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34 - 세베루스 왕조 이후에 난립한 무려 6명의 군인 황제들의 시대!
마크리누스는 제22대 로마 황제로 세베루스 왕조의 카라칼라 황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차지한 최초의 현직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이니, 로마 역사상 최초의 기사계급
출신으로 제위에 오른 비 (非) 원로원 출신 황제이자 로마를 방문하지 않은 황제 입니다.
카라칼라 살해후 제위에 올라 로마 제국 동부에서만 머문 황제로 무어인 황제로 유명했고
조각상이 흑인 처럼 묘사되어 흑인이나 흑백 혼혈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베르베르 혈통의 푸닉(북아프리타) 지역 출신 로마인으로 밝혀졌으니 백인입니다.
164년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레아 (알제리의 셰르셸) 에서 태어났는데 베르베르 혈통
무어인 답게 귀 한쪽에 귀걸이를 뚫었던 것으로 유명하며.... 부모는 중산층에
속하는 에퀴테스(기사 계급) 였고 마크리누스는 능력있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근위대장을 지낸 플라우티아누스의 재산 관리인이자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고... 법 지식
과 실무해석 능력이 탁월해 법학자들의 시대로 불린 세베루스 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니 플라우티아누스는 외사촌형 세베루스 황제에게 그를 추천했습니다.
황자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와 대립할때부터 마크리누스를 최측근으로 분류했고, 212년 단독 황제로 권력을
쥔 직후 파피니아누스를 숙청한뒤, 마크리누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으니 순행를 따라 다녔습니다.
카라칼라는 솔직하고 마초적인 매력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병사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지만,
잔인하고 충동적이었으며 관용과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니 아나톨리아, 레반트, 알렉산드리아
에서 잔혹한 행동을 벌이고 파르티아와 전쟁하는 중에 실책을 저질러 병사들로부터 불만을 삽니다.
217년 파르티아 원정 무렵 카라칼라가 폐위되고 마크리누스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돌았으니 그를
동요케 했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는데, 예언만으로도 유죄로 죽일 카라칼라를 살해하기로 결심했으니
217년 4월 카라칼라는 루나신전 침배 중에 암살됐으며 마크리누스는 로마군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습니다.
마크리누스는 전 황후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두 딸 일가를 로마로 돌아
오지 못하게 했으며, 재산은 동결하고 시리아 에메사 여인과 가족들의 황족 지위를
무효화하고 죽였지만 카라칼라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를 죽이지 못한 것이 실수가 됩니다.
로마군은 파르티아군과 217년 메소포타미아 북부 니시비스(튀르키예의 누사이빈)에서 전투를 치렀는데 어느쪽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했고 마크리누스는 인생 최악의 실수를 범하는데, 파르티아왕 아르타바노스 4세에게
2억 세스테르티우스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점령한 영토들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습니다.
군인들은 겁쟁이 마크리누스를 혐오했고 카라칼라가 군에 부여한 특권들을 일부 없애자 반발을 더
사면서 가짜 안토니누스가 나타났으니......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외손자
엘라가발루스로 알려진 14살의 아비투스였으니, 마이사는 20년 세월 쌓아둔 로마제국의
인맥을 동원해 연락을 취했고 친정인 에메사 왕가의 남은 재산을 팔아 재기의 도박을 벌입니다.
마이사 모녀는 동방에 있던 원로원 의원, 총독, 군사령관들과 접촉해 218년 5월 15일 밤, 소규모의 추종자
무리가 율리아 마이사와 섹스투스 아비투스를 에메사 근처 라파나이아에 있는 제3군단 갈리카
병영으로 데리고 갔으며 선동은 성공했으니 다음날 아침 군인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폭군 카라칼라는 폭군 콤모두스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는 인기가 엄청났기 때문이었습니다.
218년 6월 8일 마크리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반란군에게 패한후 지원군을 규합하겠다며 달아났는데...
발각되지 않으려고 수염과 머리를 밀었지만 탄로났고 보스포루스를 건너려던 중에 칼케돈에서
체포되었는데, 파르티아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입지가 손상된 것도 있지만 무엇 보다
군대의 급료와 특권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지 못한게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뒤를 이은 어린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제국 제23대 황제이자 세베루스 왕조의 제3대 황제로 1세기
네로 이후 로마인에게 최악의 불명예 3종 세트를 받고 몰락했는데.... 네로 이후 최악의
폭군인 콤모두스 조차 못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황제로 공인된 사람입니다.
그가 제사장으로 섬기던 고대 시리아와 로마의 태양신 엘리오가발루스에서 이름이 불리는데 즉위후 온갖
기행을 일삼다가 결국 킹메이커인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에게 버림받고, 재위 4년만에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에 측근들과 함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살해됐는데, 시신은 팔과 다리가
잘린채 무거운 돌과 함께 묶여 티베리스 강으로 연결되는 하수구로 버려졌으며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새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보라색 비단 겉옷을 입었지만, 볼에 연지 화장을 하고 머리에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면류관을 쓰고 있었으며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찼고 손목에도 각종 장신구를 착용했는데
로마인들을 더 충격에 빠뜨린 것은 로마에 입성한 거대한 원뿔형 검은 돌이었으니 태양신 엘라가발루스
를 상징하는 돌덩어리는 로마인들에게는 낯설고 괴이했는데, 팔라티누스 언덕 위에 있는 신전에 안치됩니다.
