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코노스17 - 델로스섬에서 미코노스로 돌아와 파라다이스 비치 해수욕장에 가다!
2024년 4월 26일 미코노스 타운의 구항구에서 10시에 페리를 타고는 불과 30분 만에
델로스섬에 도착해 걸어서 디오니소스 집에서 모자이크를 구경하고
이어 야외 음악당을 보고는 아폴론 신전을 지나 박물관을 거쳐 서쪽 유적지로 갑니다.
여기 델로스는 아폴론이 태어난 섬이라고 하는데.... 제우스는 아내인 헤라 몰래 레토와
사랑을 해서 쌍둥이를 임신하니 헤라의 질투심을 피해 포세이돈의 도움으로
바닷속의 섬을 부상시켜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이 태어나니 여기 엘로스섬이라고 합니다.
여기 서쪽 유적지에서 금 붙이들이 많이 발견되어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건 박물관에 보관중이지만 지금은 수리 중이라 보지 못하는게 아쉽습니다.
반면에 여기 서쪽 유적지에는 금붙이와 주얼리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집터가 보이고 또 낙소스섬 사람
들이 바쳤다는 사자상이 서 있는데.... 많이 훼손되었지만 아직도 네 마리는 남아 있는지라 구경합니다.
낙소스 (Naxos) 섬은 그리스에서 10번째로 크며 키클라데스 제도에서는 가장 큰
섬이자 중심에 위치하고 강옥의 함량이 높은 암석 금강사의 산지로 유명합니다.
낙소스의 역사는 트라키아인들이 정착한 기원전 4천년 무렵부터 시작하니 2세기 동안 섬 동쪽에
여러 마을을 세우고 살다가...... 소아시아에서 온 카리아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단검과 같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여럿 발견되었는데, 특히 자스산의 동굴에서 금박이 발견되어
인간활동이 있었음을 알려주며 또한 이때부터 특산품인 금강사가 다른 섬에 수출되었습니다.
기원전 3천년쯤부터 낙소스를 비롯한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키클라데스 문명이 시작되었는데, 낙소스는
큰 섬이라 중심지 역할을 했으니 그로타에서 발견된 집 여러 채와 화려하게 장식된 무덤들로 알수
있으며, 여러 조형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런 이유로 조형 미술이 낙소스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이후 이오니아인들이 낙소스를 차지하고 상업 활동을 하면서 번영하였으며 그후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는 페르시아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며 다른 폴리스들의 항쟁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면서 스파르타, 마케도니아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그리고 로도스 등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41년에는 로마 제국에 점령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여기 호수인 듯 소금 밭을 구경하고는 내려와 매표소에 이르니 낡은 커피등 음료수
자판기가 보이는데... 코로나 사태로 폐쇄된 이후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아 을씨년 스럽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페리에 올라 타는데.... 멀리서 보트가 다가 오더니 내게 시선을 돌리며 무어라 하는게
다른 승객을 태우러 왔는데....... 나를 그 승객들인양 오해한 것 같아 서로 쓴 웃음을 짓습니다.
배가 시간이 되었는데도 출항을 하지 않아 의아해서 밖을 내다 보니 저 멀리 오른쪽 마을 유적지
에서 일가족 4명이 내려오는데 선두에 선 아버지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오니 지금은
비수기라...... 미코노스로 돌아가는 배는 13시 30분 단 한편 뿐이라 선장이 기다리는 듯 합니다.
페리는 미코노스로 돌아가는데.... 문득 2천년전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져서 이 바다를 뒤덮었던
페르시아 함대를 떠올리니, 그리스는 페르시아군에 패해 아테네성 까지 적에게 무혈로 내어
주고는 섬으로 달아나..... 좁은 길목으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해서 격파하니 살라미스해전인가 합니다.
