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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을이 오는 길목, 와인, 삼겹살,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

작성자루시|작성시간20.09.05|조회수92 목록 댓글 1

양쪽 엄지 손가락 하단부 안쪽에 물집이 생겼다가 터져 쓸립니다. 아프네요. 젠장.

쇠스랑으로 잔디밭을 갈아버리는 일을 해서 그렇습니다. 너무 엉망이 된 잔디밭을 어떻게 새로 깔아 보겠다고 잔디 씨앗과 흙을 사 왔는데, 먼저 잔디가 나간 부분을 완전히 쇠스랑으로 갈아 엎어야 하는 게 순서여서 땡볕에 밀짚 모자를 쓰고 열심히 쇠스랑질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호구(엄지손가락과 손이 만나는 부분) 약간 윗쪽에 이렇게 물집이 잡히더니 그냥 껍질이 벗겨져 버린 거죠. 바보, 장갑이라도 끼고 일을 했어야 하는데.

다른 집들과 비교가 너무 돼 결국은 손에 안 익은 쇠스랑질, 삽질을 열심히 해 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집으로 이사와 크게 잔디를 손 본 적이 없으니 언젠가는 한 번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싶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밭일 때문에 지금은 손이 이렇게 화닥거리네요.

쉬는 날, 아내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 펜스가 낡아 새로 해야 하는데, 누군가가 집에 올 테니 꼼짝말고 집에 붙어 있다가 견적을 내 보라는 것, 그리고 울타리 부서져 나간 것 고치라는 것과 싸리문 걸개를 새로 달아 놓으라는 것. 뭐 이런 일들을 즐거워 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영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어서 낑낑거리며 열심히 힘만 쓰다가 부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경미한)을 입고 그 핑계로 잠깐 뜨거운 햇볕을 피해 시원한 집안으로 다시 들어온 참입니다.

오늘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십니다. 아내가 일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차(?) 전화를 하셨습니다. 손가락 까졌다고 징징댔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저녁엔 삼겹살을 구워먹자 하십니다. 아, 한국인의 소울 푸드 삼겹살. 지난 달에 한 번 먹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삼겹살을 먹자고 하는 걸 보니 이제 아이들이 학교 근처로 이사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다시 자기들의 생활을 찾아 나가기 전, 힘을 채워주기 위한 한 끼의 화려한 소울 푸드 만찬이 되겠지요. 아직도 고기를 먹는다 하면 스테이크 아니면 삼겹살을 생각하는 아이들과, 오늘은 모처럼 술 한 잔 해야겠지요. 코로나는 아이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 놓았을 터입니다.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조금은 미친듯 해도 괜찮은 대학 생활이라는 것이 완전히 달라졌으니까요. 물론 아내와 내 삶도 만만찮게 바뀌었지만 그나마 우리는 늘 그렇듯 일 하고 집에서 시간 보내는 패턴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었지요. 그리고 지금은 퇴근길에 늘 했던 운동도 달라진 방식이긴 하지만 다시 하고 있으니 80% 이상 원래 살던 방식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가고 싶은 여행 못 가는 것만 빼고.

