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인 1 - 튀르키예와 중동 지방에 사는 비운의 민족인 쿠르드인!
4천만이라는 인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2천년 동안 자기 민족의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튀르키예
와 이란, 이라크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살며...... 영국이나 미국, 이란과 소련등 강대국에게
수없이 이용만 당하고 매번 헌신짝 처럼 버려진 "쿠르드인" 들의 이야기를 3편에 걸쳐 싣고자 합니다.
중동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혔는데, 세계의 모든 전쟁은 최종 목표를 확실하게 달성하려면 보병이
가서 깃발을 꼽아야 하는 것이니.... 트럼프 대통령은 지상군 투입에 울렁증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란에 육군을 투입하려니 위험 부담이 큰지라 대신에 또 쿠르드족과 접촉하는 모양 입니다.
며칠전 미국의 폭스 뉴스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병사 수천명이 국경을 넘어 이란 땅으로
들어갔다고 보도했으며 동아일보 이기욱과 임현석 기자도
“美, 걸프전때 검증된 ‘쿠르드 카드’ 로 지상전... 이란 흔들기” 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란으로 넘어간 쿠르드족 전투원들이 이라크 출신인지 혹은 이란 출신으로 이라크의 쿠르드에게 군사훈련
을 받은뒤 고국으로 돌아간 것인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이 혁명수비대와 교전을 벌이고,
치안 체제를 흔드는 역할을 해서 이란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민중 봉기 분위기도 조성할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 발발후 줄곧 ‘이란 시위대를 보호하겠다’ 고 천명해 왔다”
며 “쿠르드족 전투원들이 이번 공습뒤 민중 봉기에 나서는 이란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고 말했지만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쿠르드족 지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쿠르드족에게 현 이란 정권이 붕괴될 경우 쿠르드족에게 향후 쿠르드족
자치지역 건설에 대한 정치적 지원을 약속했다. 쿠르드족 전투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라는 뜻을 가진 쿠르드어 ‘페슈메르가 (Peshmerga)’ 로 불린다.
이라크 북부에 있는 쿠르드 자치정부 (KRG) 의 군사조직 이름 또한 페슈메르가며 쿠르드
족은 IS, 각국 정부군과의 교전을 통해 상당한 지상전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라크에서 펼쳐진 IS 퇴치 전쟁 때는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다만 쿠르드족은 과거에 영국과 미국에 적극 협력했지만 독립국가 설립이나 자치권 확대를
얻지 못했다. 시리아의 쿠르드족 무장단체인 시리아민주군 (SDF) 은 IS 격퇴에
앞장섰지만 미국은 2019년 10월 시리아에서 철수를 발표하는등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았다.
“쿠르드족에게는 ‘산’ 을 제외하면 친구가 없다” 라는 말이 있으니..... 기원전 3세기 부터
독립국가를 건설하지 못한채 중동 산악지대를 떠도는 구슬픈 신세 민족으로 튀르키예에
1,500만명, 이란에 800만명, 이라크에 500만명, 시리아에 200만명 기타 400만명이 거주한다.
제1차세게 대전 당시 독립국을 건설하게 해 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오스만 터키와
싸웠으나...... 1923년 다시 로잔 조약이 맺어져 무산됐고 1980년대 이란-
이라크전쟁시 이란은 이라크내 쿠르드족을 부추겨 이득을 보고는 전후 철저히 외면해 버렸다.
쿠르드족과 이란의 갈등은 그 이전인 2차세계 대전때 시작됐으니 쿠르드족은 옛 소련의
도움으로 1946년 초에 이란 북서부에 마하바드 공화국을 세웠으나 이란과
타협한 소련군이 철수하고 이란군이 공격해 오니 수없이 죽고 공화국은 해체되어 버립니다.
2022년 9월 22세이던 쿠르드 여성 마사 아미니는 친척을 보기 위해 고향인 이란 쿠르디스탄주
사케즈에서 수도 테헤란에 왔는데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 경찰에 구금돼서 사흘만에 의문사 하니.... 촉발된 시위는 이란을 넘어 전세계로 번졌습니다.
이란의 쿠르드족은 수니파로 시아파인 이란 정부에 차별받고 탄압받아 왔는데..... 이란내에 소수
민족은 쿠르드족 외에 아제르바이잔계와 루르계, 아랍계 및 튀르크계가 40% 에
달하니 저 쿠르드족 군대가 이란 영내에서 자리를 잡으면 이란 정권이 크게 흔들릴 것으로 봅니다.
