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브리치에 따르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질료와 작가 그리고 관객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놀라거나 실망할 것은 없다.
예술을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현대미술에서 이 세 가지 요소는 전혀 유기성이 없는 독립된 개체일수도 있는 반면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일반적인 조형작품의 이용은 전술한 바와 같이 장식, 과시, 종교관 및 정서표현, 감상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는 작품과 관객이 일정한 통로를 통해 조우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살펴보아야 할 점은 현대 이전의 작가가 고양된 의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었느냐는 점이다. 그보다는 의뢰인의 정서를 파악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노력이 요구되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미켈란젤로 정도의 작가의 경우 의뢰인이 그의 특이한 의식표현방식에 압도당한 징후가 역력하다. 그러나 현대이전 모든 작품을 통해 작가의 순전한 의식세계를 엿보려는 기도는 내게 부질없어 보인다.
다음으로 관객의 의식세계이다.
대중교육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극히 제한된 부류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부실하거나 충분치 못한 정보밖에는 접할 수 없었던 대다수의 대중에게 고양된 작가의식 같은 것은 아예 관심 밖의 대상일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장 표현된 신화나 장엄미로 감싸여진 종교작품들이 그들이 제공받을 수 있었던 작품의 대부분 이었으며 이러한 관계에서 작가, 작품 및 관객은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일방적인 통로를 통해 작품은 관객 위에 군림하거나 교화하려는 오만한 모습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의식의 증대와 대중교육의 확대는 예술작품이 존재하는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제 대중은 더 이상 우매하지 않으며 일방적 통로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동등한 의식수준에서의 조우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당황한 일군의 작가들은 그의 작품에 무수한 함정을 파 놓음으로서 대중의 손쉬운 접근을 방해하려는 시도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간 지속되었던 허구적 위치를 쉽게 포기하기도 허약한 상상력을 노출하기도 싫은 몸부림 일 것이다.
반면 일련의 작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직관하고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작가와 작품, 관객은 분명 독립된 개체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놓여진 관계를 공감, 혹은 정서 전달이라는 고전적인 등식에서 벗어나 바라본다면 새로운 유기적 관계가 형성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점이 곰브리치가 바라 본 세계가 아닌가 싶다.
현대 예술의 한 특징은, 제작의도가 정의 내림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사유한다.
그러나 사유의 결과를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작가와 작품의 관계가 해체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이다. 이제 까지 하나의 통로로 연결 돼있던 작가, 작품, 관객의 관계가 훨씬 다양한 통로로 다시 열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이번의 통로에서는 교감이나 커뮤니케이션 같은 문제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일례로 무어의 작품을 들여다보며 무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수고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작가는 사유의 결과를 최적의 질료 -비물질적 요소를 포함한-를 조작하여 표현하며 관객은 표현된 작품을 통하여 그들 스스로 상상의 눈을 뜨면 족한 것이다.
작가의 사유와 관객의 수용 사이에는 일치점이 있을 수도 있으며 전혀 다를 수도 있다. 하나의 작품이 수많은 상상력의 촉발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르니카를 감상하며 독일공군의 야만적 공습과 그로 인한 주민의 비통함을 느껴야 한다는 강제적 해석만 없다면 나는 100번이라도 더 게르니카 앞에 서서 상상의 나래를 펼 용의가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질료의 선택은 이전의 기능보다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부동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는 최적 질료가 존재 할 수 있으나 가변적 사유의 표현에서는 질료간의 유기성 ,긴장 등이 훨씬 강조된다..
따라서 현대의 작가는 전통적 재료뿐 아니라 보다 적절한 표현을 위해 식물학자가 표본을 채집하듯 새로운 질료의 발견 및 활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성과 물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수많은 관계에 집중해야 하며 보다 창의적이고 숭고한 인간정신의 표현을 위해 섬세하게 그것들을 조율해야만 한다.
"작가 사유의 작품을 통한 관객에게의 일방적 전달"이라는 구습에서 빠져 나오지 못 한다면 더 이상 예술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