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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알래스카 크루즈 후기 - 음식과 와인에 관한 단상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02.07|조회수341 목록 댓글 0




파티의 기본은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풍성한 음식과 마실 것, 그리고 술이 없는 크루즈 여행은 상상이 안 되지요. 그러나 크루즈 배 안에서의 술값은 꽤 나갑니다. 맥주 한 병 사 마시려면 작은 병에 4-5달러는 줘야 하고, 칵테일 하나에 봉사료 포함 10달러가 넘습니다. 물론 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에게도 이른바 '옵션'은 있습니다. 주류를 아예 처음부터 250달러짜리 '무제한 이용권'을 사면 되는 건데, 그거 채우겠다고 매일장취하는 것은 바보짓이고, 자기가 마실 술을 조금 가지고 들어가면 됩니다.

 

크루즈 여행에서 보통 와인은 1인 1병만 지참을 허용한다는 선사 측의 지침이 있지만, 지난번 멕시코 크루즈 여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단 저는 그걸 무시하고 와인을 챙겨 넣었습니다만, 오히려 이번엔 가져갔던 와인 한 병을 도로 갖고 내렸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단 함께 동행하신 이모와 이모부께서 저처럼 술에 목맨 분들이 아닌데다, 하루는 이모부님께서 제가 수고한다며 배 안에서 파는 와인 한 병을 식사때 사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하루는 바깥에서 맥주를 너무 마시고 들어왔고, 7박8일의 크루즈 기간동안 두 번은 아예 정찬 식당에 내려가질 않았습니다. 기항지 관광이 늦어져 정해진 정찬 식사 시간이 지나 아예 배 14층에 있는 부페에 가서 먹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만난 한인 가족 분들은 아예 소주까지 갖고 타셨더군요. 거동하는 식구가 스물 여덟 분이었으니, 반입양도 꽤 됐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크루즈 식당의 부페에서 소주에 얼굴이 불콰해지신 분들 옆에는 진로 소주 병이... 재미있더군요. 어쨌든, 크루즈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가 '먹는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분명합니다. 

 

이곳의 부페는 오전 5시부터 열어 자정까지 문을 열고, 중간중간 브레이크 타임을 두는 형식으로 운영됐습니다. 보통 아침 5-6시 사이엔 컨티넨탈 브렉퍼스트 형태로 운영되고, 오전 6시가 되어야 아침 부페를 시작한다고는 해 놓았지만,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밥을 먹으러 간 저는 받을 서브 다 받고, 차와 커피도 그들이 직접 서브해주는 경우가 더 많아 솔직히 많이 미안했습니다. 접시에 음식을 채우고  아무 테이블에나 가서 앉으면 서버들이 와서 커피와 쥬스, 혹은 레모네이드를 따라놓고 가고, 기호가 뭔지를 물어 옵니다. 커피를 제공하는 머신엔 커피와 디카페인 커피, 아이스티, 뜨거운 물이 제공되는데, 이중 뜨거운 물은 당연히 차를 마시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트와이닝이나 비질로우의 티백이 무제한으로 제공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엔 미리 썰어놓은 레몬을 잔뜩 갖다 놓아서, 차에 레몬을 넣어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배려했습니다. 

 

단, 콜라, 사이다 등의 청량음료는 캔당 2달러씩을 받았고, 미리 '음료수 옵션'을 들어놓으면 소다를 마음껏 마실 수 있지만, 저는 이 옵션도 들지 않았고 청량음료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전혀 마시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크루 수정씨를 알고 나서는 수정씨가 제게 혹시 청량음료를 마시고 싶지 않냐고, 본인이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여 제게 물어볼 때가 있었고, 그때마다 저는 감사히 이것들을 받아 즐겼습니다. 다시한번 땡큐 수정씨. 

 

