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코노스 14 - 미코노스 섬의 구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델로스 섬으로 가다!
여행 나흘째인 2024년 4월 26일 아침에 미코노스 타운 언덕에 자리한 호텔을 나와 언덕을
내려가 미코노스 섬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예쁜 골목길을 걸어서 리틀베니스로 향합니다.
미코노스 Mykonos 는 산토리니와 함께 에게해 Aegean Sea 에 뿌려진 400개의 섬들 중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니 골목길을 걸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또 포카리 스웨트 광고의 손예진을 떠올립니다.
리틀 베니스 Little Venice 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와 구항구에 도착해서는
1인당 25유로 하는 배표를 끊어서는 델로스 (Delos, Δήλος)행 페리에 오릅니다.
배는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을 태우고는 10시 정각에 출항하는데....
페리 2층 좌석에 앉아서 멀어져 가는 미코노스 타운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사람들은 2층 후미 갑판을 선호해 빈틈없이 붙어 앉았는데.... 앞 좌석의 엄마는
아이에게 연신 먹을 것을 주니 사과 부터 시작해 과자와 사탕까지
아이가 싫증이 나면 다른걸로 교체해 가며 무려 4가지나 주는게 놀랍습니다?
아이는 과일이며 과자를 먹으면서도 자기 앞에 앉은 동양인이 신기한지 연신 우리
부부를 훔쳐보는게 귀여워서 씩 웃어주니 무서운지 엄마 뒤로 고개를 묻습니다.
하기사 오늘 우리가 탄 배에는 동양인은 드물고 대부분은 백인이라 낯선가 보네요?
우리가 탄 배는 30분 가량을 동남쪽으로 달리는데.... 중간에 보이는
섬들이 마치 육지인양 엄청 크고 길게 이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이 나라 그리스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는데 서쪽 이탈리아와 사이 바다는 이오니아해
라 하고...... 동쪽 터키 소아시아 반도와의 사이 바다는 에게해 라고 하며
아테네 동북쪽 섬들은 키클라데스 제도라 하는데 한 복판에 델로스섬이 위치합니다.
에게해는 지중해의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에 놓여있는 바다이니 북쪽으로는 마르마라해
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연결되며..... 그리고 남쪽으로는 지중해로 연결됩니다.
에게해는 북쪽은 트라키아, 동쪽은 이오니아, 남쪽은 크레타, 서쪽은 테살리아, 이타카,
펠로폰네소스와 접하는 바다이고 다도해와 리아스식 해안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으로...... 파도가 잔잔한 편이고 스노클링과 스쿠버 다이빙의 성지입니다.
후기 빙하시대인 BC 16000여년경에는 에게해 대부분이 물이 많은 거대한 해안 평야 였는데 인간이 거주
하기 시작한 기원전 8000여 년경에도 이 지역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빙하시대가 지나고 기원전 4000년경이 되어서야 오늘날과 같은 해안선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에게해는 일곱 지역으로 구분되니 북동부 에게해 제도는 튀르키예에 속한 보즈자아다 괵체아다
와 그리스에 속한 타소스, 렘노스, 사모트라키, 레스보스, 히오스, 사모스, 이카리아 등 입니다.
에비아 (Εύβοια, 고대의 에우보이아) 는 그리스 본토와 엄청 가까워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북부 스포라데스 제도는 스키로스 섬 일대를 말합니다.
네 번째 키클라데스 제도 (Κυκλάδες) 는 낙소스 또는 델로스섬을
중심으로 한 원형 (Κύκλος, kyklos) 의 군도들 입니다.
살로니카 제도는 아테네 앞 바다에 위치한 살라미스와 이드라 등의 섬들이고
도데카니사 제도는 로도스섬을 중심으로 한 코스, 카르파토스, 파트모스,
카스텔로리조 등의 12개의 주요 섬들이며 그 외 크레타 (Κρήτη) 가 있습니다.