이때 북을 치고 심벌즈를 치는 악사들의 동방 음악에 맞춰 생전 처음 듣는 시리아 여인들의 노래가 들렸고,
팔라티노 황궁에서는 로마인들이 난생 처음 보는 “음란하고 낯선 섬행위” 의식 까지
벌어졌으니 시리아의 에데사에 봉안되어 있던 태양신의 신체를 로마로 옮겨와 숭배하라고 강요한 것입니다?
서기 218년부터 222년까지 재위했던 엘라가발루스 황제는 동물을 너무 좋아해 그의 마차를 개나 숫사슴 또는
사자나 호랑이에게 끌게 했으며 또 국가의 거창한 식전 (式典) 에 나체의 여인이 끄는 1륜차를 타고 등장
하는가 하면 노예들을 시켜 거미줄이나 개구리, 전갈 혹은 독사를 수집해서 신하들에게 선물로 보내곤 했습니다.
황제는 만찬 초대객들에게 장미꽃잎을 계속해서 너무 퍼부어댔기 때문에 몇 사람이 질식해 죽었으며,
거대한 목욕탕을 지으라고 명령한뒤 한번 목욕하고는 부숴 버리는등 국고를 탕진하자 할머니의
명령에 따라 친위대 병사에 의해 살해되어 티베르강에 던져졌는데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습니다.
마이사는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생존을 위해, 엘라가발루스와 큰딸을 포기하니 둘째 딸 마마이아
의 아들인 또 다른 외손자로 이종사촌 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황제의 양자로
삼도록 설득한후 군위대를 동원해 첫 손주를 죽이고는 둘째 손주를 알렉산데르 황제로 올립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군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마마보이 황제라 사산왕조 페르시아 전쟁중 불안감을 노출
하더니, 라인방어선을 침범한 게르만족과 전쟁초기 승기를 잡았음에도 어머니 조언대로 돈을 지불하고
평화교섭을 맺으려다가 독일 마인츠 병영에서 암살됐고 이후 50년간 악명높은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립니다.
니시비스 전투에서 돈으로 평화를 산 일로 세베루스 왕조는 동방 병사들에게 낙제점을 받았고,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와 로마를 공격하기 전부터 동방 군대 상황은 심각했으니 카라칼라
암살과 마크리누스 이후 동방 군단들은 주둔지를 잃고 방치됐고 군기는 해이해진 상태였습니다.
로마군의 전과가 확실한 쪽은 아르메니아의 도움을 받아 메디아의 험준한 고지대를 요격한 북쪽 분견대였으니,
이에 대해 헤로디아누스는 아르메니아에서 메디아에 이르는 지역이 험준한 고지대라 페르시아 기병들이
불리했고 로마가 활용해 아르다시르 1세가 출정했음에도 승리를 거두고 일대를 초토화하며 약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페르시아의 아르다시르 1세는 로마군이 3개의 분견대로 나뉘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진군해 들어오는
북쪽 분견대를 막을 메디아 방어 병력을 최소한의 전력으로 맡게하고 기병대가 활약하기 쉬운 전선으로
진격하는 본군과 남쪽 분견대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니, 상심한 알렉산데르는 군대를 안티오키아로 철수시킵니다.
군사적인 역량이나 경험이 없는 알렉산데르 황제는 시간벌기로 페르시아에 평화협상을 제안하니, 피를 흘려
가면서 싸웠고 개전부터 승리를 거두었던 군대 입장에서는 당연히 “황제가 싸울 생각도 안하고, 이기고
있는데 어머니 말만 듣고 게르만족들에게 돈을 주면서 회유하려 든다”고 불만을 가지게 되면서 반발하게 됩니다.
그후 게르마니아 군단병과 근위대는 반란을 일으켜 모군티아쿰(마인츠) 병영에서 235년 3월 19일,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옹립했으니, 이때 옹립된 막시미누스는 "나는 나약한 겁쟁이와 다르다" 라고 선언하며
병사들과 황제 막사로 쳐들어가서 황제와 어머니 마마이아에 그 자리에 있던 장군, 원로원 의원들까지 살해합니다.
- 반란으로 군인 황제 시대를 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 -
알렉산드로스 세베루스 로마 황제는 모범적인 인격자였으나 게르마니아 전쟁중에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요도도노 처럼 전쟁이라면 무서워하는 어머니가 개입해 평화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군에게 돈을
주고 휴전을 맺으라는 강요를 따르는 바람에 불만이 폭발한 게르마니아 군단병들과 근위대 반란
으로 살해되니 효도도 좋지만 동서고금 마마보이의 한계라? 여자들이 왜 전쟁에 개입해 일을 망치는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로마제국의 군인황제 시대를 연 첫번째 황제로 이전까지 로마 황제와 달리 순수하게 군대
경력만 가진 직업군인 출신 황제로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미누스로 체구가 거대하고
무력이 강한 황제였으며, 건국이래 가장 무식하고 무례하며 독선적인 황제로 평가받는 인물로 폭군의 전형 입니다.