아무튼, 삼겹살 파티는 아내가 돌아오면 시작할 터입니다. 얼마 전에도 삼겹살을 구워먹었는데, 아무튼 동네 코스트코엔 때때로, 아내 표현에 의하면 "도저히 구매 욕망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삼겹살이 나올 때가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인들과 멕시칸들도 엄청 사 가는 한국 스타일의 삼겹살... 차이나타운이 가까운 다운타운 코스트코에선 동파육 해먹기 좋은 두껍게 썬 삼겹살이 나오고, 한국 사람이 많이 몰려사는 우리 동네에는 우리 식으로 적당하게 얇게 썬 삼겹살을 내 놓는 코스트코의 상술엔 못 당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래 전부터 와인은 집에 쌓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와이너리들이 문을 닫았지만 아직도 고군분투하는 곳들이 꽤 됩니다. 나파와 소노마는 몇년 전부터 기후변화의 타격을 입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와인을 생산해 내는 곳이라고 스스로 자부해 왔지만, 큰 지진이 몇 번 덮쳤고,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건조한 기후와 강풍, 그리고 이상한 마른 벼락이 만나며 생기는 산불이었습니다. 이젠 거의 매년 화마의 피해를 입고 있는 나파와 소노마 일대는 원래 관광 산업도 당연히 식도락 산업과 맞물려 늘 호황을 누려 왔지만, 자연재해와 맞물린 코로나 19의 내습엔 견디기 힘들었을 터입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 포도주가 잘 되는 지역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될 만큼 라티노 노동자들이 넘쳐났습니다. 좋은 포도주는 맥주로부터 나온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포도를 가꾸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건 대부분 멕시코 출신 노동자들이고, 포도원 주인은 이들을 격려하고자 코로나, 테카테, 모델로 같은 멕시코 맥주를, 아니면 버드 라이트 같은 맥주를 쟁여놓았다가 새참 때 내놓곤 했고, 이들은 매운 고추 잔뜩 들어간 자기네들의 음식에 딱 맞는 이런 맥주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키며 그 술기운에 다시 캘리포니아의 땡볕 아래로 나가 포도밭을 가꿨습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코로나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계절노동자들에게 좋은 주거 환경이 제공되는 걸 기대하긴 힘들겠지요. 이들은 농사철이면 어떻게든 국경을 넘었고, 농사철이 지나면 다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그냥 눌러 앉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고 살긴 어려웠지요. 코로나19 가 확산됐을 때, 가장 먼저 클러스터가 된 이들 중 하나가 이들 농장노동자 집단이었습니다. 농가에 지어진 외딴 집에 스무 명, 서른 명, 혹은 그 이상이 몰려 살던 이들 농장노동자들이 코로나에 걸려 치료도 못 받고 죽어가자, 와인 산업도 꺾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2020) 빈티지의 와인은 아마 사상 최악이 될 것이란 게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입니다.

아무튼, 오늘 삼겹살에 맞출 와인을 그런 저런 이유로 해서 캘리포니아 산을 골랐습니다. 아내가 고른 와인. 술꾼 남편과 오랫동안 살아 온 아내는 조금씩 와인의 맛을 알았고, 이제 상당한 감식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노스 코스트, 즉 샌프란시스코 북쪽 멘도치노 카운티 바닷가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곳은 사실 그 안에 나파와 소노마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지요.

그곳에서 30년 이상 일가족이 포도원과 와이너리를 운영해 오던 대니얼 콘 Daniel Cohn 은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이너리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이 와이너리를 벨라코사 Bellacosa 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이태리말로 '아름다운 것'을 뜻하는 이 와인은 상당히 무거우면서도 너무 둔중하지 않고 끊임없이 향이 올라오는 좋은 와인이었는데, 아무튼 이 빈티지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곳에서 상당히 큰 세일을 쳤고, 아내가 이 와인 6병을 사 와서 지금껏 잘 마셨지요.

와인은 가족과 친구들의 어울림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이 판데믹의 세상은 그런 어울림조차 어렵게 합니다. 가족간에도 서로가 '감염자'인지를 조심하는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 세상은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아내는 뒷마당에 자란 포도를 따 오라고 제게 시켰습니다. 이제 수확의 시간들이 다가옵니다. 곧 한국은 추석이겠군요. 원래 민족의 대이동이 있어야 하는 그 때, 아마 올해는 그런 대이동을 했다간 큰일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도 곧 레이버데이 연휴가 시작됩니다. 겁 없이 다시 움직이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겁내 하는 이들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삼겹살이 익습니다. 여기에 와인 곁들이며 9월 초, 천천히 가을이 오는 저녁을 즐기다가 내일은 다시 씩씩하게 일 나가야지요. 아... 이거 먹고 다시 마당에 나가서 일 해야 한다고, 마눌님께서 현실을 다시 파악하게 만들어 주시네요.

애궁.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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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와인리더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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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덕수 | 작성시간 20.09.05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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