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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족, 그 고마운 이름과 함께 있는 때를 빛내주는 로컬 와인들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02.07|조회수117 목록 댓글 0


부모님 댁에 와서 열 수 있는 창문들을 모두 열어놓습니다. 화요일 오후,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전혀 없을 것 같았던 바람이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어느 집에서인가 울리는 풍경소리. 아, 그리고 보니 우리 집에도 예쁜 풍경이 하나 있는데. 벌새들의 모습을 청동으로 조각해 놓아 울리는 풍경. 어떻게 된 거지? 하고 나가보니 역시나, 줄이 엉켜 있습니다. 그 줄을 풀어내는 게 쉬운 작업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조심조심 그 풍경줄을 풀어 놓았습니다. 짜라랑. 예쁜 소리가 울립니다.

 

방으로 들어왔더니 풍경 소리가 다시 그칩니다. 잠시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바깥 공기가 살랑살랑 불어들어오는 아버지 방에 앉아 이렇게 글을 두드립니다. 뜨겁게 홍삼 차 한잔 타 놓고서. 그러는 사이에 다시 짤랑 짤랑 풍경소리가 울립니다. 문득 이 차를 들고 뒷마당에 나가 앉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글 다 쓰거든 그리 할 겁니다. 

 

뭐라도 좋으니,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싶어. 

 

냉동 건조 커피, 소위 말하는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시기엔 입맛의 허영이 이를 원치 않지만, 홍삼차 타느라 끓여놓은 물이 남았기에 그냥 커피를 몇 스푼 부어넣고 물만 따라 쌉싸름한 커피를 마십니다. 이 오후의 나른함이 나를 밑도 끝도 없는 졸음의 나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방치하기에 이 오후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아침엔 우리 집에서 정원일을 했고, 오후엔 어머니 집에서 이렇게 정원 일을 합니다. 휴가라는 시간은 원래 생각 없이 푹 쉬는 시간이면 좋겠지만, 사내 애 둘을 기르는 집에서, 그리고 부모님이 그냥 관리하시기엔 꽤나 넓은 정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제겐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느릿느릿 흐르는 시간을 마음껏 즐길 여유가 있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삶의 활력소입니다. 

 

이런 시간에 와인이 섞이면 이건 뭔가 휴가를 마약같은 것으로 만듭니다. 거의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 혼자 있기보다는 이렇게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가족이 함께 하는 작은 파티를 가진다는 것은 괜찮은 일입니다. 3대가 이 예쁜 정원에서 가끔씩 갖는 특별한 시간들은 아마 가족 구성원들에겐 뭔가 기억할 거리를, 그리고 아빠에겐 할 일을, 그리고 아들에겐... 재롱부릴 자리를 마련해 줄 겁니다. 덩치만 산만하게 컸지, 아직은 아이임이 틀림없는, 그런 큰 아들은 아빠에게 와인 맛을 보게 해 달라고 조르고, 아빠는 아들에게 "네가 마실 잔도 가져와라"고 말합니다. 

"아빠, 정말요?" 

"그래, 아빠가 한 잔 따라줄게."  

이제 조금 있으면 하이스쿨 서퍼모어가 되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정말 고1이 되는 아들이 아빠가 술을 주겠다니 조금은 흥분하고 기뻐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런 손자를 기특하다는 듯이 쳐다보시지만, 이내 어머니께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쟤... 저렇게 마셔도 되냐?" 엄마, 걱정마세요. 누구 아들인데. 

 

이런 날은 당연히 서북미 와인 엑스퍼트라고 스스로를 자부하는 아빠가 골라온 와인을 서브해야 합니다. 실베이라의 시라, 이 와이너리의 오너인 개리는 제 페친입니다. 실력있는 와인메이커이며, 또한 실력있는 건축 전문인이기도 합니다. 안정된 건축 설계 시공사로서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와이너리를 만들고,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자기의 열정을 쫓아가느냐의 기로에서 과감히 후자를 선택한 친구입니다. 그의 와인엔 그런 열정이 녹아들은 것 같습니다. 이 와인을 그에게서 받아들었을 때 무지 기뻐했었는데 - 제 블로그를 보여주며 그에게 제가 느꼈던 그의 다른 와인들에 대한 평가를 해 주자, 개리는 과감히 이 와인과 비오니에 한 병을 제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 역시 기쁜 자리에서 따게 되었습니다. 아내도 무척 좋아합니다. 적당히 무겁고, 그 안에 꽤나 튼실한 산도가 받쳐줍니다. 등심 스테이크와 시라는 원래 천상의 궁합. 

 

샤토 생 미셸의 인디언 웰스 시리즈는 원래 기본기가 탄탄한 와인입니다. 아마 이들도 이른바 '왈라왈라 블렌딩'에 꽂힌 듯, 최근 재밌는 레드 와인을 출시했습니다. 가격도 괜찮았구요. 이런 식의 블렌딩은 남부 론 스타일을 땄지만, 사실 멀로가 가장 많이 들어간 것으로 봐서는 '재배하다 남은 포도를 몽땅 털어 넣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와인의 가장 아름다운 면이 이런 점이죠. 실험 정신이 투철하다는 것. 60%의 멀로, 28%의 시라, 카버네 소비뇽 6%, 그레나슈 3%, 말벡 2%, 그리고 생소와 무베드라라는, 매우 남프랑스적인 포도 두 가지를 각각 0.5% 씩. 대충 봐도 뭔가 만들려다가 남은 포도종류를 싹 그러모은 건 틀림없어 보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들이 가진 기본기는 어디 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를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복의 요소가 될 겁니다. 미각이 호사하는 것보다는 이 마음의 호사가 더 감사한 일입니다.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가족이 주는 안온함 속에서 이렇게 한때를 평화롭고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것. 제가 누리고 있는 호사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이 마음의 호사라고 생각합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믿고 기대고 의지하고 더불어 기뻐하고 즐길 수 있는 것.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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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Seatt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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