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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결혼 기념일 핑계로 잡은 네 병의 와인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02.20|조회수248 목록 댓글 0

 

 

주말 동안에 와인 몇 병 했습니다. 당연히 결혼기념일도 겹쳤고, 또 손님 초대할 일도 있어서... 이만큼 그냥 맘 푹 놓고 와인을 마신 것도 꽤 오랫만이었는데, 식사로 스테이크를 준비했기에 화이트가 배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뒷마당의 포도가 천천히 익어가는 계절입니다.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데 포도가 이렇게 자기 혼자 자라는 것이 기특할 정도입니다. 늘 그렇듯 시작은 '불질'부터입니다. 시간, 그리고 기다림의 센스가 필요합니다. 뒷마당 나무 테이블 위에 재료들을 갖다놓고, 랩탑(노트북)을 펼쳐 놓습니다. 이것저것 들여다보며 불이 완벽해지길 기다립니다.

 

자, 이제 불이 완전히 잡히면 일단은 야채를 굽습니다. 제일 좋은 건 빨간 양파와 버섯. 항상 사이드로 놓고 먹는 야채입니다. 여기다가 원래 토마토도 좀 구우면 좋은데, 준비를 못했네요. 구운 야채 안주를 준비하는 이유는 피노느와 때문입니다. 고기와도 잘 어울릴 수 있지만 피노에 구운 야채는 꽤 좋은 궁합이거든요. 버섯에 국물이 살짝 고일때까지만 익히면 됩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타니까. 양파는 구우면 단 맛이 일품입니다. 어떤 와인이든 야채 안주로만 먹어야 한다면 저는 구운 양파와 구운 토마토를 선택할 겁니다. 여기에 쥬키니(우리나라 애호박) 같은 걸 구워먹으면, 굳이 고기 없이도 레드와인과 맞출 수 있는 음식이 됩니다. 구운 버섯이야말로 피노 느와와는 좋은 짝입니다. 피노느와 특유의 흙내음과 버섯의 흙내음이 어울리는 거지요.

 

그리고 나서 고기를 굽습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정말 불을 가늠하는 것과 뒤집어주는 타이밍, 그리고 뚜껑을 덮어주는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기는 간단하게 소금과 후추를 뿌려주고, 여기에 우스터 소스를 조금 뿌려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 놔두는 것도 빼먹을 수 없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1인치 ? 컷이라고 불리우는 스타일의 고기여서, 어느 정도로 구울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일단은 겉을 조금 태우는 '시어링'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고기 양쪽을 익혀 육즙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해 주는 작업을 해 놓은 다음에 그릴 뚜껑을 닫고, 가끔 열어서 고기 상태를 확인하고 뒤집어주어야 합니다.

 

손님도 오시고, 준비된 음식들이 차려집니다. 조셉 패이블리의 부르고뉴 피노 느와. 과거엔 굳이 부르고뉴 와인에 친절하게도 저렇게 '피노 느와'라는 말이 따로 붙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최근 프랑스 와인엔 남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저렇게 품종을 표시해주는 관행이 생겼습니다. 미국으로의 수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생긴 관행이죠. 그런데... 이건 완전히 애시드 폭탄. 산도가 너무 강합니다. 너무 일찍 딴 것일까요? 이정도의 산도면 10년은 기본적으로 버티겠다 싶습니다. 아니면 스테이크보다는 어패류 요리에 맞췄으면 오히려 좋았을 거라는 느낌이 듭니다. 산도가 어찌나 강한지 버섯과도 잘 안 어울려 줍니다. 오랫만에, 실패!

 

그다음에 딴 수버레인. 캘리포니아 카버네 소비뇽입니다. 원래 노스 코스트 지역은 태평양과 가까와서 날씨가 상대적으로 서늘하고, 그래서 피노 느와 재배에 적합한 지역입니다. 지난해 가족들이 크루즈 여행을 가느라 캘리포니아 롱비치까지 중간에 모텔에서 묵은 시간 빼고 꼬박 스물 여섯 시간을 운전해서 내려갔는데, 올라올 때는 이 노스 코스트 지역도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디가나 펼쳐져 있는 인상적인 포도밭들, 그리고 꼬불꼬불한 길들이 기억납니다. 노스 코스트에서 나오는 다른 와인들 중 대형 와이너리 중엔 '클로 드 브와'같은 것들이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요.

 

스테이크에 카버네, 그것도 캘리포니아 카버네인 것은 굳이 강조 안 해도 됩니다.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프랑스 와인들을 눌러 주었던 캘리포니아 카버네의 포텐셜은 요즘 들어 중저가 와인들에 나파와 소노마 밸리 산 포도들이 대거 유입됨으로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부동산 가격의 대폭락으로 인해 포도원 가격이 떨어지고, 최고급 와인 구매자들이 대폭 빠짐으로 인해 생산도 줄어들고, 생산자들의 정리가 이뤄졌으며, 이에 따라 나파나 소노마 산의 최고급 포도를 구입할 사람들이 없어지자 포도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대형 와이너리들에도 가격을 대폭 깎아 포도를 납품하기 시작했고, 이 포도들이 중가 와인에도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요즘 미국에서 2-30달러 대 와인 중에서 품질이 과거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대폭 늘어났습니다.

