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프랑스 바이외4 - 태피스트리를 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작성자가라치코|작성시간10:16|조회수23 목록 댓글 0

 

프랑스 바이외4 - 태피스트리를 보고 나와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회상하다!

 

  

5월 27일 루앙 Rouen 에서 기차를 타고 노르망디의 캉 Caen 에 도착해 기차를 갈아 타고

12시 18분 바이외 Bayeux 에 도착해 노트르담 대성당 Cathedrale Notre Dame

을 보고 교회를 나와서는 걸어... 정복왕 윌리엄 센터  Centre Cuillaume

le Conquerant  를 찾아서 영국을 정복한  "월리엄 왕의 태피스트리"  를 구경합니다.

 

 

 노르망디공 윌리엄  이  만 5천의 병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1066년에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헤롤드왕을 패사 시키고 영국을 정복해 노르만왕조 초대  에 오르는데

헤이스팅스 전투 장면인.... 바이킹의 배, 병사들의 갑옷과 투구 등이 생생하게

묘사된 11세기에 제작되었다는 길이 70m, 폭 50Cm 아마포 채색 태피스트리 를 구경합니다.

 

 

위층 까지 둘러보며 구경한 후에 밖으로 나와 배낭을 메고 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크레멜 거리 Rue de Cremel 언덕을 오르는데... 날도 덥고 배낭은 무거우니

참으로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행인들에게 기차역 방향 을 물으니 Gare 를

말한다는게... 발음이 개르, 가르, 갸르? 인지 이상해서 그런지 못알아 듣습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친절한 일본 사람들도 나고야 근처 오다 노부나가

의 고향 기요스성에서 기요스역을 가르쳐주지 못했는데, 둘다 모두 내가 관광객

에게 기차역을 물었으니, 저 사람들은 여행사 단체나 아님 렌트카나 자가용 으로

왔었기 때문에 실제로도 기차 역이 어디쯤 붙어 있는지 몰랐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기차역으로 돌아와서는 이제 드골장군 기념관 Musee Memorial du General de Gaulle 을

찾아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시물 을 보고 또 상륙지점의 해변 을 찾아 여러 기념물

들을 구경하고 싶은데... 오늘이 일요일 이라 Courseulles 와 Sur-Mer 로 가는

174번 버스가 다니지 않으니 찾아갈 방법이 없는데...... 택시 조차도 보이지가 않네요? 

 

 

바이외 는 캉에서 24km 떨어진 노르망디 오르강 연변에 있는 고대에 아우구스토두룸 이라

불린 도시로 갈리아인· 브리튼인· 색슨인· 노르만인의 지배 를 번갈아 받았으며

바이외에서 멀지 않은 해변 노르망디 는 1944년 6월에 독일이 점령중인 프랑스를

수복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등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행해진 곳 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외 Bayeux 는 제2차 세계대전때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에 의해 맨 먼저 탈환

되어 드골장군이 연설을 했고 기적적으로 전화를 입지않아 중세 하퍼팀브 건축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으니 11세기에 지은 고딕양식의 대성당 이 남아있으며 박물관

에는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을 보여주는“바이외의 태피스트리” 벽걸이가 있습니다. 

 

  

1,944년 2차대전시 연합군이 상륙한 곳은 바이외 Bayeux 에서 20km 떨어진 아로망슈레방

해변으로.... 유타 비치, 오마하 비치, 골드 비치, 쥬노 비치, 스워드 비치 

있으며 해변에는 당시 탱크와 대포며 그외에 여러 조형물 들이 전시되어 있어 볼만합니다.