속주민 보조병 출신으로 로마 황제가 된 최초의 사례인데, 4 이탈리카 군단 대대장으로 신병훈련 담당관이었는데,
235년 모군티아쿰(독일 마인츠) 에서 제위에 올랐고 238년 반기를 든 원로원을 제압하려 이탈리아로 쳐들어
갔지만 아퀼레이아 공방전 실패후 2 파르티카 군단 병사들에게 암살당했으며 이후 여섯 황제의 해가 시작됩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본인의 노력과 실력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은 1세대 로마 시민임에도 원로원, 로마인 모두
진정한 로마인이나 정상적 클리엔텔라 의무 아래에서 로마인이 된 케이스가 아닌 반(半) 야만인으로 간주되며
이름 뒤에 붙은 트락스(Thrax) 는 트라키아 사람이라는 뜻이니 트라키아 야만인과 같은 비하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막시미누스는 원로원과 이탈리아의 로마인들은 물론 같은 트라키아와 발칸 출신 로마인, 속주민들에게도
말 그대로 야만족 내지 반(半) 야만족으로 인식됐으며, 로마와 동로마 기록에서도 6세기의 동로마
관료 요르다네스는 막시미누스 생전의 동시대 로마에서 사용하지 않던 단어 "Gothia" 로 그를 설명합니다.
그는 헬라어(그리스어) 는 전혀 못하고 라틴어도 서툴렀지만 키가 8피트 6인치 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체격이 크고 힘도 좋고 털털하며 친근한 성격에 호쾌한 청년이었으니, 말과 달리기
시합에서 이기고 엄지 손가락이 어찌나 굵은지 팔찌를 반지로 써도 될 정도였으며, 마차
한대쯤은 맨손으로 끌었고 주먹으로 말의 턱을 때리면 말의 이빨이 우수수 털려나왔다고 합니다.
막시미누스는 황제 시찰 때 군단병들과도 대결하게 해달라고 직소했는데 황제는 이 무례한 요청을 받아들여 군단병
과의 대결을 허락했고 결국 군단 최강의 칭호는 군단병들 까지 쓰러뜨리고 우승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돌아갔으며, 신체능력과 무용이 맘에 든 황제는 즉석에서 로마시민권을 주며 황제 직속 경호대원으로 스카웃 합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돈으로 평화를 샀다는 소문이 퍼져 반란이 일어났을때, 그의 인기는 인연이
없던 본국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 까지도 막시미누스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는데,
병사들의 추대로 제위에 오른후..... 병사들에게 황제 모자와 로마에서 온 원로원 의원들,
고문단 전체를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로마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쪽 지지자들을 죽일 병력을 보냅니다.
로마 시민도 아닌 트라키아 야만족 출신 부사관의 황제 즉위가 찬탈 형식이었으나.... 병사들이 옹립했다고
통보했고 갈리아에서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모자를 불신임한 것이 보고로 올라오는 등
분위기가 심각하자, 원로원은 일단 막시미누스의 즉위를 인정하고 제위 등극 이후 절차를 모두 수용합니다.
새 황제가 보낸 병사들은 세베루스 왕조의 시리아인 시종들을 잡아죽이고 율리아 마마이아가 초빙
하거나 기용한 이들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됐으며,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을 의심했으니 꼬투리
잡아 숙청하는 상황아 반복됐는데, 로마에 오지 않고 대리인들을 보내 원격 통치하고 감시합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아그리 데쿠마테스 늪에서 알레만니족과 전투를 치러 그들을 물리치고
원로원에게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얻어냈는데, 이때 원로원은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이무렵 죽은 파울리나를 신격화해주고 막시미누스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라는 칭호를 내려 황족 지위와 정통성을 선물로 줍니다.
황제가 원로원을 철저히 무시하고 국경 방어 즉 야만족 격퇴에만 열을 올리는 모양새가 238년까지 계속됐는
데, 원로원과의 관계가 어찌되었건 전방의 군단병들은 자신의 무력 하나는 신뢰하고 있었고, 자신이
가장 잘 할수 있는 것은 패싸움이었으니까...... 소모전이라고 해도 이것에만 몰두하며 전투를 이어갑니다.
최전방에서 야만족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과 후방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으니, 트락스의
군사행동은 소모적이며 비용이 컸으니 텅 빈 국고를 세금을 올려 메꿀수 밖에 없었던 탓에 원로원과 민중들
의 세금 부담은 날이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이탈리아와 원로원 속주에서는 조세저항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막시미누스는 군인의 급여를 두배로 늘였으니 세금은 폭력적인 방법과 불법적인 몰수를 동원해 악랄하게
집행되었는데 여기서 더 세금을 걷겠다는 건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으니, 막시미누스의 명령에
따라 세금 징수원들은 부자, 중산층, 서민, 해방노예, 무산자에 상관없이 세금을 이중,
삼중으로 거뒀고 막시미누스의 명령 아래 예비 국고로 편성한 기금까지 모조리 전쟁 물자로 충당됐습니다.
게르마니아 현지에서 반란 시도에 이어 서기 235년 동방에서 티티우스 콰르티누스를 옹립하려는
또 다른 정변 시도가 발생했으며 238년 1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아프리카 속주 농장주
들이 높은 전시 세금에 반발하여 세리를 살해하고 관공서를 공격한뒤..... 아프리카
속주 총독 79세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황제로 추대합니다.
하지만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참칭은 정통성이 부족했던 데다가 휘하 병력도 얼마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반란은 불과 21일만에
누미디아 총독이었던 카펠리아누스에게 진압당하면서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막시미누스는 열흘이 지나서야 반란 보고를 받았는데 원로원까지 합세해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것을 듣게 되자 배은망덕한 원로원을 죄다 죽여버리겠다며
게르만족과 소모전 전쟁을 멈추고 판노니아의 최정예 군대를 데리고 로마로 진군합니다.