에게해 제도는 사실 본토에 뻗어있는 산맥의 연장인데, 어떤 산맥은 히오스 섬까지 연결되며, 에비아와
사모스까지 이어지는 것도 있고, 다른 산맥은 펠로폰네소스에서 크리티를 지나 로도스 까지
이어져 에게해와 지중해를 구분하니 그리스와 터키도 지진대 정중앙을 지나니 지진도 자주 발생합니다.
바다가 잔잔하기 때문에 대륙붕 처럼 얕은 곳으로 인식하기 쉽지만 의외로 수심이 깊은 해역으로
평균 수심은 1500m, 가장 깊은 해역은 크레타 동쪽 해역으로 3543m 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기원전 2000여년경에 “키클라데스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가 발전했으니 극도로 추상화된 석상과 해양문화
라는 특징을 갖는데, 특히 산토리니섬의 아크로티리 유적과 크레타에서 발굴된 벽화는 풍요로운 해양
문명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며 이후 에게해는 그리스 문화권으로 문화와 교역의 중심지가 됩니다.
남쪽의 크레타 섬에서 청동기 시대의 본격적 왕국인 미노스 문명이 등장하고 이후 산토리니섬의 화산
폭발로 인한 해인에 의한 피해와 미케네인들의 침공으로 미케네 문명에 주도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 왕이 아들이 크레타 원정에서 사망한 줄 착각하여 절망감으로
바다에 투신하여 그 바다에 그의 이름을 붙여 에게해 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 그리스 신화에 있습니다.
이는 미노스 ~ 미케네 시대 즈음에 만들어진 이야기인 것으로 보이는데..... 트로이 까지
에게 문명에 포함시킨 지도도 있으니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지역은 에페소스 나 로도스 섬 등 그리스계 이주민들이 세운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케네 문명은 청동기 시대의 붕괴와 함께 소멸하고 그리스와 크레타를 포함한 에게 해 전역, 바다
건너 히타이트까지 수백년간 역사와 문자가 잊혀질 정도의 암흑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암흑기 초기에 대규모 지진과 가뭄이 있었고, 북쪽에서 도리스인 등의 이민족들이 침입했으며 미케네 문명이
붕괴되고 미케네와 크레타의 그리스계 유민들은 바다 민족이 되어 히타이트, 키프로스, 이집트, 가나안
등으로 떠났다고 추정되는 데.... 필리스티아 지역에 가장 많이 정착했다고 하니 성경에 “블레셋” 인 이라?
암흑시대가 끝난후 고대 그리스 문명이 회복되면서 철기 시대의 도시국가인 폴리스들이 에게해에 등장해서는
다시 그리스의 문화를 꽃을 피우다가 로마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의 지배를 거친 후 오늘날에 이릅니다.
에게해에는 섬이 무척 많은데, 작은 섬 몇개를 제외하면 튀르키예 코앞에 있는 섬까지 전부 그리스
땅이니.... 한때는 그리스 본토까지 포함해 모두 오스만 제국 땅이었지만 제국이 몰락하면서
그리스가 독립을 했고 힘을 키워서 19세기~20세기 초반에 오스만 투르크로 부터 빼앗은 것입니다.
로잔 조약에 따라 에게해의 섬은 튀르키예 영토의 코앞에 있는 것까지 모두 그리스에 넘어가는
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술탄이 항복한 뒤
이스탄불에 진주한 연합군 우두머리 영국인 고등판무관이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을 지켜봅니다.
이때 오스만 투르크는 큰 위기에 봉착했으니 남쪽에서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뺏은 프랑스가 북진해
터키의 가지안텝을 공격해 오고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가 독립을 쟁취하겠다며
진군하며 터키에 상륙한 그리스군은 이즈미르를 함락하고 내륙으로 진격해 앙카라에 육박했습니다.