쿠르드족은 지구상에 "최대의 소수민족" 이라고 불리니 무려 4천만명이나 된다는데,
주로 튀르키예와 이라크, 시리아 및 이란에 거주하면 아르메니아
등에도 약간 있는데 지난 2천년 이상 독립국가를 세워 본 적이 없는 비운의 민족 입니다.
쿠르드인들은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엄청 노력했고 피눈물 나는 희생을 했지만 토사구팽이라고
영국이나 미국 등은 아쉬울 때는 온갖 감언이설로 약속해서 저들을
이용하고 사태가 끝나면 나몰라라 내팽개치곤 했으니 그들은 수없이 배신을 당한 민족입니다.
내가 쿠르드족을 만난 것은 튀르키예 (터키) 여행시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지에서
식당의 종업원등 허드렛일이나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더러 본적이 있는데, 그 외에 쿠르드족 소년과 직접 대화를 해 본 일이 떠오릅니다.
10년 전인 2016년 5월 13일(금) 부터 6월 6일(월) 까지 24박 25일간 터키 전국일주 여행을
했으니, 튀르키예(터키) 32개 도시를 여행하는 중에 5월 23일 가지엔텝
에서 버스를 타고 튀르키예 동남부 지중해의 타르수스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합니다.
앤티크라고 불릴 고풍스러운 옛 주택을 개조한 호텔을 나와 걸어 타르수스 Tarsus 시내를 보는데 몇곳을
구경한 후에는..... 아직도 2천년 전의 우물이 남아있다는 "사도 바울의 집" 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로터리에 쿠탈미쉬 슐레이만 샤 동상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갔는데 얼른 보이지 않는지라, 마침 소년에게
물어서 사도 바울 (St. Paul) 의 집터 Antik Sehir 를 찾아 우물 St Paul Kuyusu. 까지 구경했습니다.
사울에서 이름을 바꾼 바울의 옛일을 회상하고 밖으로 나오니 조금전 여기 골목앞에서 길
안내를 해주었던 소년이 우릴 기다린듯 서 있는데..... 눈빛이 애수를 뛴듯
하면서도 너무나도 강열해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하니 자기는 "쿠르드인" 이라고 말하네요?
쿠르드인, 네가???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5리라(2천원) 를 꺼내 주니 소년은 얼른 받아
재빨리 달아나는데, 마눌은 아이에게 큰 돈을 주었다고 물정 모른다고
나무래는데..... 내 입에서 “당신이 쿠르드인을 아니?” 라는 말이 나오는지라 당황합니다?
우리 부부가 쿠르드인 소년을 만난 타르수스 TARSUS 는 예전에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BC 38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처음 만난 곳으로
유명한데.... 이첼주 아다나 서쪽 37km 에 있는 도시이며 현재 인구는 23만명 입니다.
원래 항구였던 타르수스는 현재는 내륙 16km 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그리스인들의
자치 도시로 BC 66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점령된 후에
안토니우스에 의해 “자유와 자치” 가 주어졌으며 한글 성서에는 “다소” 라고 나옵니다.
타르수스는 AD 72년경 부터 로마 속주 킬리키아 왕국의 수도로서 번영하여 문화와
학문의 발달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했다고 하며 그 전에 사도 (使徒)
바울의 출생지인데..... 15세기부터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가 되면서 쇠퇴하였습니다.
타르수스는 고대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하나인 헤티트 문명의 영향하에 BC 3천년 에 건설된
항구 도시로 지중해 교통 왕래를 통하여 발전하였고, 헬레니즘 시대에 번영했으며 로마
시대 타르수스는 킬리키아의 행정수도로 문화 수준이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 갔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의 후계자 아르케데무스와 기원전 2세기 스토아 철학저 안티파터를 배출하였으며... 또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가 총독으로 있기도 하였는데,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배로 지중해를 건너
키드누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난 도시로 “타르수스의 바오로” 라는 신학 입문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St. Paul) 의 집터에 우물 St Paul Kuyusu. 은 바울이 사용했다는데 수천년동안
마르지 않은 35m 우물 과 바울의 초상화가 있으며, 바울은 서기 67년에 로마에서
네로에게 죽는데 도시는 옛날에는 항구였으나 토사 때문에 지금은 바다에서 15km 내륙에 있습니다.
