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크랩] 세상이 좋아졌어, 자, 로제 한 잔...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08.10|조회수68 목록 댓글 0




어제 멀리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요즘 바쁘다 했습니다. 그동안 시사에 밀려 있던 책을 읽느라 바쁘다는 것이었지요. 하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껏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는데, 역시 시사에 밀려 있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사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을 겁니다. 결국 참여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시대의 아픔에 함께 공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테니까요.

우리가 함께 공감한 아픔, 그래서 함께 한 분노는 세계 혁명사에 없을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촛불 혁명이라는 말이 하나의 대명사로 자리잡을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은 또 '성공적인 혁명'으로서, 평화혁명으로서, 영국의 명예혁명에 버금가는 세계사에서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그 혁명의 장정에 있습니다.

청와대 캐비넷에서 나왔다는 문건들이 그냥 거기에 남겨져 있었을까? 저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병우가 어떤 인간관계를 지어 왔는지에 대한 반증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이건 제 짐작의 영역인거고. 아무튼 기적처럼 저들이 쌓아 온 악행에 대한 증거들이 하나 둘 씩 수면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제게 전화를 걸어 온 친구나, 또는 저에게도 마음의 여유를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2015년, 코스트코엔 우리나라 식으로 썬 삼겹살이 처음으로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네 삼겹살처럼 얇게 썬 것은 아니고, 식당에서 먹을 때 나오는 삼겹살처럼 도톰하게 썰어낸 삼겹살은 미국 내에서 한국 문화가 어느정도 자리잡았는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기도 합니다. 이미 '갈비'나 '불고기'는 미국 안에서도 그대로 Kalbi 나 Bulgogi로 표시가 될 정도로 문화적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비즈니스, 특히 식당 등에서 일하는 라티노 직원들이 우리네 음식 문화를 미국 내에 퍼뜨리는 데 있어서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아내가 삼겹살을 먹자고 먼저 제의한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쉬는 날 저녁 이런 걸로 저녁을 하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은 분명히 들었습니다.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서 원래 제가 가야 했을 병원 스케줄을 취소하고 작은아들놈 병원엘 데리고 갔다왔고... 고양이 모래 통을 좀 더 큰 걸로 갈아주고, 집안 치우고 설겆이 하고, 나름 생각하고 있는 집안 정돈 프로젝트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만 하고 커피 마시며 넘기기 아픈 김탁환 작가의 세월호 관련 책들을 뒷마당에서 읽고, 작은아들놈 어디 간다고 할 때마다 운전하고 나갔다 오고... 페북과 카톡, 텔레그램으로 날아드는 사연들에 저도 댓글 달고 의견 표시하고 하다가 저녁이 왔습니다. 후다닥. 미리 꺼내 놓았던 냉동된 삼겹살이 적당히 녹았다는 걸 확인하고 불판 갖다가 탁자에 놓고. 

자, 언제나처럼 이럴 때는 술. 그런데 오랫동안 맥주와 독주에 밀려 장롱 안에 처박혀 있던 와인 한 병을 꺼내 봅니다. 그래, 날도 더운데 레드 말고. 삼겹살이니까 화이트로.. 간다고 하기엔 좀 너무 특징 없잖아. 그래서 꺼낸 게 로제. 스톤 캡이라는 이름의 워싱턴 주 와이너리에서 나온 로제입니다.

로제는 레드와인 품종으로 만들지요. 일반적으로 어떤 포도든 간에 레드 와인이 되기 위해서는 껍질을 함께 우려내야 하지요. 그래서 그걸 계속해 다시 밀어넣고 돌리고 하면서 우려내는 겁니다. 그렇지만 로제는 껍질과 와인과의 접촉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태닌을 느끼지 못하고 레드 와인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와인의 특징을 지니게 되지요. 로제의 가장 기본적인 느낌은 딸기향입니다. 색깔도 그렇고, 딸기향도 그렇고.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로제 와인이라면 화이트 진판델이지요. 그렇지만 일부러 발효를 늦춰 잔당을 많이 남기는 화이트 진판델은 마시기 쉽고 달콤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좀 '싸구려'티를 낼 수 밖에 없지요. 제대로 된 로제는 보통은 드라이하지만, 세미드라이 형태로 나오는 것들도 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만난 이 와인은 그로서리 아웃렛이라는 곳에서 3달러가 채 안 되는 가격에 산 겁니다. 보통 2013년에 나온 로제라면 그 다음해엔 마셔 버려야 하는데, 무려 4년? 잘못하면 맛이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열었습니다. 

아, 스텔빈 캡의 힘인가. 코르크가 없이 돌려 따는 스크루 캡은 와인에서 낭만은 제거했으되 보존성은 좀 높이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약간의 발포성도 느껴졌고. 그런데 이건 뭐야? 와, 이걸 겨우 3달러에 팔았단 말야? 오 마이 갓. 콜럼비아 밸리의 로제는 보통은 시라와 멀로 등의 품종으로 만들어냅니다.  아마 레드면 레드, 화이트면 화이트만 마시는 이들에게 로제는 쉽게 다가서긴 힘든 선택이었겠지요. 그러다가 돌고 돌아 그로서리 아웃렛이라는 곳까지 '차떼기'로 흘러갔을테고. 

스톤 캡 와이너리는 자기들의 포도원에서 직접 와인을 만들어내는 작은 와이너리입니다. 아, 딸기향과 아주 약간의 감지할만한 당도. 딸기 쥬스를 걸러 마시는 느낌. 달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맛. 아무래도 이건 몇 년 동안 굴러다니면서 더 익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도와 부드러움이 잘 어우러진 이 와인이 삼겹살과도 잘 어울려준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이제 세상이 다시 와인 마시기에 좋아진 것인가 하는 조금은 웃기는 생각을 했습니다.

큰놈은 일 갔다 안 돌아왔고, 작은놈은 친구들고 영화를 보러 갔고, 부부만 달랑 집에서 즐기는 삼겹살 파티. 몇년 전만 같아도 눈이 마주치면 아마... 아, 나 지금 나이 많이 먹었지. 로제의 산도를 별로 즐기지 않으면서, 화이트 진판델의 뭔가 모자란 느낌도 싫어했던 아내가 "이거 너무 좋아." 하면서 눈이 풀립니다. 자 기회다... "허니 저거 다 치우고 자요. 나 먼저 좀 누워요."  그래, 나 나이 먹었다니까. 흑. 

그래도 세상이 좋아져서, 오랜만에 이렇게 와인 글을 쓰네요. 아내도 얼굴이 그 와인빛처럼 되어 소파에서 코 자고 있더군요. 


시애틀에서...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Seattle Story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