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프랑스 바이외3 - 윌리엄 센터 태피스트리 에서 영국 역사를.....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24.09.13|조회수57 목록 댓글 2

 

프랑스 바이외3 - 정복왕 윌리엄 센터 태피스트리에서 영국 역사를 생각하다!

 

 

5월 27일 루앙 Rouen 에서 10시 10분 기차를 타고 11시 43분에 노르망디 캉 Caen 에 내려

12시 03분 기차를 갈아타고 12시 18분에 바이외 Bayeux 에 도착해서는... 택시로

5~6분 을 달려 노트르담 대성당 Cathedrale Notre Dame 을 구경하고는 배낭을 메고

정복왕 윌리엄 센터 Centre Cuillaume le Conquerant 를 찾아 태피스트리 를 구경합니다.

 

 

1층 암실에 벽 을 설치하고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장면이

바이킹 풍의 배, 병사들의 갑옷과 투구 등 생생하게 묘사된 11세기에 제작

되었다는 길이 70m, 폭 50Cm 아마포 채색 태피스트리 를 구경하고 위층으로 올라갑니다.

 

 

여기 위층에서는 당시 장군과 병사들의 모습이며 배와 수레 등 여러가지가 전시되어

있는데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세상에나??? 1층 암실에서 본 저 태피스트리

모조품 이 전시되어 있으니 여기선 안심하고 사진을 찍을수 있는데... 찍고나서

사진을 비교해 보니 1층 진품은 노랑색 으로 나오는데 여기 모조품은 붉은색 입니다?

 

 

10세기 초에 노르만(바이킹) 데인족(덴마크 )의 망명객 롤로 는 집안의 차남등 운명을 함께

할 자들을 모아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급습했고 프리슬란트를 속국 으로 만든후 890년

바이유 백작 영토로 원정해서 백작의 딸과 결혼 했으며 이듬해 프랑스 리주를 약탈 했습니다.

 

 

이후 노르만족 바이킹은 600척의 배 를 타고 프랑스 해안에 상륙했으니 한 무리는

루아르강을 따라 낭트 까지 올라가며 기옌과 앙주 를 점령하고, 주력은 센강을

따라 올라가서 루앙을 점령하고 센 강을 따라 계속 진군해 파리 로 쳐들어가니

훗날 위그 카페 의 증조부 강성공 로베르는 파리 시테섬을 방어하다가 전사 합니다.

 

 

프랑스왕 샤를 2세 는 공포에 질려 파리(시테섬)를 버리고 도망쳐서 노르만족

에 협상 을 제의했으니.... 수장 롤로에게 은 7천 리브르 외에도

노르망디 땅 을 넘겨주고 공작 작위 를 주었는데, 이후에도 노르만족

 롤로는 루앙을 요새로 만든후 브르타뉴와 연합해 르망을 점령 하기도 합니다.

 

 

이어 롤로 가 잉글랜드와 브르타뉴에 프랑스 중심부를 공격하니 내부 반란에 직면한

샤를 3세는 침략자인 노르만족과 손을 잡는데... 911년 롤로가 그리스도교 

개종하면 기셀라 공주를 신부 로 주고 솜강에서 생마로성문에 이르는 노르망디

공작에다가 브르타뉴도 봉토 로 내어준 것이니 생클레르쉬르앱트 협약 으로 불립니다.

 

 

 5대 후손 노르망디공 윌리엄 1세 는 잉글랜드를 정복해 노르만왕조 초대 왕 에 오르니

노르망디 공국 로베르 1세의 사생아 라는 신분은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지만

1035년 노르망디 공작이 된후 노르망디를 발전시켰고... 1066년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를 침략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헤롤드 2세를 죽이고 잉글랜드 왕 이 되었습니다.

 

 

윌리엄 은 키가 6척이나 되고 어깨가 넓으며 적갈색 머리를 지닌 목소리가 거칠고 건장한

사내였다는데, 아버지 로베르가 무두장이의 딸인 그의 어머니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서자 윌리엄' 이라 불렸는데 1035년 로베르가 예루살렘

순례여행 도중 사망하자 윌리엄은 로베르의 생전 유언에 따라 7살에 노르망디공 이 됩니다.

 

 

 

윌리엄은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서자 였지만 로베르의 유일한 아들 이었기 때문인데...

어린 시절에는 프랑스왕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지만 그는 굳센 의지와 끈질긴 성품

덕분에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니, 고집이 세고 잔인했으며 반란자와 적들에게는 무자비

했지만 자신에게 항복한 적에게는 토지를 되돌려주는 공정함과 아량 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고해왕 에드워드 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비 에디스의 남동생 토그티그와

헤롤드 고드윈슨, 노르웨이 왕 헤롤드 하드라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 윌리엄 

왕위경쟁에 나섰는데 에드워드가 1066년 1월 5일에 사망했을때 60명 귀족들로 구성된

현인 회의에 의해 헤롤드는 새로운 왕 으로 선출되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 합니다.