타르수스에는 클레오파트라 문 Kleopatra Kapısı (Cleopatra’s Gate) 이 있으니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지원하려 군대를 이끌고 타르수스로
왔다가 패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돌아가서 독사가 가슴을 물게해 자결합니다.
세익스피어에 의하면 BC 41년 클레오파트라는 보라색 돛에 은으로 된 노를 젓는 배에 황금을 가득 싣고
금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양쪽에 큐피드 화살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누운 아프로디테 모습으로
입항해 내릴때는 달콤한 향수냄새가 진동하니, 아프로디테가 디오니소스와 축제하러 왔다고 여겼답니다.
쿠르드어는 페르시아어와 연관이 많다고 하는데, 쿠르드족은 종교가 아닌 언어와 문화로
정체성을 찾으니 언어는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 이란어군에 속하는 쿠르드어로
페르시아어 및 파르티아어와 관련이 깊으니 모두 이란어군에 속하는 친척 관계에 있습니다.
튀르키예의 쿠르드인은 라틴 문자를 사용하고, 이란, 이라크, 시리아의 쿠르드인들은 아랍- 페르시아 문자를
사용하며,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쿠르드인들은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데 중세 쿠르드인들의
발흥지가 구 메디아 왕국의 중심이었던 서부 이란 산악지대 이므로 메디아인들의 후손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튀르키예인들과 공존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튀르키예인과 전혀 구분할수 없을
만큼 닮았는데.... 훗날 이주해온 튀르키예인들이 먼저 거주하던 쿠르드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니 남동부 아나톨리아에 전통 문화 중에 남성이 머리에 두르는 수건인 푸시(Puşi) 와 품
넓은 바지인 샬바르도 원래 쿠르드족의 풍습이며, 또 민속춤인 할라이 (halay) 도 쿠르드족의 춤입니다.
쿠르드족이 많이 거주하는 남동부 아나톨리아의 튀르키예어 방언에도 쿠르드어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으니..... 가령 가지안테프 사투리로는 와이셔츠와 같은 종류의 상의를 mintan
이라고 부르는데, 쿠르드어와 동일한 어휘이며 튀르키예 표준어는 전혀 다른 단어인 gömlek 입니다.
푸시는 촌놈들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푸대접됐으나, 2010년 이후 튀르키예에서 남녀 안가리고
스카프 용도로 두르는게 유행이 되면서 다시금 여기저기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샤 라프 나마” 에서 그들의 기원을 다룬 신화가 나오는데 페르시아 신화, 조로아스터교 신화와 관련이 있으니
악신 아흐리만으로 부터 힘을 얻은 폭군 아지다하카 가 1천여년동안 지배를 하며 겨울이 찾아왔고,
그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은 양 어깨에 하나씩 돋은 독사에게 바칠 젊은이의 두뇌를 매일 2개씩 진상해야 했다.
백성들은 적어도 한명의 젊은이라도 살리기 위해 하나는 진짜 사람의 두뇌, 나머지 하나는 양의 두뇌를
바쳤다고 하며, 이렇게 살아남은 젊은이들이 쿠르드족이라고 한다. 다하카에게 아들을 여럿 잃은
대장장이 카와는 백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다하카의 머리를 망치로 쳐서 물리치니 3월 20일 이다.
이후 카와는 폭군이 죽었다는 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산 위에 모닥불을 피웠고, 이에 봄은 하루 늦은
3월 21일 그 다음 날에 왔는데, 이 때문에 특히 남부와 동부 쿠르드에서는 오늘날까지 모닥불을
만들고 이 불을 뛰어 넘으며서 돌아온 봄을 축하하고, 그들이 큰 힘에 단결하여 맞서 싸운 것을 나타내고 있다.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선 이 일을 파리둔이 했다고도 하고, 일부는 파리둔이 카와와 함께 물리쳤다고도 한다.
페르시아계 문화권에선 이슬람교, 비이슬람교 할 것 없이 이 날을 기념하며, 이것이 중동의 춘분인 노루즈다.
고립된 산악지대에 살던 이들은 중동 지역의 전통인 다신교를 신봉했으나 현재는 수니파
이슬람이 대다수이고 일부는 야지디교 신자이며, 이란의 쿠르드족은
수니파 신자도 있지만..... 이란의 주류 종교인 시아 12 이맘파를 믿는 이들 또한 많다.
