아들 위그 카페는 987년 카페 왕조 를 엽니다.

 

 

게르만 프랑크족의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는 왕이 죽으면 나라를 여러 아들들에게

분할해 주었지만 987년에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위그 카페의 카페 왕조 는 장남

에게 왕위를 상속 하고 차남 이하는 형의 신하로 작은 영지만 나누어주는 제도를 채택

하는데 국왕의 직할지는 작고 프랑스 대부분 땅은 12명의 제후가 나누어 차지 하게 됩니다.

 

 

996년 카페 왕조의 프랑스왕 위그 카페가 죽은후 왕자 시절에 이미 랭스 대성당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아들 로베르 2세가 왕위를 계승 했는데 일가에 속한 베르트와

결혼 한데 대해 교황은 근친혼이라는 이유로 왕을 파문에 처하고 프랑스에서

성사금지 처분 을 내리자 교회는 미사를 중지하고 죽은이를 교회 묘지에 묻지 않습니다.

 

 

식솔들까지 로베르 2세가 사용한 물건은 부정하다며 내다버리자 영주들의 반란을 두려워

로베르 2세는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왕비와 헤어진후 프로방스 백작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 했으며...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이 아들 없이 죽자 전쟁을 일으켜 빼앗아 차남인

앙리를 부르고뉴 공작 에 앉히는데 장남이 죽자 로베르 2세는 앙리를 공동왕에 지명합니다. 

 

 

왕비 콩스탕스 는 셋째 아들 로베르가 프랑스의 왕 이 되어야한다며 자식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자 로베르 2세는 반란을 진압하고 부르고뉴를 직할지로 편입시켰는데 1031년

죽자 앙리 1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어머니 콩스탕스도 집요했으니 셋째 아들 로베르를

부추겨서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상파뉴 백작 외드 2세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콩스탕스 왕비 는 그 외에도 상리스등 여러 지역도 셋째 아들인 로베르편에 서도록

설득하니 앙리 1세는 12명의 추종자와 함께 파리를 빠져나와 12명 제후

중에 한명으로 그 냉혹함 때문에 악마라는 호칭을 얻은 노르망디의 백작

로베르 1세 를 찾아가 노르망디 해안가 벽촌인 페컹 Pecamp 에 피신처를 마련합니다. 

 

 

봉신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는 주군인 왕에게 병사를 내어주니 앙리1세는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해 왕관을 되찾았는데 어머니 콩스탕스가 1032년에 죽고서야 프랑스 왕실에

평화가 찾아오니.... 후원자를 잃은 로베르 왕자는 형에게 항복했고 왕은 부르고뉴

공작으로 임명하니 이후 4세기 동안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족의 후손 들이 다스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동생인 외드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의 아들

기욤 2세가 왕을 도와 반란을 진압 하는데 기욤 2세는 사생아 인지라 입지가 약했으나

이 일로 인해 프랑스왕 앙리 1세의 지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르망디 공작 에 오른후

1만 5천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영국을 정복해 "노르만 왕조 잉글랜드 국왕" 이 됩니다. 

 

 

그런데“앙리” 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왕은 모두 비운에 죽으니 첫 번째 앙리 1세 왕은

1060년 독살 되었고 프랑수아 1세의 차남으로 피렌체 메디치가문의 카트린과 결혼한

앙리 2세는 마상시합 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몽고메리 백작 가브리엘의 창에 맞아

죽었으며 앙리 3세는 가톨릭과 위그노(개신교) 내전때 도미니크회 수도사에게 암살당합니다.

 

 

앙리 4세 는 프로테스탄트인 나바라의 왕자 로 종교전쟁중에 화해를 위해 앙리 3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결혼해 왕 이 되지만 결혼식날 파리에 올라온 축하객인 위그노 수천명이

성 바르톨로메이유 축일에 가톨릭군에게 학살 당했으며 훗날 앙리 4세 왕도 암살 당합니다.

 

 

샤를 10세의 손자인 앙리 5세 는 프랑스 대혁명후 왕 이 되었다가 시민들의 추대를

받은 루이 필리프가 새로운 프랑스 왕 이 되면서 쫃겨나 감옥과

유배지를 전전 하다가 망명지인 오스트리아에서 쓸쓸하게 죽음 을 맞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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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캬페지기 | 작성시간 24.07.22 얼굴에서 웃는 모습이 떠나지 않아야 한다.
    항상 마음에 여유(餘裕)를 가져라!
    품격(品格)을 지켜라!
    자신의 마음 마당을 항상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사랑으로 충만(充滿)한 삶을 향유(享有)하시라!
    오늘 하루를 만끽하며 살아야 한다.
    건강과 행운이 있는 행복한 시간 되세요.
    👌👌👌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7.22 그렇지요? 여유를 갖고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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