 

어쨌든, 은은한 삼나무 향기 안에 감춰진 잼 같은 진득임, 그러다가 블랙베리의 향으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이 재밌는 캘리포니아 카버네를 비우고 나서 선택한 것은 우리 동네 와인입니다. 미국의 이머징 스타, 워싱턴주 와인 중에서도 쿠거 크레스트의 시라를 잡습니다. 아마 오늘 잡은 것 중에서 가격은 이게 제일 셀 텐데.. 쿠거 크레스트의 이 조금 촌스러운(?) 레이블은 요즘 들어 더욱 촌스러워졌습니다만, 아무튼 이제 이 레이블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고급스러워보이고 싶어서 한 짓이겠지만, 제가 보기엔 영 아니네요. 어쨌든, 이 정다운 레이블의 시라는 역시 자기 포텐셜 분명합니다. 흰 후추, 블랙베리 잼, 두터운 질감은 워싱턴주 시라의 깊이를 잘 표현한다 하겠습니다. 일전에 이 와이너리가 처음 시작한 왈라왈라에 갔었는데, 지금은 나름 성공해서 왈라왈라 타운 초입에 꽤 큰 와이너리를 세워 이사했습니다. 그만큼 잘 나간다는 이야기고, 이 와이너리의 주력상품이던 20달러대의 '데디케이션'은 이제 코스트코에서 15달러 선에서 팔립니다. 그만큼 많이 나간다는 이야기겠죠.

 

워싱턴주 와인 생산지 중에서 캘리포니아의 나파 밸리에 비견할만한 곳이 바로 왈라왈라입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이곳 카유스 인디언 언어로 급류를 뜻하는데, 세 개의 강이 만나고, 화산재와 자갈들이 쌓여 이뤄진 충적토 지형은 이쪽 와인에 색다른 산미를 부여합니다. 여기에 물이 풍부하고 낮지만 바람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산들로 병풍이 둘러쳐져 있으며 이 산들을 비롯한 낮은 구릉들은 천혜의 포도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 가봤는데, 워싱턴주에서는 시애틀 인근 우딘빌, 콜럼비아 밸리와 야키마 밸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서와 더불어 와인 중심의 성장도시라고 말할 수 있지요.

 

아, 그리고 바베큐 요리는 시라가 잘 어울립니다. 그것은 시라 특유의 후추 내음 때문이기도 한데, 닭고기든 쇠고기든, 돼지고기든 간에, 직접 불과 만나 구워진 요리엔 시라의 스파이시한 맛이 잘 어우러집니다. 아마 호주나 남프랑스의 시라는 기후 덕에 이 포도들이 기르기 쉬운 탓도 있겠지만, 그들이 선호하는 요리 스타일과도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시라가 어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요리는 아마 남미 스타일의 까르네 아사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숯으로 오래오래 구우면서 기름을 쫙 뺀 고기요리의 거친 맛과, 시라의 야성적인 맛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네 번째 딴 와인은 로제였습니다. 남프랑스 산의 드라이 로제로, 아벨 끌레망이라고 합니다. 레이블을 보시면 알겠지만, 랑그독-루시용 지역이나 기타 남프랑스 지역에서 미국 수출을 주로 노리고 나오는 와인들은 지역명을 쓰기보다는 미국 와인처럼 생산자를 표기하고 그 아래 품종을 표기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오히려, 맨 처음에 이 와인을 땄으면 참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드라이하고 무게감 있으면서 나름 묵직하게 입안을 채워주는 로제입니다. 색깔로만 보면 가벼울 것 같은데, 오히려 나름 바디감 있습니다. 고기요리에도 잘 매치될 수 있는 재밌는 로제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로제에 대해 가볍다고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로제 와인인 '화이트 진판델'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진 않은가 싶습니다. 그러나 원래 '정통' 로제는 드라이한 와인이며, 화이트 진판델이 오히려 기형이라고 봐야죠. 물론 그 덕에, 캘리포니아 와인의 판매량은 엄청나게 늘어난 건 사실입니다만... 이 와인 스타일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서터 홈'의 전체 와인 판매량의 절대량(거의 90%) 이 화이트 진판델 때문이니까요.

 

아무튼, 결혼기념일이라는 특별한 날이 끼기도 했지만, 좀 벼르고 별렀던 술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오랫만에 와인을 마시고 싶었고, 나름 잘 마셨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들, 그리고 아내와 우리 결혼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눴고, 뒤늦게 합류한 처형이 우리를 재밌게 해 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성당에서 연 청소년 캠핑 가서 없었습니다. 이게 참 좋았군요, 그리고 보니. 하하.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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