이슬람에 회의를 느끼고 세속주의자로 돌아서는 인구도 있다. 구소련권 국가의 쿠르드족은 무신론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본래 쿠르드인들은 산악 오지의 가난한 유목민이었기에 도회지에서 처럼
이슬람이나 기독교 신학이 발달하기 힘든 것도 있거니와 다른 유목민들과 다르게 통상과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슬람 교리와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교리를 서로 혼동하거나 동시에 믿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야지드파, 예지드교, 예지드파라고도 불리는 야지디교 이다.
10세기경에 나타난 쿠르드족의 일신교 계통 야즈단파의 분파에다가 미트라교, 메소포타미아
전통, 기독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등의 종교 교리가 섞여서 만든 쿠르드족의
민족종교. 본인들은 최초의 일신교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일신교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종교다.
중동 지역은 소수 종교집단이 중세부터 감소하고 사멸한 상황이지만, 오늘날 적지 않은 야지디 신도들이
남아있다. 야지디교도들은 조로아스터를 쿠르드인 성인으로, 유대교를 야지디교를 베낀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나아가 기독교와 이슬람도 야지디교에서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들만의 주장으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모를까. 특히 악마를 숭배하는
종교, 뱀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매도를 받으며 다른 종교로부터 숱한 배척과 탄압을 받아왔다.
다른 중동 민족에 비하면 종교가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적은 편이다. 이는 산악 지대에서
거칠고 팍팍한 생활을 하면서 예배나 종교 생활에 투자할 시간이
부족했으며, 아무래도 세월을 걸쳐 여러 종교가 쿠르드인을 걸쳐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민족해방 운동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적지 않고, 이로 인해 무신론자들도 많다.
여성들의 지위도 중동 내에서는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하며, 이들의 사회 참여도 활발한 편이다.
여러 쿠르드계 여성이 참전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저승사자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중에 여성에게 죽으면 순교가 되지 않는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 쿠르드 여군들은 저격수로 활약하면서
ISIL 의 전의를 꺾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잡힐 경우 잔혹한 학대를 당하였다.
마르완 왕조는 중세 쿠르드인의 첫 번째 독립국가로 990년에서 1085년에
걸쳐 메소포타미아 북부(자지라) 와 아르메니아 서남부, 쿠르디스탄
북부( 디야르바크르, 반 호수 일대) 를 다스린 아랍/ 쿠르드계 왕조 입니다.
쿠르드인은 지도층에 불과했지만 쿠르드인의 첫 번째 독립국가로 여겨지니 왕국의 동남부 경계가
오늘날의 터키 - 시리아/이라크/이란 국경과 정확히 일치하며 영토도 터키 동남부로
10세기 말에 힘이 약해진 시아파 부와이 왕조로 부터 독립했으나, 수니파 셀주크 제국에게
복속되었다가 멸망했는데 살라딘(살리흐 앗 딘)의 아이유브 왕조 가문이 이 왕조 출신이라고 합니다.
창건자인 아부 슈자 바드 이븐 두스타크는 목동 집안 출신의 토호로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반란에 호응해 거병한후, 타론을 습격하고 무쉬를 약탈했으며 979년 말라즈기르트와
아흘라트를 장악한 바드는 10세기 중반에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던
이라크 부와이 왕조의 통치자 아브드 앗 다울라가 983년에 죽고 쇠퇴하자 독립을 선포합니다.
지역 강대국이었던 함단 왕조마저 동로마 제국의 공세에 쇠퇴하자, 바드는 세력의 공백을 틈타
디야르바크르에서 반 호수 북안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고, 종종 동로마 제국령 아르메니아
도 공격했으니, 984년 마야파리킨을 포함한 디야르바크르 분지 전역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991년 바드는 함단 왕조와 싸우다 전사했고, 조카인 아부 알리 하산 이븐 마르완이 계승합니다.
하산케이프에서 바드의 과부와 재혼한 하산 이븐 마르완은 숙부의 전쟁을 계속하여 쇠락한
함단 왕조로부터 실지를 회복했으나 997년 아미드(디야르바크르) 에서 반란이
일어나 군중에게 피살되니 동생 아부 만수르 사이드는 라카브로 무마히드
앗 다울라를 칭했고......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와 휴전을 맺어 평화를 얻었습니다.
1000년에 타오 공국의 다비트 3세가 공국을 동로마 제국에 넘긴다는 유언을 했고,
이에 따라 바실리오스 2세가 접수하러 오자 무마히드 앗 다울라
는 그를 알현하고, 복종을 서약하여 '오리엔트의 둑스' 칭호를 하사받았습니다.