 

 

노르망디 는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행해진 곳으로 16만의 연합군은 서쪽인

오마하 비치에는 미군 이 상륙하니“라이언 일병 구하기” 의 무대이며, 동쪽인

주노 해안가에는 영국과 캐나군 이 상륙했으니... 미군 3천명과 영국군 1,500명등

4,500명이 전사 했는데 반면에 독일군은 수비군 5만명 중에 9천명이 사망 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행어로 “독일군이 도착했을 때 남자들이 숨었다, 그러나 미군이 도착했을

때는 여자들이 숨었다!” 라는 말이 있었으니.... 당시 미군 병사

152명이 여성관련 사건으로 처벌 을 받았는데, 인류 5천년 역사에서 전쟁이

나면 병사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 를 넘나드는지라 언제나 "야수" 로 변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20여년전 까지만 해도 해외 특파원은 꿈도 꾸지 못하고 허리우드 영화 

AP, UPI, AFP 및 로이터 통신등 서방매체 들을 통해 세계 뉴스 를 받아본지라

2차 세계대전 하면 미국과 독일군 또는 미군과 일본군 이 싸운 전쟁으로 압니다!

 

 

 하지만 2차대전 사망자를 보면 미국 29만명, 영국 35만명, 프랑스 56만명, 일본(조선인

약간명 포함) 군인 130만 + 민간인 67만명, 중국 군인 205만 + 민간인 775만, 독일

군인 350만 + 민간인 280만명 에 폴란드인 300만명인데 비해 소련은 군인 1,370만

민간인 700만명 으로 전세계 희생자 절반 을 차지하니 "독일과 소련의 전쟁" 입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서유럽은 영국만 빼고는 다 점령 한지라... 바르바로사

작전 을 개시하여 불가침협정을 깨고 소련을 침공 하니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3년간이나 포위 했고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및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는 격전을 벌여 쌍방간에 수천만명 사망자 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역사학자 임용한 씨는 그의 ‘임용한의 전쟁史 칼럼에서 “지상 최대의 작전” 이란

글을 기고 했는데..... “1944년 6월 6일 D데이 0시. 미 육군 82공정사단

존 스틸 일병의 중대는 프랑스 서부 생트메르에글리즈에 낙하 했다. 폭격으로

마을에 화재가 발생해 대낮처럼 밝았고, 마을 광장에는 주민과 독일군 이 모여 있었다.” 

 

 

미군은 공중에서 사살되거나 불타는 집에 추락해 탄약과 함께 폭사 했다.

스틸 일병은 교회 종탑에 낙하산이 걸렸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그는 이날 밤의 비극을 강제로 지켜 봐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을 다룬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1962년) 에도

이 에피소드가 등장 하는데 영화는 실존 인물과 생김새가 비슷한 배우에게 배역을

맡겼고 생존 인물이 직접 자신의 역할 을 맡았을 정도로 사실성을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틸 역은 액션배우가 아니라 코미디언인 레드 버튼스 가 맡아 약간 어수룩한

모습으로 연기했다. 스틸은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것을 보고 화가 났을 것이다.

스틸은 할리우드 액션스타를 빼닮은 용모에 체격도 건장했으며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그는 미군이 최초로 투입된 북아프리카 전투에 참가했고, 시칠리아에서도 낙하했다.

종탑에 걸렸던 그날도 독일군에게 생포됐다가 바로 탈출 했고 아른험 공수작전과

베를린 강하작전에도 참가했다. 제대 후에는 변호사가 돼 인생 후반부도 영예롭게 살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아니라 스틸의 일생 을 다룬 영화였다면 감독은 다른 배우를 섭외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등장하는 장면은 종탑에 매달려 죽은 척하는 낙하산병

이었다. 존 웨인이나 실베스터 스탤론 이 종탑에 걸려 버둥거렸다면 관객은 분노 했을게다”

 

 

“사람들은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를 보고 싶어 한다. 아니, 이미지에 취하고 거기서

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이미지 정치가 통한다. TV 출연 한 번으로

단박에 스타 가 되고 나중에 실망이 반복되는 사태는 관객인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배우는 허구의 세계에서 활약 하지만 정치인의 활동무대는 현실 이다. ”

 

 

2차대전 전쟁을 생각하노라니 문정희 시인이 '내가만난 名문장' 이라는 칼럼에 올린 

“두 번은 없다!“ 라는 글이 떠오르니...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유명한 시구(詩句) 이다. 단순하고 ‘위대한 평이성’이 주는 이 한 줄의