 

 

 

혈통상으로는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아들 에드거 애델린 서열이 왕위에 더 가까웠지만

현인회의 는 어린 에드거 보다는 강력한 귀족 헤롤드를 왕 으로 선택했는데....

이에 노르망디공작 윌리엄은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이 진정한 계승자 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고해왕 에드워드가 죽어갈 때 왕비 에디스와 헤롤드 가 그의 침상을 지켰는데, 헤롤드는

에드워드 왕이 그에게 자신의 왕비와 왕국을 맡긴다는 유언 을 남겼다고 전했으니... 

사실이라면 헤롤드가 에드워드 왕의 유언에 따른 합법적인 후계자 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노르망디의 윌리엄 은 노르망디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에드워드왕 이 자신을

후계자 로 삼았고, 헤롤드도 1064년 폰티유 해변가에서 난파당했을때 에드워드 사후

윌리엄의 왕위 계승에 적극 도울 것을 약속했다고 주장했으나 잉글랜드로 돌아온

헤롤드는 이 약속이 위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법적 효력이 없다고 주장 합니다.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른 헤롤드 에게 전쟁을 선포한 윌리엄은 9월 28일 바다를 건너

피벤지에 상륙 하였고, 이미 노르웨이의 해롤드 하드라다와 전쟁 을 치른

헤롤드 2세 는 남쪽으로 진군했는데.... 윌리엄은 연이은 전쟁으로 지쳐

있던 헤롤드 2세 를 헤이스팅즈 전투에서 무찌르고 잉글랜드의 왕위 에 오릅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처럼 켈트족의 땅 이었으나 로마가 정복해 오랜 평화기간에

라틴화 되었는데.... 훈족 에 떠밀린 게르만족들이 유럽으로 쇄도해

들어오니 로마 군인들이 고국을 지키기 위해 잉글래드에서 철수 하자 

 북쪽에서 로마에 동화되기를 거부했던 켈트족인 스코틀랜드인들이 남침 합니다.

 

 

잉글랜드인들은 덴마크땅의 게르만 유트족을 용병 으로 부르니 이들은 잉글랜드 남부 

상륙한후 지도자 보르티게른 은 고용주를 배반 하는데... 잉글랜드 남자들을

죽이고 그 부인과 딸을 취해 주저앉으니 이 성공에 자극을 받은 덴마크 남부의

게르만 앵글족과 색슨족 이 침입해 7개의 앵글로 색슨 국가가 할거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이 중에 다른 나라를 아우르는 왕국을 브레트왈더 (Bretwalda) 라고 불렀는데 최초로는

켄트 의 애설버트 였으며 그후 이스트 앵글리아의 레드윌드 (Redwald) 였고 7세기

초에는 3번째 노섬브리아왕 에드윈 은 거의 모든 왕국을 수하에 두었으나 그위네드

(Gwynedd) 의 왕 카드월론 (Cadwallon) 이 머시아의 펜더와 연합해 침공하니 패사합니다.

 

 

에드윈의 뒤를 이은 오스월드 는 이듬해 카드윌론을 패배시켜 노섬브리아 왕국의 지배권 

수복했지만 8세기에 머시아왕 오퍼(Offa) 는 켄트, 에식스, 서식스, 이스트 앵글리어,

그리고 런던 까지 판도 안에 넣었으며 법전을 편찬하고 은화를 주조 하며 모직물을

수출하면서 카롤루스 대제에 필적하며 '영국 왕(Rex Anglorum)' 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오퍼 사후 웨식스의 에그버트(Egbert) 왕은 825년 머시아인들을 물리친후 서식스, 켄트,

에식스, 이스트 잉글리어로 부터 브레트왈더 로 인정받았으며 콘월의 켈트인들을

복속시켜 남부 잉글랜드 전역을 왕국의 테두리 안에 넣었지만 중앙정부가 없었으니...

데인족의 침입 을 당해 웨식스 연합 왕국을 이루어 에드워드왕 에 이르렀던 것 입니다!

 

 

 

정복 초기 윌리엄 은 앵글로 색슨족의 제도와 업적을 융화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을 잉글랜드

에서 확장시키고자 했으니 그의 목표는 앵글로 색슨의 마지막 왕인 고해왕 에드워드의

합법적 상속자 로 인정받으며 앵글로 색슨족의 저항없이 잉글랜드를 지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윌리엄(프랑스식으로는 기욤) 은 대관식 에서 에드워드 통치기의 앵글로 색슨

의 법을 지키고 웨섹스 왕들의 전통에 따라 잉글랜드를 통치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반면에 그는 요크셔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원정으로 맞서는 강온 양면 정책을 실시하는데 1070년에는 전 잉글랜드를 통일 합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노르만족의 약탈과 탄압으로 앵글로 색슨족의 반란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외세의 침입 도 있는지라.... 윌리엄은 성을 축조했고 용병 을

필요로 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 을 계속해서 걷어야 했는데 앵글로

색슨족의 저항은 조직적이지 못하고 산발적 이었기 때문에 큰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윌리엄이 잉글랜드에서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립한 것은 잉글랜드 정복 20년후 1086년 에

실시한 토지조사 사업인‘둠즈데이 북’의 편찬으로 증명되는데, 윌리엄은 자신과

대영주들이 잉글랜드에서 소유한 부를 파악하기 위해 주에 조사관을 파견하여 토지의

소유자와 경작자, 토지 면적과 가치, 가축과 쟁기 수 등 장원의 실태를 자세히 조사합니다.