궁지에 몰린 원로원은 노귀족 둘을 뽑아 공동황제로 세웠는데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인데,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지지자들은 반대하며 전쟁을 앞두고 신전으로 향하던 공동황제에게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자,
두 황제는죽은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 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마지못해 카이사르 직위를 수여합니다.
내전이 시작되었지만 막시미누스 쪽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았으니 북이탈리아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전하자 불만이 쌓이니 판노니아 병사들은 로마 시민들이 자신들을 적으로 삼는
상황에 동요했고 푸피에누스가 군을 끌고 북상하자 2 파르티카 군단 병사들은 막시미누스 황제를 살해합니다.
이후 로마에서는 군인 황제시대가 개막되는데, 막시미누스 라는 공적이 사라지자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는
서로를 의심하고 동료 원로원 마저 두 황제파로 나뉘어 다투는 사이,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와 공모한 근위대 병사들 손에 238년 7월 모두 살해되고 고르디아누스 3세가 뒤를 잇게 됩니다.
238년 7월 고르디아누스 3세가 황제에 올랐지만 나이가 어렸던 관계로 정무 초기에는 어머니가,
서기 241년 이후에는 의부이자 장인인 친위대장 티메시테우스 (Timesitheus) 가 섭정합니다.
그후 페르시아 샤푸르왕이 국경을 침범했기에 고르디아누스 3세는 242년에 동방으로 출진했으니
도나우강의 정에병들과 현지 병력 합쳐 5만 로마군은 북부 메소포타미아인
에데사와 카라이를 되찾고 동쪽으로 진격해.... 티그리스강 근처 니시비스와 싱가라를 점령합니다.
243년에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향해 메소포타미아를 남하하던 중에 총사령관인 장인
티메시테우스가 과로사로 죽으니 어린 19세 고르디아누스 황제를 믿을수 없었던
로마군은 무느지기 시작하니 먼저 보급체계가 기능을 상실한지라 로마군은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근위대장 티메시테우스의 후임으로 필리푸스가 승계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다음해 봄에 페르시아로
진격하기로 하고 겨울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난후, 244년 2월 말 근위대장 필리푸스에게 매수된
병사 9명이 황제 막사로 들어가 죽이니 자신이 황제가 된후 원로원에는 황제가 병으로 죽었다고 통지합니다.
29대 황제 필피푸스 아라부스는 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고르디아누스 3세가 사망한 뒤 “아랍인
황제 필리푸스” 는 페르시아국왕 샤푸르에게 사신을 보내 강화를 제의했으니 이는 전쟁을
치루는 중에 원로원이 새 황제를 추대해 버린 막시미누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함인 듯 합니다.
샤푸르 1세는 형을 죽이고 왕이 되어 로마령 안티오키아를 약탈할 때 까지는 좋았으니 로마군의 반격으로
수도 크테시폰 사수에 몰두하다가 뜻밖의 호재를 만났으니 운이 좋은 것인데, 해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까지 페르시아 속령으로 인정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관철합니다.
필리푸스 황제가 로마로 귀환하자 원로원은 속으로 아랍 베두인족이라고 경멸했지만 황제가 자자세로 원로원을
존중하자 서로 좋은 사이가 되는데.... 아랍 사막은 카라반을 습격하는 베두인족 도둑들의 독무대였으나
로마가 질서 확립을 위해 베두인족을 보조부대로 흡수함에 따라 그 중에서 필리푸스 황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아랍인 베두인족 출신 필리푸스를 모든 역사책이 다루는 것은 이 사람이 로마건국 천년제를
주관했기 때문인데....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게 기원전 753년이니 서기 248년은
천년에 해당하는지라 연 것이니 라틴족 천년제를 아랍인이 주관한게 이례적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모이시아, 판노니아등 병사들이 충성을 거부하는 항명사건이 일어나고 게르만 콰디족과 고트족의 침공으로
민심까지 이반하니 황제는 원로원 의원 데키우스에 반란 진압을 명하는데, 일본 무로마치 막부 말기
아시카가 다카우지 처럼 토벌군이 파키티아우스를 진압한 249년 데키우스를 옹립하고 필리푸스를 불신임합니다.
데키우스는 게르만족의 침공에 일부 수비군만 남긴채 249년 봄 로마로 진군했는데, 이때 이집트에서 폭동이 일어나
로마는 밀 공급량이 줄어들면서 주화의 가치가 떨어져 인플레이션 폭등으로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필리푸스는 249년 9월 데키우스에게 패해 부하들에게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채 자결했는데
전투중 불신임을 받고 암살되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필리푸스는
어이없게 죽으니 원로원은 데키우스의 즉위를 승인하고 필리푸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합니다.
데키우스는 30대 황제로 속주 출신임에도 로마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려고 했지만, 로마 제국의 황제들
중에 최초로 제국 내 크리스트교인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했기 때문에 중세 이후에는 평이 좋지 않으니
전통적 라틴 저자들에게 훌륭하게 평가받는 반면에 크리스트교 저자들에게 “지긋지긋한 짐승” 이라고
비난받는데, 데키우스는 군인황제시대를 개막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마찬가지로‘촌뜨기’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와 달리 배경은 전혀 다른 황제였으니 원로원 의원을 역임하면서 군사, 행정, 정치
를 섭렵했으며 30대에 첫 집정관까지 지낸 사람이었으니, 같은 발칸반도 태생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는 결이 다른 상류층 출신이었습니다.
