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십자군 2 : 십자군이 안티오키아성을 함락하고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우다!
당나라에 패한 돌궐이 서쪽으로 이동해 이란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후 1071년 소아시아
동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족" 의 알프 아르슬란은 2만 5천을 이끌고
동로마 비잔틴 황제 로마누스 4세의 5만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차지하자 위협을 느낀 동로마 비잔틴제국은 "로마교황청에 원군" 을 요청합니다.
당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정교" 로 양분된지라 교황은 로마 가톨릭으로 통일
할 좋은 기회로 여겼으며 또 성직자들의 서임권을 두고 "신성로마황제(독일)와 투쟁중"
이라 로마 시내에는 황제가 임명한 "클레멘스 대립 교황" 이 자리를 지키니 우르바누스
2세는 베드로 성당에는 접근조차 할수 없는지라 교황자리를 통일할 기회로도 여겼습니다.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을 제창하자 호응한 1차 십자군
은 기병 8천명에 보병 4만 2천등 5만명에 달했는데, 교황 대리 아마데우스 주교 외에
주요 제후들은...... 프랑스 남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가 2만이고, 하로렌(벨기에 동남부)
공작 고드프루아 부용은 3남 외스티슈, 4남 보두앵과 함께 1만 2천이며 이탈리아 남부
노르만족 풀리아 공작 보에몽(보에몬드)은 조카 탄크레디와 함께 1만 3천 으로 참전합니다.
1097년 6월 터키 서부 니케아를 항복받고 도릴라이온에서 룸셀주크군을 격파한후 10월 하순
에 십자군은 어렵게 터키를 종단해서는 산맥을 힘겹게 넘어 "안타키아" 에 도착하는데....
안타키아(안티오키아)는 BC 2,000년경 까지는 시리아 알레포의 야무하트왕국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BC 17세기에는 앙카라 동쪽 핫투샤에서 일어난 히타이트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터키와 시리아에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던 히타이트제국이 붕괴된 후 BC 841년 까지 몇개
공국이 분립했으며 이후 "안타키아" 는 이라크 북부에서 일어난 앗시리아에 점령 되었고
BC 333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은 이곳에 이르러 물맛에 감동해 도시를
세우기를 바랬다는데 말라리아에 걸렸는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후 그 영토는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터키) 3국으로 분할되니 부하
장군 셀레우코스는 오론테스강 하류 사만다으에 항구를 건설하고는 수도로 삼으니 당시
이름은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라고 불렀으며 그후 "셀레우코스 1세" 는 BC 300년경 강을
올라가서 오론테스강 25km 내륙에 도시 "안타키아(안티오키아)" 를 건설해 수도를 옮깁니다.
도시의 이름은 "왕의 아버지 안티오코스 이름" 을 딴 것이라고 하며...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로 외항 셀레우키아를 통하여 지중해 각지와 연결되고 또 동쪽으로 이어
지는 대상로가 있어 통상· 무역의 요지로서 예로 부터 “동방의 여왕” 이라 하였는데 BC
64년 로마에 점령되어 속주 시리아의 수도 되었고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 번영을 이룹니다.
47~ 55년 사도 "바울의 기독교 전도 근거지" 였으며 "베드로 교회" 가 세워진 그리스도교의 이방인
전도 기지로서 알려졌는데, 그리스도교도를 처음으로 “크리스천” 이라고 부른 곳이고 3세기 중엽
이래 기독교 종교회의가 열렸으며 아시아 총대주교 소재지가 되었으니 안타키아는 바울 근거지로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가 신약성경에 편입 됩니다.
한글 성경에 "안디옥" 이라고 불리는 안타키아는 아시아 총대주교가 설치된 도시로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기독교 4대도시" 로 "누가복음의 누가" 가 태어
난 도시이며 526년의 대지진 과 538년 페르시아군의 파괴로 황폐화된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가 재건했으나 옛 번영을 회복하지는 못했다는데 고대에는 소아시아의 프리지아
에 있었던 “피시디아의 안타키아” 등 안티오크로 명명된 도시가 16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635년 이슬람 사라센인에게 점령되어 300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다가 969년 동로마에 속하게
되었으며 1084년 부터는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를 받는데... 유럽에서 제1차 십자군이
결성되어 레몽과 고드프루아등 10여명에 달하는 유럽의 영주들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니케아를 함락하고 어렵게 소아시아를 남진해 1097년말에 이슬람령 안타키아로 쳐들어 옵니다.
