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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민풍 넘치는 스페인 와인으로 하루를 마감하다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02.25|조회수303 목록 댓글 0

 

 

일요일,  비록 사순 기간이지만 일요일만큼은 일종의 '휴식(이걸 휴식이라고 해야 하나?)' 을 주는 것에 대해 저처럼 관대한 사람도 있고, 또 엄격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금욕을 지키면서 사순의 의미를 되새기는 존경스런 분들도 있습니다. 아, 제 자신에 대한 이 부끄러운 관대함을 딱 잘라버려야 하는데, 유혹 앞에 이렇게도 약한 제 자신을 보는 것, 솔직히 많이 부끄럽습니다. 이번만은 지켜봐야지 했던 몇가지 스스로와의 약속이 무너져버리면서, 저는 제 자신을 더 처절하게 봅니다. 문제는 유혹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유혹을 수용하는 내 자신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을 수용할 때의 제 모습은 참으로 적극적이면서 별 핑계를 다 대고 있습니다. 일요일이니 하루 휴식을 주자는 등,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즐겁지 않을 수 없다는 등, 친구들이 한국에서 찾아왔는데 안 마시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등... 심지어는 나중엔 "와인을 안 마시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으니 독주는 된다" 는 해괴망측한 논리까지 등장시키면서 가슴 속에 담아 놓았던 약속을 머리로 옮겨놓고, 결국 그걸 정신줄 바깥으로 내놓게 되는 사태들도... 솔직히 겪습니다.

 

먹을 때는 즐겁게 먹자... 하다 보면 '즐겁게 먹으려면 마실것도 있어야지'로 생각이 뛰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결국 제 손엔 스크루 오프너가 들려 있습니다. 애구. 이게 제 실상입니다.

 

지호가 고기를 먹고 싶다고 말한 것을 핑계삼아 삼겹살도 맛있게 구워 먹고, 또 며칠 전엔 야채, 특히 고수를 듬뿍 넣은 월남쌈도 싸 먹어 봤습니다. 두 자리에 공히 출현해 준 와인이 있는데, 그것은 제 딴엔 일일일병이 아니라 한병을 따면 두 번은 마시자는, 조금은 말도 안 되는 자제의 표현이었던 셈입니다. 아, 그래도 전엔 한병을 따면 꼭 그날로 끝났는데, 이제는 이틀, 어떤 때는 사흘도 갑니다. 자제를 많이 하는 건지, 아니면 몸이 망가진 걸로 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술을 과거같이 마시지 않습니다. 아니면 그렇게 못 마시는 거겠죠.

 

미국 내에서 와인의 절대 소비량은 줄지 않았다는 통계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와인에 소비되는 금액 자체는 크게 줄었습니다. 여전히 캘리포니아는 미국 전체 와인 생산량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고, 여기서 나오는 와인들도 그 품질이 크게 좋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와인들도 꽤 들어오는데, 가장 많이 약진하고 있는 것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지금까지 미국 내에서 별로 지명도 없던 곳들의 와인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스페인의 테이블 와인들은 가격도 저렴하고, 사실 품질도 그다지 나쁘지 않습니다. 굳이 크리안자나 리제르바 등급이 아니더라도, 비노 호벤 (Vino Joven, 어린 와인이라는 뜻)에서도 좋은 것들도 많고, 아예 이 등급체계에 속하지 않은 테이블 와인 중에서도 찾아보면 겨우 4-5달러대의 괜찮은 와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르네 바르비에르는 스페인 코스타 브라바 지역 산입니다. 이 와인에 '지중해 레드 와인'이라고 이름붙은 것으로 봤을 때, 이 와인에 쓰인 포도는 이 지역에서 유명한 마카베오나 하렐 로 같은 품종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략 와인메이킹 노트를 찾아보니 멀로도 섞이고 템프라니요도 섞였습니다. 즉 이 지역의 유명한 와인생산지인 페네데스나 프리오라토에 비교될 수는 없는 와인이지만, 말 그대로 간단한 저녁 한끼 먹으면서 옆에 놓고 마시기엔 별 문제 없는 와인이란 뜻입니다. 알콜도 딱 적당한 12.5%. 가격은 5달러 미만입니다. 지난번 싸구려 와인 헌팅할 때 샀던 건데, 확실히 피니시는 좀 떨어지지만 은은한 꽃향기가 흥을 돋우는 그런 재밌는 와인입니다. 그래도 템프라니요라는 품종의 강건함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고.

 

이 지역의 어떤 와인이든, 음식과는 잘 어울리는데 이는 산도와 당도의 적절한 조화에서 기인하는 듯 합니다. 심지어는 해물 빠에야 같은 볶음밥 종류의 음식에도 잘 어울릴 와인입니다. 스페인의 음식 문화는 남유럽지역의 다른 나라들이 그렇듯 원래 와인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와인이 나온 지역은 프랑스의 랑그독 루시용 지역과 거의 붙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비록 국가는 다르지만, 북부 스페인과 남프랑스는 사람들의 성정도, 기후도, 모두 비슷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지중해 사람들'이 갖는 어떤 독특한 문화의 공유겠지요.

 

아이들과는 삼겹살을 구워 먹었고, 그 다음다음 날엔가는 아내가 해준 월남쌈(고이꾸옹, 春捲)과도 맞췄는데, 아내는 처음엔 이 붉은 와인이 당연히 마늘과 올리브 기름에 볶은 새우와 고수나물, 그리고 상추와 피망 등을 듬뿍 넣은 이 음식에는 안 어울릴 거라는, 어떤 편견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제가 맛있게 와인과 춘권을 즐기는 것을 보고 궁금했는지 맞춰 보았다가 무릎을 탁 칩니다.

"아니, 레드 와인인데도 이렇게 잘 가요?"

"이게 스페인와인의 매력이지."

 

오히려 화이트 와인인 콜럼비아 밸리 산의 제피나 보다도 훨씬 더 이런저런 음식에 어울려주는 편안한 와인입니다. 물론, 와인 자체가 인상적이거나 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와인 한 잔을 하면서 눈을 감고 상상해보면 지중해의 뜨거운 바람과, 포도밭과, 그리고 그들의 독특한 음식들이 떠오릅니다. 얇게 썰은 하몽, 그리고 과일들과 조금은 고린 것 같다 싶은 치즈들과, 그들의 플라멩고 춤이 어울리는 아도비 풍의 건물들. 클래식 기타 소리에 저물어가는 농부의 하루... 이런 게 생각나는 편안한 와인을 하나 찾았습니다. 그 가격대에서 찾을 수 있는 와인들 중에서는 꽤 마음에 드는 놈입니다. 5달러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 요즘 이런 특별한 저녁의 마무리는 아내가 남은 재료들과 미리 내 놓은 국물로 끓인 국수입니다. 아, 좋네요.

 

와인이 꼭 귀족풍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리고 이렇게 서민내음 팍팍 나는 와인들이 서민풍 팍팍 나는 음식들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사순의 규율을 깨고 살짝 일탈하는 제 마음의 죄책감을 덜어 줍니다. 그래, 나는 당근 서민풍나는 평범한 게 어울리는 놈이라니까, 하면서 말이죠. 하하.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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