이후 마야파리킨에 성벽을 두른 무마히드 앗 다울라는 1010년, 자신의 굴람(노예 병사)
이었던 샤르윈 이븐 무함마드에게 암살당했고, 샤르원은 그대로 정권을
장악했으나 곧 반발에 직면했으니 1111년 무마히드 앗 다울라의
동생 나스르 앗 다울라 아흐마드가 샤르윈을 축출하고 마르완 왕가의 지배를 회복합니다.
나스르 앗 다울라 아흐마드는 뛰어난 감각으로 파티마 왕조, 부와이 왕조, 동로마 제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에 나섰으니 바실리오스 2세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1026년 알-루하(샨르우르파)의 주민들이 아랍 지배자로 부터 해방시켜 줄
것을 요청하자 나스르 앗 다울라는 그 일대를 병합했고 자지라 지역 대부분을 점유합니다.
다만 루하는 1031년에 기존에 도시를 지배하던 아랍 부족과 동맹한 동로마군 장수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에게 점령되었으며
이듬해 나스르 앗 다울라는 쿠르드인 장군 발 휘하 5,000명의 기병을 파병합니다.
발은 친로마파 아랍 부족장을 죽이고, 도시를 장악한후 주군에게 '케르타스탄(쿠르디스탄)
의 패권을 지키고 싶다면'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마르완 왕조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동로마 제국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고, 결국 1033년
동로마군에게 재차 루하를 상실하고 말았으나..... 이후로는 한동안 평화가 이어집니다.
50년간 이어진 나스르 앗 다울라의 치세는 마르완 왕조의 전성기였으니
평화의 시기 그는 마야파리킨의 마리아 성당이 있는 언덕에
새로운 성채를 세웠고, 다리와 목욕탕을 건설했으며, 천문대를 재건했습니다.
또한 아미드와 마야파리킨의 모스크에 도서관을 더하였고, 역사가나 시인을 포함한 유명 학자들을 초청
했으니 그중에는 이븐 알 아시르, 압둘라 알 카제루니, 앗 티하미 등이 있었고 미래의 아바스
칼리파가 될 알 무크타디 역시 망명자 신분으로 나스르 앗 다울라의 궁정에 머물렀을 정도였습니다.
1054년에 바그다드를 장악한 셀주크 제국의 술탄 토그릴 1세에게 복속하긴 했지만 영토는
그대로 영유했고, 쿠르드인들과 아시리아인들의 교류가 활성화되는등
평화와 번영도 이어졌으며 무역과 예술, 수공업 등도 발달했으니..... 지금도
디야르바크르 성벽에는 나스르 앗 다울라 시기의 명문이 남아있는데 예술성이 높다고 합니다.
1061년 나스르 앗 다울라의 사망과 함께 마르완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으니
부왕을 계승한 차남 니잠 앗 다울라 나스르는 1079년까지
셀주크 제국의 번왕으로 머물렀고, 사후 나시르 앗 다울라 만수르가 계승했습니다.
1083년 마르완 왕조등 여러 왕조에서 재상을 역임한바 있었던 파크르 앗 다울라 이븐 자히르가 바그다드
로 향하여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와 와지르 니잠 알 물크에게 자신이 내통할테니 마야파리킨을
공격하라 제안했고 1085년에 도시가 손쉽게 점령되자 이븐 자히르는 마르완 왕가의 보물을 착복합니다.