장남이 모두 상속하는지라 차남 이하는 영지가 없으니 십자군으로 한몫 노린 자가 둘 있었는데
2,500명을 거느린 하로렌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 과 노르만 타란토 공작 보에몽의
조카로 300명을 인솔한 "탕크레드" 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서로 싸우다가..... 마침내
"보두앵" 은 아르메니아 군주 토로스(Thoros)로 부터 원군 요청을 받고는 에데사에 도착해
양부 토로스를 죽이고 "에데사 백국" 을 세워 주인이 되는데 훗날 "예루살렘 왕위" 에 오릅니다!
이때 포위된 안타키아(안티오키아)는 이슬람 셀주크투르크군과 십자군 간에 6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098년 6월 2일 마침내 도시는 배신자로 인해 십자군에 의해
점령을 당했으며 십자군이 쇠퇴한 이후에는 아랍측에 재점령 되었다가 16세기
전반에는 오스만투르크 가 장악했으며 1920∼1939년 까지는 시리아가 지배를 합니다.
하타이(안티오크, 안티오키아) 는 원래 비잔틴 제국의 도시였는데 무슬림 세력에 넘어간 것은
1085년이었으니 십자군이 도착하기 불과 12년 전으로...... 말리크 샤 1세 사후 셀주크
제국은 제후들에 의해 분열된 상태로 "안티오크는 야기 시안" 이 1088년 이후 통치하고
있었는데 섬기는 군주는 원래는 말리크 샤 1세의 동생인 시리아의 군주 "투투시 1세" 입니다.
셀주크 투르크족인 투투시 1세 는 알레포,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등 시리아의 지배자였지만
1095년에 사망하고 왕위를 이어 받은 것은 아들인 "알레포의 리드완" 이었는데 그가
권력 독점을 위해 형제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기겁한 동생 "두카크는 다마스쿠스" 로
탈출했으니, 지역 군벌들에게 통치자로 옹립되어 "알레포의 형과는 대립" 하고 있었습니다.
1097년 십자군 침략시 안티오크의 지배자 "야기 시안은 리드완과 동맹" 이었지만 "사위가
자신의 영토를 노리는지라"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와도 은밀히 연합했는데.... 문제는
안티오크가 불과 10여년전 까지 "비잔틴 영토" 였으며 "기독교 도시" 라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시리아 정교회는 비잔틴 제국에 동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야기 시안은 안팍에 적" 을 가진 것인데 1097년 10월에 3만 십자군이 안티오크로 접근중
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안은 적인 십자군에게 동조할 위험이 있는 그리스 및
아르메니안 정교회등 "기독교신자 성인 남자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 하고는 자신에게 충성
하는 시리아 정교회도들은 도시에 남겨서 성벽의 보수등 필요한 전투 준비 를 서둘렀습니다.
5만에 가까운 십자군이 1097년 10월 20일 도착했을때 안티오크 성주 야기 시안의 이슬람 병사는
"7천" 에도 이르지 못하였고 "도시 주민은 4만명" 에 불과했으나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시에 증축된 "안티오크의 성벽은 난공불락의 요새" 였으니, 살푸스산과 오론테스강에다가.....
성벽은 튼튼했으며 지중해에서 물자를 보급받기 쉬웠기에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십자군의 식량" 은 충분하지 못했으니 포위전이 길어진다면 곤경에 빠질 것이며
또 최고 사령관의 부재에 따른 "지휘 체계의 혼선이 문제" 인데, 선발대 중에 레몽
4세 는 적이 응원군을 부르기 전에 공격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으나 고드프루아와
보에몽은 포위전을 주장 했으니 지휘관으로 생각하는 레몽과 보에몽의 갈등은 심해집니다.
십자군은 북동쪽에는 보에몽의 부대가 성 바울문 밖에 진지를 구축했고... 레몽의 진지는 서쪽의 개의문,
고드프루아는 더 서쪽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성의 남동쪽은 실푸스산이 있었으므로 포위가 완벽하지
않아 야기 시안은 식량을 들여올 수 있었으며 야기 시안은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두카크는 십자군 보다 알레포의 형이 더 두려웠으니 십자군을 공격할 때 형의 군대가
등뒤에서 공격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교도와의 성전을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 만일 형제가 힘을 합쳤다면 십자군은 큰 곤경 에 빠졌을
것인데, 십자군 은 이번에도 무슬림들의 대립과 분열로 큰 이득을 보았던 것이지요!
야기 시안이 아들을 보내 독촉하자 다마스쿠스의 지배자 두카크가 무거운 몸을 일으킨
것은 포위가 2달이나 계속된 12월 말에 이르러서였는데, 십자군도 식량이 모자라니
제노바 함대를 통해 공급 받기는 했으나 도저히 겨울을 날수 없는지라 1097년
12월말 보에몽과 플랑드르의 로베르는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주변 약탈에 나섭니다.