 

 

 

이 조사는 매우 철저하게 시행되어서 한 하이드( 60~120에이커의 땅), 소 한마리,

심지어 돼지 한 마리 조차 조사에서 누락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윌리엄 1세는‘둠즈데이 북’의 작성을 통해 앵글로 색슨 시대의

토지 귀족들을 축출 하고는 노르만 귀족 사회의 지배 구조를 달성 하게 됩니다.

 

 

5,000명의 앵글로 색슨인이 토지를 빼았겼으니 토지 총수입의 절반은 새로 부상한 노르만

영주들의 몫 이었으며, 나머지 4분의 1은 왕실 로 4분의 1은 교회와 고위 성직자

에게 돌아갔으니 1만명에 달하는 왕족과 고위 성직자들, 노르만 영주 들이 150만명에서

200만명에 이르는 앵글로 색슨인들을 지배 하면서.... 자유민들을 농노로 전락 시켰습니다.

 

 

농노는 장원 토지에 묶여 있으며 매주 3일간의 부역 은 물론 특별 부역의 의무 

졌으며 매년 일정한 현물 공납 과 영주가 임의로 부과하는 세도 지불 하였고

딸을 결혼시킬 때 혼인세 를 내고... 보유지를 이어받을 때 상속세 도 물어야

했으니 농사가 잘되면 밀과 보리로 연명 하고 흉년이 들면 굶주림 에 허덕였습니다.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자유민이 농노가 된 반면에 노예들의 지위가

상승하여 농노 가 되었는데, 이는 노르만인들이 노예 보다는 농노가

더 이용하기에 유리 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니....‘둠즈데이 북’

소수 지배층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지배 하는 사회 구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071년 이후 윌리엄의 잉글랜드 지배는 안정되었고 그의 관심은 대륙으로 향했으니...

윌리엄과 이웃하고 있던 프랑스의 제후들은 윌리엄의 세력 확장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는데 프랑스 왕과 앙주 백작 이 이러한 견제 세력의 중심에 있었고 노르망디

지역을 탐내고 있었던 큰아들 로버트가 아버지에 대항하여 프랑스 왕 편에 가담합니다.

 

 

 

1087년 7월 망트 요새의 프랑스 수비대가 노르망디를 급습 하자 윌리엄 1세는 반격하는 과정

에서 부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는 21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하다가 프랑스에서

사망한 것인데... 그의 시체는 캉에 있는 성 스티븐 교회 로 옮겨졌으니 그의 시신을

석관에 넣을때 너무 뚱뚱했던 그의 주검이 터져 그 악취가 교회 전체를 뒤덮었다고 합니다!

 

 

 

윌리엄 1세는 장자인 로버트에게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상속 시키려고 하였으나...

로버트는 난폭하고 제어하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그는 부왕 윌리엄과

프랑스 왕 필립 1세의 전투에서 필립 1세 편에 가담하는 반역행위 를 저질렀고

차남은 사냥을 나갔다가 죽은지라 3남 윌리엄이 왕위를 계승하는 논의가 시작 됩니다.

 

 

 

하지만 윌리엄 1세는 장남인 로버트가 반란 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를

로버트 에게 주고 잉글랜드는 3남 윌리엄 루퍼스 에게 물려주었으며

4남인 헨리 에게는 노르망디에 많지 않은 영지와 현금 5,000파운드 

상속시켜 주었지만... 헨리 또한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욕심 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로버트와 윌리엄 루퍼스, 헨리 모두 상속에 대해 만족하지 않았고

이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재통합을 위한 형제간의 전쟁 을 불러

왔으니 헨리가 1136년에 죽을 때 까지 20여년 동안이나 상속 투쟁 이 진행됩니다.

 

 

그외에 딸 넷 중에 아델라는 블루아 백작 부인, 콩스탕스는 브르타뉴

공작 부인 이 되고 세실리는 수녀 가 되었으며.... 아가타는

 결혼 직전에 병으로 죽습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캬페지기 | 작성시간 24.09.13 생각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다녀갑니다.
    👏👏👏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9.14 여기 프랑스 서북부 바이외에서
    이제는 프라스화 된 노르만의
    영국 정복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