이로써 마르완 왕조는 허망하게 붕괴되었고, 디야르바크르 분지는 셀주크 제국의
직할령이 되었으며, 마지막 아미르 나시르 앗 다울라는 기존 영토의 동남쪽
귀퉁이인 자지라트 이븐 우마르(지즈레)의 영주로 남았으나, 그마저도 1096년
1월 나시르 앗 다울라가 사망하자 휘하 맘루크인 지키르미쉬가 찬탈하면서 소멸되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 중후반부를 마르완 왕조라 부르기도 하는데, 마르완 1세 촌수가 왕조의 개창자인 무아위야
1세 및 그 손자이자 직전 칼리파 무아위야 2세와 각각 부계 6촌 (형제), 8촌 (할아버지뻘- 손자뻘)
으로 상당히 멀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계승이 아닌 사실상의 새 왕조로서 구분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완 1세는 오히려 우마이야 왕조 이전의 정통 칼리파 시대의 우스만 이븐 아판 칼리파
와 촌수가 4촌(형제) 으로 왕조 창립자인 무아위야 1세와의 6촌보다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라와드 왕조 (Rawadid) 는 955 / 983 ~ 1071년에 걸쳐 남아제르바이잔 (이란 서북부)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쿠르드인의 왕조로 비록 아랍계이긴 하지만 쿠르드화 된 라와드 부족이
세운 국가로, 비슷한 시기에 병존하던 마르완 왕조와 함께 첫 쿠르드 국가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지도층만 쿠르드 인이었던 마르완 왕조와 달리 라와드 왕조는 휘하 백성 역시 쿠르드 인이
적지 않았기에 쿠르드 국가라 부르기 더 적합한 편인데, 다만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 문화에 속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동진을 막던 라와드 조는 11세기 중반
튀르크멘을 앞세운 셀주크 제국에 복속됐고, 1070년 결국 셀주크 제국에 병합되며 멸망합니다.
왕가인 바누 라와드는 8세기 중엽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한 아즈드계 아랍 부족으로, 압바스
왕조 초엽 타브리즈 태수 직을 세습하며 세력을 확보하였는데 9세기 들어 압바스 조와
틀어진 라와드 부족은 호람딘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결국 사즈 왕조에게 밀려납니다.
산속에 은거하며 현지 쿠르드인들과 통혼한 결과, 그들과 동화된 라와드 족은 10세기 살라르 왕조에
복속하였다가 983년 살라르 조가 약화된 틈에 아제르바이잔을 석권하고 라와드 왕조를
세웠으니.... 라와드 왕조는 11세기 중반 아부 만수르 바수단의 치세에 정치, 문화적 전성기를 맞습니다.
하지만 셀주크 제국의 창건자 토그릴 1세의 숙부 아르슬란 이스라일을 따르다가
가즈니 왕조 마흐무드에 의해 축출된 이라키야
튀르크멘이 1030년을 전후로 아제르바이잔에 이주하기 시작하며 위기가 찾아옵니다.
초반에 바수단은 그들과 결혼 동맹을 맺고 아르메니아 왕국 및 동로마 제국에 맞서려 했으나
1039년 이라키야가 마라게를 약탈한 후에는 그 지도부를 초청해 학살하는 것으로
응수했으며 이후 셀주크 제국의 박해를 피해 많은 이라키야 부족이 서진해왔으나 모두
격퇴했고 바수단은 간자를 방문해 공통의 적 앞에서 기존의 적국이던 샤다드 왕조와 화해합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 1042-43년 타브리즈에서 수만명이 사망하는 대지진이 발생하고,
1040년대 말엽 셀주크 제국 휘하의 튀르크멘이 타브리즈 일대를
초토화시키자 바수단은 1054년 타브리즈를 방문한 셀주크 술탄 토그릴에게 복속합니다.
1059년 바수단이 사망한후 아들 아부 나스르 말만이 계승하였는데 1070년 그가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폐위되며 아제르바이잔은 셀주크 직할령이 되었으며, 다만
1111년 바수단의 손자 아흐마딜이 마라게의 총독에 올랐고, 1116년 사망한
후에는 노예 출신 장군 아크순쿠르가 계승하여 1225년까지 후손들이 아타베그 정권을 이었습니다
고대 문헌에서 아나톨리아나 이란의 산악지역에 살았다는 수렵 목축민들에 대한 기록인 수메르의
구티 (Guti, Gutian people) 나 그리스- 로마 기록의 퀴르트 (Cyrtians) 혹은
카르두키 (Charduchi) 나 고대 왕국 우라르투와 메디아 등에서 쿠르드인의 기원을 찾기도 합니다.
사실 파르티아나 사산 왕조 시대까지는 여러 이란계 부족 중에 하나 정도로 취급되어 왔는데, 언어등 직접적인
기원은 파르티아까지 닿는다고 하며 이후 중세에 아랍계였던 이슬람 제국의 침공으로 이란이 이슬람
제국에 복속된뒤 옛 이란의 서부 변경 지역 (캅카스-아제르바이잔-구 메디아 일대) 에서 이란계,
아르메니아계, 아랍계, 튀르크계 등이 뒤섞이며 독자적인 종족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쿠르드인 입니다.