이에 안티오크의 무슬림군은 12월 29일 야음을 틈타 성 바울문 쪽에서 총공격을 감행해
오론테스강 너머의 탈란키까지 공격했지만 레몽 4세의 포위를 뚫는데는 실패했는데,
한편 보에몽과 로베르가 이끄는 약탈 부대가 다마스쿠스 군대와 마주치자 소심한
두카크는 후퇴하지만 십자군은 식량을 얻지 못했으며 지진과 비가 수주간 이어집니다.
십자군은 기아상태로 내몰렸으니 1098년초 기아로 십자군 7명 중 1명이 사망 했으며
말도 700마리를 제외하고 다 죽었고 살기위해 죽은 말은 물론 무슬림의
시체까지 먹었다니.... 일부 식인종으로 변모한 십자군은 추운 비를 맞으며 진창
으로 변한 진지 안에서 굶고 있는 중에 신의 징벌로 생각되는 지진까지 발생 합니다.
십자군은 참회의 기도를 하고 진지안에서 매춘부를 내치며 금식기도를 했으니 살기위해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으니... 은자 피에르도 탈영중에 붙잡혀 탕크레드의 병영으로
끌려왔다고 하는데, 불신해 왔던 비잔틴 제국과 십자군이 갈라진 것도 이 시기니
비잔틴 장군으로 군사 자문을 하던 타티키오스가 1098년 2월 갑자기 철수한 것입니다.
1098년 알레포의 리드완이 구원병을 보내왔으나 2월 9일 하림에서 십자군에게 격파되는데,
3월이 되자 정복왕 윌리엄에 밀려난후 비잔틴까지 와서 경호대로 일하던 자칭 영국왕
에드가가 함대를 이끌고 시메온항에 도착했는데 병력외에 공성무기등 보급품을
가지고 있었으니 3월 6일 탈취하려는 투르크 군대의 공격을 고드프루아가 물리칩니다.
봄이 되자 식량 사정은 나아지긴 했지만 안티오크는 여전히 난공불락 이었는데 셀주크
와 종교적, 정치적으로 대립중인 이슬람 파티마 왕조로 부터 동맹 제의를 받습니다.
반면에 모술의 지배자인 아타베그 카르부카가 십자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집결 시키는데 그들은 십자군이 비잔틴 제국의 용병이라고 잘못 판단했습니다.
이집트 파티마왕국은 투르크 라는 공통의 적 때문에 비잔틴 제국과 사이가 좋았으니 협상
에 들어가나 십자군과 이집트가 예루살렘을 자신들이 가지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협상은 성과없이 끝나고, 모술의 아타베크 카르부카가 대군을 소집했으나
2달 전인 1098년 3월 에데사의 백작이 된 보두앵 때문에 먼저 에데사 부터 공격 합니다.
보에몽은 안티오크성의 두자매의 탑을 지키던 아르메니아인인 피루즈와 은밀히 접촉해
1098년 6월 3일 새벽 피루즈가 내려준 사다리 덕으로 도시에 침투한 십자군은
무슬림은 물론 시리아 정교회등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학살하고 전리품을 약탈했는데
보에몽은 성 함락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으니 도시의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 합니다.
야기 시안은 죽고 아들 샴스 알다울라를 포함한 투르크군은 요새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저항
하는 가운데 보에몽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레몽은 도시가 비잔틴 황제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지휘관들은 보에몽의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승리의 기쁨은 잠시뿐........
카르부카가 무슬림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 도시를 다시 포위했으니 이젠 공수가 뒤바뀝니다?
1092년 말리크샤 1세 사망후 아나톨리아 고원에서는 룸투르크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과 다니멘슈드가 대립했고 시리아를 지배하던 말리크샤 1세의 동생 투투시 1세
사후 아들인 형은 알레포, 동생은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며 서로 다투었는데
이라크와 페르시아등 영지는 말리크 샤 1세의 네 아들들에게 고루 분배 되었습니다.
따라서 안티오크 공방전 당시 십자군을 저지할수 있는 무슬림 지배자들은 모술에, 서로
싸우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가 아니라면 이슬람 보다는 비잔틴과 우호적인 이집트
의 이슬람 시아파 파티마 왕조 정도였는데... 알레포와 다마스쿠스가 패하니.........
이제는 모술의 지배자 아타베그 카르부카 만이 십자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모술의 카르부카는 성전을 벌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병력을 모았으니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까지도 참가했는데 안티오크에 도착하니 간발의 차이로 성벽 위에는 십자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십자군도 도시를 점령해 보니 야기 시안의 보급품과 식량이
오랜 포위전으로 거의 다 떨어진 것이라... 결국 포위된 십자군은 다시 굶주리게 됩니다.