시구를 속으로 가만히 읊조려보면.... 그 외 모든 언어는 잠시 빛을 잃게 된다. “

 

 

“1996년 스웨덴 한림원은 폴란드 크라쿠프 에 사는 국제 시단에 거의 알려진

적이 없는 부끄러움 많고 조용한 그녀에게 노벨 문학상 을 수여하며

이런 말을 했다. “실존 철학과 시를 접목시킨 이 시대의 진정한 거장 이다.”

 

 

“심보르스카는 지극히 쉬운 일상적인 언어로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비범한 시 를 썼다.

삶이란 무엇이고 존재란 무엇인가?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해야 하나? 인생의

유일성(唯一性)과 유한성(有限性) 을 두고 쓸데없이 길고 어려운 설교 를 해야 하나? ”

 

  

“그녀가 평생을 산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 에 간 적이 있다. 독일군의 침공, 유대인

학살, 공산정권과 강제 이주 등 정치적 격동기를 치른 크라쿠프는 유난히 시인이 많은

 문학적인 도시였다. 비극과 수난과 폭력 을 거치면서 삶을 응시하고 그 속에 잠재한

욕망과 잔인함을 언어로 쓴  시인들이  그곳에서 태어나고  산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

 

  

“모든 존재는 이 시의 끝 부분에 나오는 “투명한 물방울”이다.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똑같은 물방울은 단 한 개도 없다.

인간은 철저히 독자적이며 부서지기 쉬워 더욱 존귀한 존재 이다.“

 

 

“역사의 수난을 절규와 적대와 한풀이로 소비해 버리지 않고 아름다운 시로

승화한 심보르스카 의 위대한 시구! 두 번은 없다! 

나에게 속삭인다. 어서 일어나라! 단 한 번뿐인 생을 온몸으로 사랑하라! ”

 

  

지리학자인 김이재교수의 지도 읽어주는 남자에 보면 “참혹한 전쟁 생생한 고발 현장에

미쳤던 사진 거장” 이라는 제목으로 사진 기자 로버트 카파의 전장 을 올렸습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에서 태어난 로버트 카파 (본명 안드레 프리드만) 

전설적인 사진기자다.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라며 콘탁스 카메라 한 대만 들고 전쟁터를 누볐다.”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데는 백마디 말보다 한장의 사진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병사들의 사진 11장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순간을 기록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덩케르크’등 전쟁 영화를 제작하는 데도 영감 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C 일보 정우영 기자는 “영화 라이언 일병... 모티브 된

해군 5형제 유해 담긴 美 군함 발견”이라는 기사를

올렸으니‘日 공격에 침몰 70년만에 찾아’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MS) 공동 창업자이자 억만장자 자선 사업가인 폴 앨런 

탐사팀 '설리번 5형제' 사연으로 유명한 미 해군 순양함

 'USS 주노'의 잔해 를 침몰 76년 만에 찾아냈다고 20일 AP 통신 등이 전했다. "

 

 

"탐사팀은 주노함 잔해를 17일 서태평양 솔로몬 제도 부근 해저 4000m 지점에서 발견했다.

길이 165m 주노함 은 과달카날 전투 가 한창이던 1942년 11월 일본군 어뢰 

탄약고를 피격당해 가라앉았다. 탑승한 수병 687명이 전사했다생존자는 10명뿐 이었다"

 

 

"주노함은 '설리번 5형제' 사연으로 유명하다. 주노함에는 조지·프랜시스·조셉·매디슨·

앨버트 등 5형제 가 함께 배치돼 있었다. 서로 같은 함정 배치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노함이 격침되면서 모두 전사 했다. 설리번 집안에는 외동딸만 남았다. 이

사건 이후 미군은 친형제를 같은 부대나 함선에 배치하지 않는 원칙을 엄격히 지키고 있다"

 

 

"'설리번 5형제'는 미국에서 애국심의 상징 이 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은 5형제

어머니에게 조의(弔意)를 표하는 친필 서신 을 보냈다. 미 해군은 알레이버크급

이지스 구축함(DDG-68) 에 '설리번 형제함' 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들을 기리고 있다."