와인을 가져가면 정찬 식당에서는 병당 15달러라는 만만치 않은 코키지를 무는데(카니발 크루즈에서는 병당 10달러 물었었는데...) 수정씨는 제게 미리 와인을 따서, 약간 비워서 '부페 식당으로 가져올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와인 잔을 갖다 주겠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저는 그 코키지를 물지 않고 부페 식당의 특히 와인과 어울리는 요리들을 담아 와서 즐겼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먹는 즐거움, 마시는 즐거움'은 크루즈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겠지만, 양조절 제대로 못하면 살 쪄서 돌아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 먹는 즐거움은 죄스럽기도 합니다. 보통 크루즈 배 한 척에서 먹고 남아 버리는 잔반이 갖는 칼로리의 양은 최빈국 어린이들의 영양실조를 한번에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미안함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여행의 스타일이 바로 이 크루즈 트립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해도, 이 먹는 즐거움만큼은 어쩔 수 없는 즐거움이긴 합니다. 오죽하면 '먹는 게 남는 것' 이라던지, '먹고 죽은 귀신은 땟깔도 좋다'는 말이 우리 사이에 회자되고 있을까요. 인류가 역사에서 비교적 풍족하게 먹은 역사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전 세계가 다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지만... 우리가 성인병을 걱정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과한 칼로리 섭취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몸 안의 DNA 엔 먹을 것을 보면 꼭 비축해 놓거나 많이 먹는 습관이 배어 있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있기에 식탐을 추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재편되는 음식 문화들이 있었고, 이른바 Folks 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줄 수는 있어도 자기들이 그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었을 겁니다. 크루즈 여행은 그 오랜동안의 박탈감을 채워주는 스타일의 여행. 따라서 식탐은 본능처럼 따라붙습니다. 

 

매일 매일 제공되는 신선한 과일, 이름도 못 들어본 산해진미... 뭐 이런 식으로 축약하면 대략 이야기가 되겠지만, 정찬은 비교적 '트래디셔널' 한 코스 요리가 제공되는 것이고, 부페는 조금씩 메뉴가 바뀌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거의 같습니다. 한편 이런 쪽에조차 식상한 사람들을 위해 이 크루즈 배 안에서는 25달러의 커버 차지를 따로 받는 스테이크 하우스가 별도로 있기도 합니다. 과거엔 아마 이 정도의 구별은 두지 않았을테지만, 시끄러운 거 싫어하고 비교적 입맛이 까다롭고,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넘쳐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공간을 배 안에서도 따로 쓰는 셈입니다. 

 

이런 저런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진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만, 저는 지금부터 늘 그랬듯, 크루즈 기간동안 즐긴 와인들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정찬 식당인 그랜드 프린세스의 '다 빈치' 레스토랑에는 저와 이모, 그리고 이모부만 앉게 배정이 된 테이블이 있었고, 우리는 며칠 동안 여기서 저녁과 와인을 즐겼습니다. 비교적 많은 식구가 같이 움직일 때는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좋고, 그렇지 않다면 자유롭게 식사시간을 선택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아무튼 기대가 많았던 첫날, 제가 선택한 와인은 캘리포니아의 강자 '스털링' 이었습니다. 아마 캘리포니아 와인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스털링 와인에 대해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화려합니다. 옆 테이블의 정장을 차려 입은 백인 아주머니가 우리 와인을 보고서 남편에게 "나도 저거 좋아해!"라고 외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을 담은 듯 화려하게 퍼지면서도 미끄럽다고 느껴질 정도의 세련된 태닌, 그리고 적절한 산도가 잘 어울린 와인입니다. 당연히 고기에 잘 가겠지요. 제가 이날 선택한 요리는 비프 룰라덴. 독일 식 스테이크인데, 아주 얇게, 그리고 넓게 저민 고기를 약간 양념하여 이를 돌돌 말아 구운 요리입니다. 뭐, 사실 이런 구분이 별로 의미가 없었던 것이, 이모와 이모부가 입이 짧으셔서, 음식을 버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 제가 '도와 드리느라' 이것저것 다 먹어 버리는 바람에 ^^; 

 

둘째날은 이른바 정장 입는 날, 포멀 다이닝 나잇이었는데 이때 잡은 와인은 왈라왈라의 명가 라이닝거의 시라. 워싱턴주의 시라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콜럼비아 와이너리가 이 품종을 길러 히트시키면서부터였습니다. 그때까지 캘리포니아의 전유물로만 알았던 시라가 워싱턴주에서도 충분히 아름답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와인메이커 데이빗 레이크의 역작이었지요. 고인이 된 그는 워싱턴주 시라에 있어서는 거의 선구자의 역할을 다 한 셈입니다. 라이닝거 역시 다양한 와인을 만들지만, 시라는 정말 쳐 주고 싶은 명작입니다. 몇년 전에 이 와인을 '비노 베리테'에서 사 두었는데, 여전히 '무섭도록' 강건합니다. 