이후 승자인 아테네의 주도로 델로스동맹이 만들어 지니.....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각 폴리스들이 돈을 갹출해 여기 델로스 섬(Δήλος) 에 금고를 만들었는데 이후
페리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자마자 회합장소를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겨버립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은 절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아나톨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기에
이르니, 당시 아나톨리아에는 그리스계 이주민들이 건설한 도시국가들이 다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정복은 필연적으로 그리스와의 마찰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리스계 이주민들이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몇몇 폴리스, 특히 아테네가
적극적으로 이들을 후원했고 이는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대제를 격노하게 만들
었으니.... 이주민들의 반란을 제압후 다리우스 대제는 대대적인 그리스 원정을 시작합니다.
기원전 490년부터 20년 동안 지속된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대군을 동원하고도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
에서 번번이 패하였고 기원전 479년의 플라타이아이 전투를 끝으로 페르시아의 침공은 끝나는데...
페르시아가 물러간후 그리스는 반격에 나섰고 아나톨리아 일대 그리스계 도시들의 반란을 후원하기
시작하는데 어디까지 반란을 후원해야하는지를 놓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 갈등이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육군이 주력이었던 스파르타는 플라타이아이 해전 이후 판을 키우는 것을 아테네의 세력을 크게
해줄 뿐이므로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고, 반대로 해군이 주력이었던 아테네는
'아나톨리아의 그리스계 도시 역시 동포들이다.' 라면서 계속해서 반란을 지원할 것을 주장합니다.
결국 비잔티온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헤게모니 싸움은 폭발했고, 스파르타는 기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구성국들과 함께 반 페르시아 동맹에서 탈퇴하는데... 478년 친 아테네
계열의 도시국가들이 델로스 섬에서 회담을 가졌고 동맹이 체결되니 동맹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고통받는 그리스 동포들을 해방시킨다.
2. 다시 있을지 모를 페르시아의 침략을 방지한다.
3. 페르시아 전쟁 과정에서 받은 피해를 페르시아에게서 보상받는다.
명목상으로는 모든 국가가 동등한 권리를 나누어 갖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동등하게 표를
행사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테네의 의중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창설 목표를 충실히 이행해 소아시아 일대의 페르시아 세력을 깨끗이 소탕하는데 성공
하지만 점차 변질되기 시작되어서 급기야 가입할 의사가 없는 도시국가까지 강제로 가입
시키는 한편 탈퇴까지도 금지시켜버리니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랍니다?
여기에 페리클레스가 집권한 이후로는 아테네의 독단성이 더욱 강해져서 아예 델로스에 자리잡았던 동맹
본부와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버리는 한편, 델로스 동맹 국가들의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델로스
동맹의 연합해군 까지도 멋대로 운용 하면서 아테네에 대한 동맹국들의 반감은 점점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는 대외팽창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남부에까지 델로스 동맹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자 이는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구성국들의 우려를 자아냈으니... 결국
기원전 431년 두 거대 동맹간의 전면전이 발발하니 '그리스의 자살' 이라고 불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30년 가까운 전쟁끝에 기원전 404년 전쟁은 펠로폰네소스 동맹 측의 승리로 끝났고 이에 따라 델로스
동맹은 강제로 해체되는데... 이 전쟁은 승리자가 스파르타였기 때문에,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강력한 전사 육군 문화(스파르타)가 해양 경제 국가(아테네)를 이겼다고 단순하게 착각합니다.
하지, 실제로는 국제적으로 진출하고 발전하던 국가가 육상전과 해상전에서 모두 승리했던 전쟁이었으니
저 전쟁 초반에는 아테네가 낡고 고루한 군사 국가인 스파르타를 육상전에서도 여러번 이겼습니다.
반대로, 전쟁 후반에는 지나친 확장과 패권을 추구하던 아테네를 상대로 스파르타는
귀족들이 국가 정체성을 대부분 포기하면서 까지 적국 페르시아와 손을
잡으면서 외교 전략을 확장하게 되고, 해군 육성에 성공하여 아테네를 제압하게 됩니다.