 

  

"설리번 5형제 이야기 는 영화 소재로도 쓰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가 설리번 형제에서 모티브 를 땄다. 영화는 미군에 징집된 5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라이언 일병을 전선에서 구출해 집으로 돌려 보내는 이야기다."

 

 

"폴 앨런 탐사팀 은 지난 5일에는 1942년 5월 산호해 해전 에서 가라앉은 미

해군 항공모함 렉싱턴함 을 찾아내기도 했다. 탐사팀은 지금 까지

일본군 전함 무사시, 미 해군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등의 잔해도 찾아냈다."

 

 

“베를린 정치대에 입학한 로버트 카파 는 헝가리 경제가 붕괴해 가족으로 부터

지원이 끊기자 데포 통신사 에서 암실 보조로 일하며 사진 을 처음

접했다. 소련에서 스탈린과 대립하다가 추방된 레온 트로츠키 

1932년 코펜하겐에서 첫 대중 연설 을 하는 장면을 찍으며 사진기자로 데뷔 했다.”

 

  

“이후 파리에서 독일 출신 유대인 여성 게르타 포호릴레 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자 1936년 그는 로버트 카파 로, 포호릴레는 게르다 타로로 개명한다.

둘은‘로버트 카파’란 미국 사진작가를 만들어내 사진 가격을 3배나 올리며 재미를 본다.” 

 

  

카파의 명성 을 높인 건 스페인내전 (1936∼1939)이었다. 카파와 타로 는 마드리드,

세고비아 등에서 현장감 넘치는 사진을 전송했다. 특히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 에서 한 병사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극적으로 포착해 스타가 됐다.”

 

 

“ 하지만 1937년 타로가 탱크에 치여 숨지자 카파는 충격에 빠진다. 표지에 대표작

‘총 맞는 군인’ 사진을 넣은 책 ‘진행 중인 죽음’을 고인에게 헌정했다.

슬픔을 잊기 위해 그는 다시 전쟁터로 떠난다. 중일 전쟁이 벌어지던

중국에서 7개월간 취재했다. 카파는 전쟁의 긴장 속에서 술, 여자, 도박에 탐닉 했다. ”

 

 

런던 공습 을 견딘 노동자들을 담은 책 ‘워털루가의 전투’(1941년) 를 작업하며

유부녀 핑키와 사귄다‘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뉴욕에서

서류상 결혼으로 미국인이 된 그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쓴 회고록 이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실직한 카파 는 할리우드의 최고 스타 잉그리드 버그먼 을 파리에서

만난다. 치과의사 남편에 딸 까지 있었던 스웨덴 여배우는 13세 때 작고한 보헤미안

사진가 아버지를 닮은 카파의 유혹에 넘어간다. 2년간 뜨겁게 연애했지만 결국 헤어졌다 

 

  

“카파는 1947년 동료들과 매그넘 통신사 를 창설하고 중동전쟁(1948∼1950년) 취재를 위해

이스라엘 을 찾았다. 인도차이나 전쟁 막바지였던 1954년‘라이프’지의 베트남 특파원

으로 파견돼 5월 25일 프랑스군이 홍강 삼각주의 요새를 철거하는 작전을 취재한다.

수풀 사이로 진군하는 프랑스군을 찍기 위해 멈춰 선 순간 그는 지뢰를 밟고 산화 했다.” 

 

 

베트남에서 전쟁 중 숨진 첫 미국인 기자 였다. 매그넘 창립 동지였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은 사진 에세이 ‘영혼의 시선’에서 카파를 이렇게 추억했다. ‘그는 

소용돌이 속에서 고결하게 싸웠다.  운명의 여신은그가 영광의 절정에서 쓰러지길 원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