게다가 수도인 이스탄불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술탄이 항복하니 이스탄불도 영국 손에 떨어졌고
쿠르드족도 독립해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터키 라는 나라가 멸망 직전에 이르렀는데
이때 케말 파샤는 흑해를 통해 삼순에 상륙해 앙카라에 이르면서 술탄에게 반기를 들고
터키 국민군을 창설하니...... 앙카라 인근에서 그리스군을 격파하고 이즈미르에 육박합니다.
영국은 그리스군이 튀르키예군에 져서 에게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생 튀르키예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스탄불
부근의 동트라키아 지역과 에게해의 섬들 중에서 하나만을 가지라고 제안하자
튀르키예 정부가 이스탄불 주변 땅을 가지겠다고 선택해 에게해가 그리스 땅이 된 것입니다.
만약에 터키군이 1920년 전쟁에서 패했다면 오늘날 터키 라는 나라는 소아시아반도 앙카라
근처에 아주 조그만 약소국으로 남았을 것을 생각하면 인류 역사는 전쟁의 승패로 결정
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생각케 하는데.... 그럼 전쟁에서는 이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류 지도층 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 까지 "혹독한 자기 희생" 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경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김구 선생이 대성통곡을 하자.... 사람들은 그가 기뻐서 우는 것으로
착각했지만, 선생은 500명도 안되는 광복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단 한차례도 하지 못했으니
이제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할 명분이 없는지라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고 걱정이 돼서 운 것이라지요?
1941년 12월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해 발생한 태평양전쟁에서 한국인들이 미군등 연합군 편에 서서 싸운
걸로 아는 사람들이 많고, 더러는 중립으로 참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한국인들은
일본 군복을 입고 미군, 영국군,호주군, 중국군, 팔로군 및 소련군과 싸우는등 일본편으로 참전했습니다?
더욱 한반도의 한국인들은 자의는 아니더래도 쌀과 콩을 공출해 일본군 군량을 댔고 탄광에서 철과 석탄을
캐고 공장에서 무기와 탄약을 만들며 또 여자 정신대는 재봉틀을 돌려 일본군 군복을 만들었고,
한국인들이 남태평양에 건설한 활주로에서 출격한 일본기가 미군함을 공격했으며 게다가 10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일본군에 입대해 미군등과 싸운 반면에, 미군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한국인은 전무했으니....
오스만 투르크가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참전해서 패전한 반면에 그리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가해 득을 본 셈인데.... 이 때문인지 지금도 여기
에게해 지역의 영해 범위를 놓고 튀르키예와 그리스 사이에 영토 분쟁이 있습니다.
2017년에 에게해의 작은 무인도 이미아(튀르키예명 카르다크)섬을 둘러싸고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된 적이
있는데.... 로잔 조약에 따라 이곳은 그리스가 점유하고 있으나 튀르키예는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에 "살아서 에게해를 본 사람에게는 복이 있나니"
라는 문구를 집어넣음으로써 이 바다를 상찬했으며 리우 올림픽에 난민 올림픽 선수단 소속으로 출전한
시리아 출신의 수영선수 유스라 마르디니는 시리아 내전을 피해 에게해를 헤엄쳐 건너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새에 배는 30분 만에 델로스섬에 도착하는지라 내려서 많은 인파를 뚫고 8유로 하는
입장권을 사서 입장하는데..... 다른 관광지도 그렇지만 여기도 여행사 단체가 80% 는 넘지 싶습니다.
걸어 들어가니 곧 두갈래 길에서 우리는 오른쪽 길을 택해서 길 따라 올라가니 수많은 집들의 유적이
나타나고.... 하나하나 살피면서 올라가니 어느 집에서는 모자이크가 아직도 남아있는게 보입니다.
모자이크는 작은 돌이나 유리 조각을 붙여서 만든 것으로, 집의 바닥이나 벽을
장식하는데...... 표범이며 인물상들이 아직도 선명한게 너무나도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