그러나 군사 국가라는 정치 시스템의 한계가 있었던 스파르타의 헤게모니 역시, 전쟁의 피해를
피하는데 성공했으며 거기다가 인구 수가 많은 도시 국가인 테베에게 금방 무너지기에 이릅니다.
스파르타의 펠레폰네소스 동맹은 낙후된 정치, 경제 구조 때문에, 델로스 동맹처럼 그리스 무역을 관리할수
없었으니 아테네가 전쟁이 시작된후 30년간 오만해지면서 국제 외교를 무시하게 되어 스파르타
에게 패배했다지만..... 결국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전략을 잠깐 흉내낼 수는 있어도, 해양 진출과
자유로운 이념에 의한 시민들의 국제 교류의 유연성은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근본적인 장점이었습니다.
반대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처럼 국제교류 및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일치
단결에 매우 중요한 자유로운 사상이 부족해서 평상시에도 주변 국가들과
일일이 마찰이 일어났고, 아테네 처럼 인구수가 많은 것도 아니면서 군사력
점령이 없으면 국제 교류를 유지할수 없는 시스템을 벗어나기 힘든 군사 국가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은 재건되지만, 아테네의 위상은 더이상 예전 같지 않았고, 델로스
동맹의 주도권을 놓고 기원전 357년 구성국들간의 내분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기원전
338년에는 아예 그리스 전역이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에게 정복당하면서 델로스 동맹은 끝납니다.
페리에서 내려서는 미코노스의 골목길을 걸어서 언덕까지 올라가는데 마눌은 왼쪽으로 가자고
하는지라 나는 오른쪽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마눌의 심기가 염려되어 그만 길을 잃고 좀
헤멨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코노스 골목에서는 길을 잃는게 좋다는 말을 했던게 떠오릅니다?
드디어 언덕 위에 자리한 파브리카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서는 식당에서 수불라키 Souvlaki 로 점심
을 먹는데.... 수블라키는 크게 닭고기 또는 돼지고기를 구운 음식이라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는 식당을 나와 파브리카 터미널에서 2유로 하는 버스를 탑니다.
파브리카 터미널 Ktel Mykonou Fabrika (Bus1, Fabrika bus Station ) 을 출발한
버스는 언덕을 올라가서 미코노스 타운을 벗어나 시골길을 달리는데....
여기는 아테네 주위 처럼 황량한 것이 어떤 작물도 자라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20분이 채 되지 않아 버스는 파라다이스 해수욕장 정류소에 도착했기로 걸어
나오니.... 대개의 관광객들은 오른쪽 길로 가는데, 일부 처녀들은 왼쪽길
을 택하는지라 조금 망설이다가 많은 사람들이 가는대로 오른쪽 길로 갑니다.
여기 파라다이스 비치 Paradise Beach(Kalamopodi) 해수욕장은 미코노스에서
가장 유명한 공공 비치로 로컬버스와 보트 택시가 있으며 누드비치로
알려져있지만.... 모두가 벗는 것은 아니고 "누드가 허용" 되는 해변이라고 합니다.
여기 해변은 오늘은 4월 26일 평일인지라 아직 물이 차가운 탓인지 해수욕을 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은 썬탠을 하는데.... 젊은 여인들은 한결같이 초비키니 차림인지라 눈이 어지럽습니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고 바닷물에 들어서니 차가운 감촉이 서늘한게 기분이 좋아지는데.... 울 마눌은 가져온
큰 타올을 모래사장에 펼치고는 드러누워 선탠을 할 모양인데, 햇볕이 따가우니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다는...
클럽의 직원은 요가라도 했는지 낭창낭창한 동작으로 여러 테이블을 돌며 여자들은 불러낸 후에....
이제는 다시 멋진 남자들을 끌어내니, 무대는 춤으로 광란의 도가니로 바뀌는데 아직은
해수욕철이 아니고 비수기니 이렇게 분위기를 띄우는가 봅니다? 나의홈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