데키우스는 245년부터 다뉴브강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가 249년 봄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등극했고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무찌른후 원로원에서 황제로 인정받았으며 시민들
에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강요하면서 250년 1월 부터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를 전개합니다.
250년에 게르만 고트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했으니 마르키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뒤 니코폴리스를 포위하자 데키우스는 급히 트라키아로
진군해 니코폴리스를 포위한 고트족에 접근하니 고트족은 포위를 풀고 하에무스 산맥으로 물러납니다.
데키우스는 급히 추격했으나 고트족의 왕 크니바가 돌연 군대를 돌려 맹렬한 기세로 기습하자
로마군은 당황해 격파되었고, 고트족은 필리포폴리스를 포위하니
수비군 사령관 티투스 프리스쿠스는 항복한뒤 크니바 왕과 동맹을 맺고 데키우스에 대항합니다.
하지만 데키우스는 전의를 잃지않고 군대를 모집한후 고트족과 합류하려고 진군하던 카르피족과
게르만족의 행군을 차단하고 산꼭대기의 통로를 신임하는 장교들에게 맡긴후 국경 요새
들을 강화하는 한편 고트족의 퇴로를 차단해 몰아붙였고, 고트족은 점차 괴멸될 위기에 빠집니다.
고트족의 왕 크니바는 전리품과 포로들을 내주는 조건으로 퇴각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승리를 확신한
데키우스는 침략자들을 응징해 공포심을 안겨주겠다고 결심했고 타협도 거부하자 고트족은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251년 6월 모이시아에서 로마군과 격돌하니 아브리투스 전투 입니다.
고트족은 3개 대열로 이뤄져 있었는데, 제3열의 전면은 습지대의 엄호를 받고 있었으니
교전 초기에 공동 황제로 아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니
병사들이 동요하자, 데키우스는 "한 병사의 죽음은 공화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데키우스는 아들의 죽음에도 흔들림 없이 군대를 지휘했고, 고트족의 제1열과 제2열이 괴멸되자 로마군은
제3열마저 섬멸하려 진군했는데, 하지만 분노해 이성을 상실했는지 제3열 전면에 있는 늪지대로 돌진
하자 병사들은 늪에 빠져 가라앉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병사는 미끄러졌는데.... 고트족은 습지에서
싸우는게 익숙했으니, 그들은 키가 컸고 창이 길었으며 멀리서도 로마군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늪지대에서 허우적대다가 고트족에게 괴멸되었는데 이때 데키우스도 늪지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전사했으니 데키우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외적에게 전사한 황제로 기록되었습니다.
직후 이탈리아 페루자 출신인 트레보니아누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로 선출되었으니 그는 로마 제국
제31대 황제로 정치적 동지인 전임 황제 데키우스 황제와 함께 하나의 왕조로 묶여 서술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명예로운 경력을 모두 거친, 전형적인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이탈리아의 오래된 명문귀족 출신 황제니, 서기
249년 데키우스가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됐을 당시부터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데키우스
지지자였는데, 250년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으로 재임하며 명성을 쌓았고 황제 최측근이 됩니다.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가 고트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황제에 즉위했지만 고트족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로마인들의 반발을 샀고,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쓴 전염병 유행으로 민심을 잃게 됩니다.
황제에 즉위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빨리 로마로 돌아가 즉위를 알리고 황제로서 권위와 위엄을
인정받고 싶었지만 고트족,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략 외에도 전염병 창궐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합니다.
갈루스는 고트족 왕 크니바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고트족이 돌아갔지만 조약의 내용은 로마에 굴욕적이었으니,
고트족은 전리품과 포로들을 데리고 갈수 있었고 로마군은 다양한 편의품을 제공해야 했으며 고트족이
로마 영토를 다시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漢) 나라가 흉노에게 했듯 매년 황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로마인들은 데키우스가 영웅처럼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자기 지위 강화를 위해 데키우스 죽음을 이용한다고 생각했는데, 병사들은
이런 굴욕적인 협상이 도나우강 하류 고트족들이 다시 쳐들어올 빌미가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갈루스는 데키우스의 차남 호스틸리아누스를 양자로 입양해 공동 황제로 삼아 정통성을 강화했으며 데키우스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지만 전염병이 창궐해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호스틸리아누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했는데,
안티오키아 마리아데스가 흉흉한 민심에 편승해 반란을 일으켜 시리아 전역과 카파도키아 속주 및 동부
국경을 황폐화시키니 갈루스 황제는 토벌대를 보내 마리아데스에게 승리했지만 그는 페르시아로 도주합니다.
그후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 1세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고 253년에는 로마군 주둔지가 있는 시리아 국경을 침공해
바르바리소스를 기습하여 로마 군단을 섬멸했으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포함한 도시들을 파괴했는데,
에메사 왕족 출신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페르시아군을 격퇴했지만 그는 황제를 자칭하며 동전까지 주조합니다.
동방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서방에서는 갈루스가 군대를 달래면서 군심을 안정시켰지만 고트족이 연공금 문제
를 거론하며 시비를 걸었고,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은 고트족이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획득하고 매년
황금을 얻게 되자...... 자신들도 같은 권리를 얻기 위해 253년 다뉴브강을 건너 발칸 반도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갈루스는 당황하지 않고 군대에 이를 막게 했으니 스키타이 부족들이 251년 다뉴브강 이남 발칸반도를 침공했는데,
국경 근처는 고트족이 다 해먹은 뒤라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제국 영내 깊숙히 쳐들어왔으니 로마군의
추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다를 건너 안전하다고 믿은 아나톨리아 반도로 가서 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약탈합니다.