그러나 카르부카는 부하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으니 휘하의 에미르들과 두카크
마저도 그가 승리한다면 시라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하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으니... 모래알 처럼 쉽게 흩어질 군대였는데 십자군도 문제가
많으니 안티오크 함락 하루 전날 블루아 백작 스테판은 패배를 직감하고 철군합니다.
안티오크성 함락후 다시 모술의 군대가 진격해오자 탈영한 십자군들은 블루아 백작의 패잔병
에 합류해 도망치다가 비잔틴 알렉시우스 1세의 원군을 만났으나 도망칩니다.
무슬림 군대는 6월 7일의 기습이 효과가 없었으므로 포위를 유지하기로 했으니
십자군 을 굶겨서 궁지에 몰 생각이었지만 십자군에 속해 있던 수도승이 술수(?)를 부립니다.
피에르 바르톨로뮤 가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성창(롱기누스의 창)을 발굴(?)해 기세가
오른 십자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자 카르부카는 한번의 전투로 적을 괴멸시켜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십자군을 넓은 평원으로 끌어내는데... 십자군은 굶주림
에 지치기는 했으나....... 중무장에 잘 훈련된 군대였으며 지휘관은 역전의 용사들 입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투르크 기마 궁병은 화살로 십자군을 공격했으나 갑옷을 입은 십자군
기사들은 적의 화살에도 강했으니 오랜 금식에다가 종교적 열정이 더해져
성 조지, 성 드메트리우스, 성 마리우스가 인도(?) 하는걸 보았다나 어쨌다나?
이에 투르크군은 크게 흔들렸으니.... 적과 협상을 시도한 오만한 사령관을 배신합니다.
다마스쿠스의 두카크가 먼저 카르부카를 버리고 퇴각하자 대세를 눈치챈 많은 에미르
들이 후퇴하니 마침내 카르부카가 퇴각할 때 쯤 그의 부대는 보잘것 없는
수준으로 변해 몰락하고 말았으니 전투는 십자군의 대승리 였으나 다시 논쟁의
불이 붙었으니 안티오크는 누구의 것인가? 보에몽은 자신의 권리 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비잔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게 언제냐는 듯 황제의 신의 없음을 비난 했으며
안티오크 함락에서 자신의 역활을 강조하자, 툴루즈 백작 레몽 4세는 물론
아데마르 주교도 반대했으니 혼자 안티오크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베르망두아 백작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는데 황제는 추가파병을 는 것을 거부합니다.
한편 보에몽과 레몽 4세의 대립은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으니 궁전을 분할점령 했으며
도시는 보에몽의 통제하에 있다지만 남부 프랑스인과 북부 프랑스인에 이탈리아
노르만 족에 의해 분할되어 내분이 무력 충돌로 번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오랜 기아로 인한 영양 실조와 비위생적인 환경이 겹쳐서 장티푸스가 돌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지도자인 아데마르 주교등 많은 군인들이 장티푸스로 죽자 십자군이 떠나니....
도시를 차지한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세우고는 아르메니아 실리시아 의
일부를 노리는데 고드프루아는 투르베셀을 차지하고 로베르 2세는 라타키아 항구
를 점령하지만 나머지 장수들은 우여곡절 어려운 전투 끝에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레몽과 보에몽이 안티오키아를 서로 차지할려고 싸우는데 몰두하자 병사들이 항의하니 레몽
은 보에몽이 예루살렘 공략에 참가하면 안티오키아 소유권을 인정하겠다고 했고
보에몽도 동의했지만 주변영토 확장에만 신경쓸뿐 끝내 예루살렘으로 가지않았고
십자군은 노한 레몽에게 성지에 도착하면 총사령관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해서 겨우 달랩니다.
십자군은 1098년 10월에 출발해 12월에 마라트를 점령했는데 동로마 제국의 지원은 원정 거리
가 길어지면서 군수지원이 어려워지자 굶주린 십자군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시체를 먹었는데,
안티오키아 낙성에 이어 소식을 들은 시리아의 아미르들은 십자군과 협상해 안전을 보장
받으려 하는 가운데 트리폴리 북쪽 아르카(Arqa)라는 도시 공성전은 3개월을 넘게 끌게됩니다.
동로마 황제 사절은 점령지의 양도를 거부한 것은 서약을 위반한 것임을 강조하는 한편 1099년 여름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할테니 현 위치를 고수할 것을 청하니... 궁지에 몰린 반동로마제국파는
예루살렘 진공을 주장하기 시작하니 공성전을 중단한 십자군은 5월 19일에 베이루트 북쪽 파티마
영토에 진입하니 레몽 백작은 남루한 옷에 맨발, 손에는 십자 모양이의 지팡이를 짚고 압장을 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