예컨대 쿠르드인 출신으로 유명한 살라딘의 조상들은 원래 아랍계 부족이었는데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와서 살다가 점차 쿠르드화된 경우라고 하며, 때문에 현대 쿠르드인의 외모는 이란인을
닮은 경우도 있지만 전형적인 아랍인의 모습인 경우도 있으며 일부는 아르메니아인을 닮기도 했습니다.
중세 쿠르드인들의 독립 왕조는 자지라 지방의 마르완 왕조와 아르메니아의 샤다드 왕조
등이 있었으나 지도부만 쿠르드인이었다고 하며, 가장 유명한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의 개국왕 살라흐 앗 딘은 쿠르드 혈통이나 사실상 튀르크- 아랍인 이었습니다.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한 사파비 왕조 황실 역시 따지고 보면 쿠르드 혈통이나 창건자 이스마일 1세의 12대조
할아버지가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한후 수백년에 걸쳐 튀르크- 페르시아화되었기에 건국 후에는 쿠르드인
정체성은 지니지 않았으니 결국 쿠르드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는 20세기 전까지 출현하지 못했습니다.
쿠르드인의 국민국가는 1927년 튀르키예 동북부의 아라라트 공화국, 1946년 소련의 지원으로 이란
서북부에 세워졌던 마하바드 공화국의 두 사례뿐이며 둘 다 단명하였으며 이라크
쿠르디스탄도 제압되었고 21세기 들어 시리아 쿠르디스탄인 로자바가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쿠르드족의 거주지는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유지한 오스만제국 쿠르드
토후국 (Emirate of Botan, Soran, Baban..) 형태로 존재해 왔는데, 16-19세기
오스만-이란 국경에 있던 쿠르드계 토후국들은 대부분 19세기 중반 중앙집권화로 혁파됩니다.
7세기 초반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멧의 후계자들은 칼을 들고
동로마제국을 공격해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후마이야 왕조를
세웠고 이슬람교는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까지 퍼지니 바그다드에 압바스 왕조가 세워니다.
압바스 왕조 시리아까지 쳐들어와서는 후마이야 왕조 멸하고 이슬람 최고 권위인
칼리프가 들어섰는데 중앙아시아에서 돌궐족의 후예인 튀르크족이
쳐들어 와서 점령하니.......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셀주크 투르크" 로 불립니다.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소아시아까지 빼앗기자 그간 서로 반목하던 로마 교황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프랑스 기사들을 중심으로 여러 영주들이 5만으로 1차 십자군이 출범해
소아시아를 지나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예루살렘을 차지해 5개 십자군 왕국을 세웁니다.
안티오키아는 시리아 서북 지방으로 베드로와 바울의 흔적이 남아있으니 그때 바위 절벽을 파고
교회를 세운게 아직도 남아있는데 훗날 터키의 국부 케말 파샤는 안티오키아 주민 중에
튀르키예인들에게 궐기를 호소해서는 이 땅을 빼앗아 튀르키예 땅으로 만드니 하타이로 불립니다.
안티오키아는 BC 2,000년 바빌로니아, BC 1,700년 히타이트, BC 500년 앗시리아의
지배했고 이후 로마와 비잔틴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유대에서 온
기독교도들을 크리스찬이라고 불렀고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태어난 도시입니다.
남동쪽 50km 제그우마에서는 그리스, 로마시대 모자이크가 발견되었으며 1084년 슐에이만 샤가
알텝을 점령했지만 1270년 몽골의 침입으로 도시가 파괴되었고 1471년 이집트
맘룩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슬탄 셀림이 반격해 1516년 오스만 터키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제그우마 Zeugma 는 비레직 북쪽 유프라테스 강둑에 BC 3년 셀레우코스 왕조가 도시를
건설했으니 폼페이의 3배이고 알렉산드리아 보다 컸다고 한느데 유적에서 발견된
집시여인 Cingene Kizi 은 디오니소수 축제에서 춤추는 여인으로 얼굴은 400
개가 넘는 자연석 돌을 사용해 감정을 표현했는데 색깔은 13가지에 원근법을 사용했습니다.
쿠르드족은 오스만 제국의 쿠르드 토후국 형태로 존재해 오다 1847년 쿠르드족의 Bedir Khan Beg 반란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반자치 상태였던 쿠르드 토후국 대부분을 폐지했고 이후 쿠르드스탄
아알렛 (Kurdistan Eyalet) 이라는 별도 행정 구역을 만들어 이스탄불 중앙정부의 직접 통치를 강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