 

그 다음 날엔 생선 요리가 주로 나왔기에, 이번엔 배 안에서 파는 호그의 리즐링을 시켰습니다. 솔직히 육지에서 마시면 7달러가 채 안되는 가격에 마실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이게 병당 24달러에 팔리고 있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와인이 갖는 포텐셜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주저없이, 망설이지 않고 시켰습니다. 워싱턴주와 리즐링은 거의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지요. 리즐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독일 다음으로 리즐링 포도가 가장 많이 자라는 곳이 워싱턴주이고, 그만큼 다양한 리즐링을 생산합니다. 가격도 저렴하면서 최상의 품질의 리즐링을 만들어 내는 곳. 그리고 여기서 가장 '컨수머 프렌들리'한 와이너리인 곳이 호그입니다. 칵테일 새우와 해물 샐러드, 그리고 무지개 송어와의 조합은 일품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은 배 바깥에서 맥주 엄청 마시고 온 탓에 와인은 패스. 그리고 그 다음날엔 바에서 마티니를 시켜 마셨는데, 왜 제임스 본드가 그 유명한 대사, "마티니, 흔들지 말고, 저어서." 라고 말했는지를 온 몸으로 실감했습니다. 바텐더는 봄베이 사파이어 마티니를 시킨 제 앞에서 셰이커에 '갈은 얼음을 넣고', 버무스를 '한 잔 가득 따라서 넣고' 흔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마티니에 얼음이라니! 저는 제빨리 제지하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빨랐습니다. 이미 제 앞엔 시원해 보이는 마티니 -_-; 가 따라졌고, 저는 그걸 홀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내가 마티니 마시고 싶다고 했지 소주 마시고 싶다고 했냐.... 결국 저는 배의 면세점에서 봄베이 사파이어 한 병을 샀고, 그것은 퇴선하기 전날 제 선실 앞 문에 배달되어 놓여졌고, 제가 우리집 오자마자 처음 한 짓이 스윗 마티니를 제 식으로 만들어 홀짝거리는 거였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_-; 

 

어쨌든, 배가 유진에 기항한 후 알래스카 맥주 공장 견학으로 이어져 열심히 맥주를 마시고 돌아온 저는 그날 저녁은 그냥 건너뛰고 잤고, 그 다음날은 크루 수정 양의 충고에 따라 캐나다 와인인 엔카밉의 메리티지를 따서 콜크를 뽑아 뒤집어 꽂아 부페로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이 또한 강건한 와인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이 진득함, 캐시스에 녹아 든 시럽 같은... 능히 앞으로도 10년은 너끈히 버틸 수 있는 와인이었는데... 6, 7년 보관했다고 해서 와인이 사그라들지 않는 것들이 간혹가다가 이리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키지 차지 프리. 각종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마신 와인은 앞으로 캐나다 와인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 것인가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해당 와이너리나 와인들은 제 블로그에서 적어도 한번씩은 이야기가 됐을 터. 그리고 스털링 같은 경우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와인이니만큼 특별히 설명 붙이진 않으렵니다. 그저 사진으로 감상하셔도 될 터. 하하. 

 

특히, 배 안에서 파는 와인중엔 우리가 흔히 '명품'이라고 하는 와인들도 꽤 되고, 그것들의 가격은 오히려 괜찮다고 여겨질 때가 많았는데, 그것은 아마 비싼 와인들이 면세 혜택을 받으며 배 안으로 반입되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번엔 예산 관계로도 그렇고, 또 굳이 와인을 '골라' 가지고 들어갔는데 괜히 돈 쓰는 것도 그렇게 느껴졌고. 어쨌든 가져간 와인 중 한 병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목숨을 잃을 뻔한 왈라왈라의 명품 '아베하'는 제 가장 친한 벗님께서 한국에서 오실 때 목숨을 잃을 운명이 됐으니, 그때까지 잘 보관하여 언젠가는 가치있게 사람의 따뜻한 가슴을 무덤으로 삼아 가실 수 있도록 배려할 예정입니다. 

 

크루즈 배엔 이밖에도 햄버거와 핫독 스탠드, 피짜를 만들어 주는 피쩨리아도 있습니다. 이건 크루즈 배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음식들은 당연히 '탄산 음료'가 곁들여져야 제 맛이며, 크루즈 배 안에선 탄산 음료를 공짜로 주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손님들의 입맛도 배려할 겸, 그리고 여기에 매상도 올릴 겸... 이런 패스트 푸드를 공짜로 주는 것이지요. 퀄러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와인이 주는 이 만족감과 취기는 죄책감을 상쇄하게는 만들지만, 그것은 잠깐 동안의 망각이지 완전한 심연으로 이 죄책감을 밀어넣을 수는 없는 듯 합니다. 지구 위의 이 제로섬 게임에서 내가 취해야 할 입장은 무엇인가, 잠깐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이 화려한 음식들과 함께 즐기는 와인이 주는 이 만족감과 어떤 알 수 없는 해방감 같은 것의 크기도 결코 작지 않기에.... 세상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비교적 공평하게 지구가 베풀어주는 산물들을 나눠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들이 항해 내내 떠나질 않았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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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Seatt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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