그러더니 그리스계의 부유하고 오래된 도시 소아시아의 에페수스를 공격했으니 침략자들은 아르테미스신전을
불태웠고, 수많은 주민을 살육하고는 많은 재물과 주민들을 손아귀에 넣은후 그들의 땅으로 유유히
돌아갔는데 속주 총독과 장군들이 제대로 대처를 못하는 바람에 황제가 욕을 먹었고 민심은 최악이 됩니다.
253년 저지 모이시아가 고트족에게 재차 침공당했는데 전임자 데키우스의 아브리투스 전투후, 갈루스가
믿고 맡긴 전직 집정관이자 장군 아이밀리아누스가 모이시아 수페리오르와 판노니아 총독이 되어
저지하니 다행이긴 했으나, 황제의 인기는 바닥까지 추락했고 군대는 실망해 충성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판노니아와 모이시아의 총독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군을 규합해 아나톨리아까지 침공한 야만족
본거지 까지 공격했으며 다뉴브강을 건너온 침략자들은 쫓겨 났고, 포로로 끌려간
주민들을 구출하는 성과도 냈는데 승리를 거둔 아이밀리아누스는 제위 욕심이 있던 중이었습니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 대한 군심과 민심이 최악임을 명분과 기회로 이용할 생각이었으니
병사들이 승전후 칭송하자, 이때를 노려 조공 명목으로 거두어
들였던 황금을 군인들에게 은사금으로 나눠주자 군인들은 즉시 그를 황제로 추대합니다.
갈루스가 비겁하고 돈으로 평화를 사려고 한 황제라고 생각한 군대의 지지를 얻은뒤, 과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처럼 일부 병사들을 먼저 이탈리아로 출병시켰는데, 요르다네스는 아이밀리아누스가 국경이나 주민을 지킬
생각을 하지않고, 황제가 될 욕심에 로마로 가는 도중에 같은 로마인의 재물을 빼앗고 약탈했다고 비난합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방어선인 판노니아, 모이시아 군단 대부분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진군내내 약탈을 자행
했는데, 연공금이 끊긴 상황에서 로마 국경이 느슨해짐을 확인한 고트족은 제국을 침략했고 도나우 방어선을
쉽게 돌파해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부유한 도시 테살로니키를 약탈했고 수많은 로마인이 살육됩니다.
아이밀리아누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고트족을 비롯 게르만족들을 막던 정규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
한다는 소식을 접한 갈루스는 내전이 불가피함을 직시하고는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를 주축으로 버티면서 라인강 방면 로마군을 이끌던 발레리아누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발레리아누스는 수비대를 제외한 주력을 이끌고 남하함에도 속도를 내지 않았으니, 이들은
서둘러 달라는 갈루스의 요청에도 모든 준비를 다한후 서둘러 움직이는
모양새로 느리게 진군했고... 이들이 도착한 때는 갈루스 황제가 이미 패배한 뒤의 일이었습니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황제는 로마에 주둔중인 군대와 수도 경비대로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를 저지하려
했으니 양군은 스폴레토 들판에서 맞붙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부터
로마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하다는 판노니아, 모이시아 군단을 이끈 아이밀리아누스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253년 8월 갈루스 황제는 패전후 도망쳤고, 배신한 부하 손에 살해됐으며 수급은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전달
되었는데, 로마 황제중 재위 기간 제작된 실물 크기의 대형 청동 전신상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니, 나체
전신상은 예술사적으로도 중요한데 그리스 조각과 미술 조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아이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 제국 제32대 황제로 불과 3개월간 재임한 사람이니, 군인
황제 시대에 즉위한 황제 중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함께 미천한 가문 출신
황제인데 튀니지 제르바섬 태생의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이 일대의 원주민 출신 로마인입니다.
아이밀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이 트라키아와 동방에서 게르만족과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제국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하고 자신의 권력을 원로원에게 넘겨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원로원은 그런 그를 자신들의 장군이라고 여겨 황제로 선포해 줍니다.
그러나 황제가 된지 불과 3개월 만에 전임 황제 갈루스의 요청을 받았던 라인강 방면 로마군을
이끌고 달려온 발레리아누스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발레리아누스는 판노니아 일대에서 로마군 잔여 병력까지 소집해 대군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발레리아누스는 남하 중에 옛 동료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황제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이때 휘하 병사들에게서 황제로 추대되자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를
살해한 반역자라고 규정한뒤 국가의 적을 처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로마로 진군했습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아케치 미쓰히데군을 친 히데요시 처럼 예상 보다 빨리 남하하는 발레리아누스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맞섰지만 전력 차는 너무 컸으니.... 아이밀리아누스의 부하들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253년 9월 황제를‘피의 다리’에서 살해하고 수급을 발레리아누스에게 바칩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 33대 황제로 공화정 때부터 이어진 명문 귀족 리키니우스
일족이니, 황제가 된 후에는 방어선을 정비하고 장군감인 인재들을 발굴하고
양성하는데 힘썼으며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적들의 침략에 대비합니다.
58세 발레리아누스는 253년 10월 로마에서 원로원과 민중에게 지지를 받고 어려움 없이 황제로 인정
받았으며 장남 갈리에누스는 35살 나이에 공동황제가 됐는데, 첫 아내 에그나티아 마리아나
의 남자 형제 루키우스 롤리아누스는 수도 로마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수도 장관에 지명됩니다.
