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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억이 같은 사람과 나누는 향기로운 로제 와인, 그리고 편안한 저녁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04.15|조회수48 목록 댓글 1

 

 

일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뒷마당 덱 위에 휴대용 가스렌지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엔 큰 프라이팬, 그리고 그 안엔 때깔 꽤 좋은 고등어가 지글거리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은 고등어 구이인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집안에서 고등어를 구우면 냄새가 나니, 아내는 그걸 뒷마당으로 끌고 간 거겠지요. 김창완님의 '어머니와 고등어'라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난다 싶습니다.

 

평소에 숯불을 뒷마당에서 때울 일이 있으면, 아내는 보통 그때 남은 불에 생선을 굽곤 했는데, 오늘은 고기 구울 일도 없고 해서, 아마 처음엔 오븐에서 굽는 걸 생각했겠지만 그것도 냄새가 집안에 배기 딱 좋기에 저렇게 뒷마당으로 나갔을 것입니다.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저는 마당에 나가서 풀이나 뽑겠다고 나섰다가는 얼른 집으로 들어와선 카메라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태전 앞마당에 심어 놓았던 라벤더는 국화만큼이나 번져버려선 다른 꽃들의 영역을 사정없이 침범합니다. 그러나 라벤더 향만큼은 너무 좋습니다. 아, 내년부터는 저 라벤더에 꽃망울이 생기기 시작할 때 얼른 따서 라벤더 차를 해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지난번에도 그걸 실기하는 바람에 라벤더가 더 번져 버렸습니다.

 

앞마당 꽃들엔 꿀벌의 군무. 이제 봄이 절정으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다가 여름은 갑자기 찾아와 길을 걸으며 편지를 배달하는 제게 땀을 흘리도록 만들겠지요. 그리고 보니 어젠 제 라우트에서 일을 하는데, 너구리 두 마리가 나무 위에서 장난질하는 걸 보고 늘 갖고 다니는 땅콩과 아몬드를 주었더니 눈치를 보며 나무에서 슬슬 내려와선 주는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잠시 일하다 말고 너구리들과 견과류를 나눠먹으며 놀았습니다. 봄은 원래 만물이 짝을 이루는 때인 것인지, 그 함께 다니는 너구리들도 자기들의 싱숭생숭함을 주체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풀을 뽑아야지, 사진만 찍고 있어요?" 아내의 짧은 핀잔이 제 꽃과 봄에 관한 상념을 잠시 중단하게 만듭니다. "저녁준비 다 됐어요. 얼른 들어와요." 집안으로 들어가니 잘 구워진 고등어와 반찬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와인들을 생각해봅니다. 고등어라... 소비뇽 블랑이나 샤도네...? 아니면 셰닌 블랑? 리즐링도 괜찮을 것 같고...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로제'가 당깁니다. 제대로 된 로제가.

 

사실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조차도 로제엔 관심 주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로제는 알면 알수록 그 산뜻함, 깊이, 그리고 음식과의 다양한 조화 등으로 재미있는 와인입니다. 아마 로제가 찬밥이 된 것은 일단 미국 와인메이커들의 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와인이라 할 수 있는 '화이트 진판델'이 식사 때 코카콜라를 즐기는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을 정도로 달콤하게 생산되기 때문이지요. 1972년, 서터 홈 와이너리를 운영하던 트린체로 패밀리는 캘리포니아에서 흔하디 흔한 진판델로 로제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우연하게 사고(?)로 발효가 중간에 중단되고, 잔당이 남아 달콤한 와인을 만들게 됩니다. 처음엔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화이트 진판델이란 이름을 붙여 출시했는데, 대박이 나 버렸습니다. 지금도 서터 홈 와이너리는 모스카토와 화이트 진판델이 총 매출의 90%를 웃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미국인들에겐 '로제는 달콤한 와인'이란 인식을 심어 버렸고, 여자들이나 마시는 와인이란 선입감을 갖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레드 와인 품종으로 만들면서, 화이트 와인의 성질을 지니는 이 로제는 일단 저온 발효에서 오는 풍부한 아로마가 매력적인데, 특히 딸기 등 베리류의 향이 상큼하게 느껴지고, 만들어지는 지역이나 사용되는 포도에 따라 간단한 서머와인부터 무거운 질감을 가진 음식들까지 그 대역이 다양합니다. 제 개인적 경험으로는 닭고기 요리들과 잘 맞고, 달콤한 미국산 화이트 진판델 같은 경우는 햄이나 소시지 같은 훈제 가공육에 잘 맞습니다.

 

아무튼, 왜 로제가 생각났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학교에서 학우들이 만든 로제가 한 병 있었습니다. 병엔 열심히 노동하는 와인메이커의 그림이 있는 레이블이 붙어 있고(그 레이블은 와인 비즈니스 공부하는 친구들이 만들어 냅니다), 문제는 그 병 안에 담긴 것들인데... 일단 열어서 향을 음미하니 기대하던 베리향이 물씬. 딸기향이 참 좋습니다. 무척 드라이한 로제인데, 일견 조금 무겁게도 느껴집니다. 어쩐지... 알코올 도수가 무려 13.8%... 품종을 봤더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카버네 소비뇽 50%, 그리고 멀로 50%. 평소에 절대로 로제와인이 될 일이 없는 두 품종이 학생들의 실험정신으로 로제로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보통 로제를 만드는 데 쓰는 품종은 그레나슈나 삑뿔 등이고, 캘리포니아의 화이트 진판델 붐 덕에 진판델 역시 무척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카버네와 멀로... 사실 이들은 가격 때문에도 로제를 만들기엔 좀 부담스러웠을텐데, 수확시기를 조금 놓쳤던지, 혹은 다른 이유로 포도를 싸게 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는가 추정해 봅니다.

 

음... 편안한 딸기향 속에 아내와의 대화가 피어오릅니다. 최근의 아이들 교육 이야기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점점 깊어지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그리고 보니,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이 1993년이던가... 거의 20년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갔는데도, 제 눈에 아내는 여전히 예쁩니다. 좀 무서워져서 그렇지. 하하. 그래도, 역시 와인은 대화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웃음을 가져다주는 명약임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한참 함께 이야기하다보니, 이 사람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술기운에 아내는 대략 씻고 이 세상과 임시 단절을 하고, 저는 알아서 밥 먹은 설겆이 다 끝내 놓고... 그러면서 웃습니다. 아, 정말 '함께 하는 추억'이 있다는 것, 좋은 일입니다. 예전에 어떤 유행가에 "추억이 같아 행복할수만 있다면..." 이란 가사가 있었는데, 정말 추억이 같으니 행복합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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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름드리 | 작성시간 18.04.15 베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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