즉위 이후 어느정도 안정을 찾자 넓은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눠서 부자가 최대한 역량을
활용하려고 계획했으니....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과 공격으로
혼란해진 동부를 맡았고, 장남 갈리에누스에게는 서부 로마 전체의 총괄권을 부여합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의 침략으로 박살나고 있던 안티오키아
등 동방의 시리아 속주 내 주요도시 상황 해결에 매진했으니, 254년
서둘러 안티오키아에 도착해 동부에서 지내며 이 일대 안정화와 페르시아군 격퇴에 노력합니다.
갈리에누스는 254년 이래 갈리아 및 라인강 일대에서 알레만니족과 프랑크족을 상대로 정신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니.... 그러면서 도나우 강까지 넘기 시작한 마르코만니족과 알레만니족까지 상대해야 했습니다.
발레리아누스 역시 제국 동부에서 에메사의 성직자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리아 속주 내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면서 속주 안정화에 온 힘을
쏟았으니 원로원은 발레리아누스에게 ‘동방의 복구자’,‘인류의 복구자’라는 존칭을 부여합니다.
이듬해부터 발레리아누스는 260년 샤푸르 1세에게 생포될 때까지 몇년간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는데.... 257년 페르시아를 상대로 거둔
승리의 대가로 원로원으로 부터‘세계의 복구자’라는 거창한 칭호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발레리아누스가 후기 로마제국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포로가 됐다가 분사한 것이 조롱거리가 된
이유는, 황제가 된뒤 외세의 침입이 심각함을 밝히면서도 권력강화 수단의 한 방법으로
기독교 박해를 벌였기 때문이니 데키우스 황제처럼 제국 동방에서 지속적으로 기독교 박해를 합니다.
데키우스 보다 조직적이며 광범위하게 단행했으며, 정적들을 숙청할때도 이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니 그는 살아생전 부터 초기 기독교도 작가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고,
포로생활을 한뒤 죽은후 신이 분노해 수치스럽게 종말한 증거물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데키우스와 달리 로마 상류층 사회 내에서 기독교 근절을 위한 박해였는데
로마 엘리트 사이 기독교 확산을 인정하면서 유화책을 펼친 아들 갈리에누스와 달랐고,
데키우스 보다 관용이 적었으니 친족에게 조차 관용적이지 않았으며 정적들까지 이를 명분으로 숙청합니다.
발레리아누스는 동방에서 페르시아와 분투하고 있었는데 260년 초여름, 페르시아의 맹렬한
공격으로 전쟁을 재개했는데, 로마군에 전염병이 돌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병력도 격감했으며 또 에데사는 페르시아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으니 에데사 전투 입니다.
발레리아누스는 협상으로 군대를 빼내려고 하자 샤푸르 1세는 소수 수행원만 동반해 직접 대면하는걸 요구했는데
샤푸르 1세의 계략이었으니.... 소수의 수행원과 병사만 데리고 나섰다가 포로가 됐는데, 황제 외에도
근위대장, 고위관료, 원로원 의원까지 포함되었으며 풀려나지 못한채 고령 나이에 온갖 수모를 겪고 사망했습니다.
발레리아누스 생포후 39년 뒤의 299년에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수도 크테시폰을
일시 점령하였을때, 가혹행위가 있었을 경우 명분으로 삼기에 충분했을텐데 실제로 그러하지 않았으니,
사산 왕조에서도 포로가 된 로마 최고위층을 외교 문제 때문에 가혹행위를 해서 좋을 것은 없었을 것으로 봅니다.
아들 갈리에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 33대 황제로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 공동황제로 서방라인강
유역을 다스려 고트족들과 여러차례 싸웠고 258년에는 밀라노에서
알레만니 부족동맹을 물리쳤으며 일리리쿰에서 잉게누우스와 레갈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260년 6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왕 샤푸르 1세 포로가 되어 죽자 황제로 올랐지만 서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갈리아 제국이 세워졌으니 260년 갈리아군 지휘관 포스투무스는 침략자 알레만니
족을 물리치고 전리품을 빼앗았지만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에게 나눠주려 했습니다.
또 다른 지휘관 실바누스는 전리품을 주인에게 돌려주는게 맞다며 보내라고 요구하자 병사들은 분노해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옹립하니 그는 쾰른을 포위했고, 시민들은 몇주 후에
실바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넘겨주고 항복하니 포스투무스는 두 사람을 처형합니다.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 황제는 군대를 모집했지만
게르만족의 침략이 거셌기 때문에, 몇년간 참다가 265년에야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격해 포스투무스를 포위 공격했다가 전투 도중에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는 철수합니다.
상황이 악화되자 갈리에누스 황제는 갈리아 제국을 일단 용인하고 포스투무스가 이탈리아로 공격
하지 않고 갈리아에 쳐들어온 게르만족을 대신 격퇴하는 조건하에 갈리아 제국 황제를
칭하는 것을 묵인하니 포스투무스는 로마의 정치 제도를 본떠 제 나름대로의 제국을 운영합니다.
267년 동방 속주 사령관 오데나투스는 고트족과의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조카 마에오니우스에게
암살당하니, 아내 제노비아는 마에오니우스를 처형한뒤 동방의 권력을 이어받아
오데나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바발라투스를 후계자로 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실권을 잡습니다.
제노비아는 갈리에누스의 치세 때는 로마에 충성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사후인 270년에 페르시아의 침략
으로부터 동부 속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속주를 침공해 점령하고
바발라투스를 황제로 추대해 팔미라제국 건국을 선포하니 로마제국은 갈리아제국, 팔미라제국과 3등분 됩니다.
갈리에누스 황제와 반란 진압을 지휘했던 기병대 지휘관 아우레올루스가 268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진압에 나섰고 밀라노 근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포위했는데 승리를 앞둔 시점에 자기 장교들에게 살해당합니다.
크리스트교 확산 방지를 위해 그리스-로마 전통 종교와 신플라톤 철학을 적극 후원하면서 반감을 사고있던
갈리에누스가 도나우 방어선등 국방문제에 큰 힘을 쏟지 않는 것에 대해 그를 지지하던
일리리아계 장군들마저 불만을 품었고, 그 결과가 불신임의 의사표시인 암살이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268년에 그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는 알레만니족의 침입에 대항해 성공적으로
싸웠고 고트족과의 나이소스 전투에서 승리하였는데, 고트족에
대한 승리 덕분에 그는‘ 고트족의 정복자’ 라는 의미의 "고티쿠스" 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일리리아 출신이며 그후 게르만 반달족에 대한 군사 작전을 준비하다가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들을 무너뜨린 전염병으로 황제에 오른지 불과 2년만인 270년 7월에 병으로 죽습니다.
270년에 즉위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발칸 지방 출신으로 고티쿠스가 전염병으로 죽고
후임으로 퀸틸루스가 원로원에 의해 추대되자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원로원이 승인하고 퀸틸루스가 자결하자 단독 황제가 되었습니다.
반달족이 중부 이탈리아의 파노까지 쳐들어오자, 메타우로강 하구와 파비아에서
그들을 격파하여 전멸시켰고, 알레만니족의 침입과 고트족의 침입을
격퇴시키며 로마로 돌아와 통화 개혁을 실시하여 세스테르티우스 동화를 폐지합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페르시아의 중무장 창기병, 팔미라의 궁기병을 모방해 기병대를 강화
하고는.... 다누비우스 방위선을 강화한 후에 제노비아의 팔미라 제국과 서쪽
테트리쿠스의 갈리아 제국을 무너뜨렸으니 짧은 치세 동안에 로마 제국 재통일을 실현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시에 새 아우렐리아누스 방벽을 세운 것은 재통일된 제국이 옛날의 강성함을 잃어
버린 것을 뜻하는 것이며, 아우렐리아누스는 시리아 에메사의 태양신을 믿어
로마에 태양신의 신전을 세우고 황제는 신의 대리인이며 신에 의해 선택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75년 사산조 페르시아에 원정 중에 페린투스에서 비서 에로스와 그가 끌어들인 근위대 장교
들에게 암살당했으며..... 이후 로마는 엄청 혼란스럽다가 사후 5개월 만에야
원로원에 의해 늙은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가 황제로 즉위합니다.
타키투스 황제는 1년도 안되는 짧은 통치 기간에 고트족과 헤룰리족에 대항하여 군사작전을
벌이면서 고티쿠스 막시무스 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75세 고령으로
페르시아 전쟁으로 향하는 길에 276년 6월 티아나(Tyana, 카파도키아) 에서 열병이 걸려 죽습니다.
후임 플로리아누스(프로부스) 가 즉위했으니 로마 제국의 41대 황제로 능력있는 장군이었고
행정관 으로 자질도 갖추고 있었으니 6년간 로마 제국을 통치하며,
야만족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등 제국의 안정을 꾀하고 번영의 시기를 이루어냈습니다.
야만족들의 침략을 막아낸 후에, 프로부스는 몇몇 반란군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반란군들을
진압한후 자비와 관용을 보여주며 포용하려 하였고 원로원의 권위도
존중하는 한편,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해 황권을 강화하는등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프로부스는 게르만족들을 물리친후, 라인강과 다뉴브강 사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벽을 재건함
으로써 사람들을 다시 국경지대로 이주시키려 하였고, 제국의 방비를 튼튼히 했으니
정치적, 군사적 명망은 높아졌으나 페르시아와 전쟁을 준비하는 도중 카루스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282년에 즉위한 카루스 황제는 로마제국 42대 황제로 즉위하였을 때 이미 60세라는 고령이였으며,
짧은 재위기간 동안 그는 도나우강에서 게르만 족과 사르마니아인들과 싸우며 보냈습니다.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는데, 아마도 낙뢰를 맞아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릅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카페 지기 작성시간 26.06.17 new
겸손[謙遜]없는 자부심[自負心]은 자만[自慢]이 되고
겸손[謙遜]없는 용기[勇氣]는 무모[無謀]함이 되며
겸손[謙遜]없는 지식[知識]은 아집[我執]이 됩니다.
겸손[謙遜]없는 비지니스는 고객[顧客]을 무시 하게 됩니다.
겸손[謙遜]없는 승리[勝利]는 오만[傲慢]이 되고 맙니다.
겸손[謙遜]이라는 비움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데
자만[自慢], 무모[無謀],
아집[我執], 무시[無視], 오만[傲慢]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더 담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 편안한 하루길 보내세요.!!.
🎖️🏅🥉🥈🥇 -
답댓글 작성자가라치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7 new
저 번성하던 로마 제국은
이제 황제가 6번이나 바뀌는
대 혼란, 내란의 시대로 접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