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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특별했던 올해 7월 4일에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09.13|조회수51 목록 댓글 1
북한의 미사일 실험 속보가 미국 시간으로 7월 4일에 터졌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 미국 전역에서, 심지어는 해외의 미국령과 미국 기지에서도 폭죽을 터뜨리는 날입니다. 북이 이 날에 맞춰 일부러 매우 거대한 폭죽을 터뜨렸나 싶을 정도로.

밤 열 시가 넘도록 훤한 시애틀에서야 아직은 본격적으로 폭죽 터뜨릴 수가 없는 시간이긴 하지만, 여기저기서 철모르는 꼬마들이 터뜨리는 폭죽 소리가 구름 한 점 없는 시애틀의 그림자 길게 끄는 저녁시간 하늘을 채우고, 저는 오늘 바베큐 하느라 모처럼 정리해 놓은 뒷마당 데크 위 가든테이블에 랩탑을 갖다놓고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있다가,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자판을 두들깁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와인 포스팅 해 본지 오래 됐어.

미국의 독립을 기념한다고는 하지만, 글쎄요, 많은 나라들의 재앙의 씨앗이 되어 버린 이 나라가 탄생한 날을 기념하기보다는, 우리로서는 7.4 남북공동성명이 처음 나온 걸 기념해야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지난 주 롱 위크엔드를 보내고 나서 이번 주엔 원래 주중에 쉬는 날이 하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쉬는 날이 하루 주어지는 바람에 저로서는 그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독립기념일엔 불꽃놀이 이외에도 바베큐를 즐기지요.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모님 댁에서 갖고 내려온 고기를 오늘 구웠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소시지와 새우 요리 같은 걸 준비하고, 지금 시카고 근처 샴페인이란 동네에서 있다가 두 달 후에 새크라멘토, 정확히 말하면 UC 데이비스로 직장을 잡아 내려갈 막내동생 부부가 부모님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이지요. 당연히 부모님도 오셨고, 동생 내외, 그리고 우리 큰아들놈도 자기 여자친구를 불렀으니... 얘네도 내외... ? 는 아니고...  암튼. 

모처럼 분주했습니다. 뒷마당 정리도 그래서 간만에 하고, 그릴도 간만에 솔질하고, 그러면서 이것저것 올려서 굽기 시작했습니다. 늘 그렇듯 불 피우고, 이게 백열될 때까지 기다리고, 불이 적당해지면 그때부터 옥수수니 버섯이니 하는 것들부터 먼저 올려 구운 후에 소시지, 고기를 올려 굽는. 고기의 간은 늘 그렇듯 딴 거 안 하고 소금과 후추. 고기는 아내건 웰던, 내건 레어. 부모님 건 미디엄. 이제 이게 수십년... 아니 적어도 이십수년은 해온 짓이라 손에 많이 익은 건 사실입니다.

오리건 피노 느와와 피노 그리,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메리티지 한 병을 땁니다. 메리티지에 대해서는 아마 제 블로그에서 여러번 다뤘던 것 같은데 Merit 이라는 말에 Heritage 라는 말을 섞은 겁니다. 미국에서 보르도 스타일로 블렌딩해 만든 와인을 뜻하지요. 미국에서는 보통 한 품종이 75% 이상 들어가야? 버라이어틀 와인(해당 포도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와인)으로 쳐 줍니다. 그래서 보르도에서처럼 애매한 비율로 포도를 섞으면 (예를 들어 카버네 40 멀로 40 쁘띠 베르도 15 카버네 프랑 5) 그런 와인엔 어떤 포도 품종의 이름을 따로 명기할 수 없습니다. 그냥 '레드 와인' 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에 불만을 품었던 양조업자들이 '메리티지 협회'를 만들어 미국 내에서 보르도 식 블렌딩을 하는 양조 업체를 확인해 준 후 '메리티지'라는 이름을 줍니다. 나름 자구책이었죠.

암튼, 오늘 잡은 녀석은 스털링이라고 하는, 나름 꽤 큰 캘리포니아 와인 회사의 2014년 메리티지입니다. 나름 메리트 충만한 감성이 있는, 묵직하고 튼실한, 캘리포니아 와인이 갖춰야 할 요소를 다 갖춘 놈이죠. 흑설탕과 약간의 감초 같은 느낌이 있으나, 잼처럼 묵직한 느낌과 입에서 굴릴 때 느껴지는 적절한 산도와 태닌의 느낌이 꽤 고급 와인의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코스트코에서 한 케이스(열두병)에 $39.99 에 세일할 때 사 온 겁니다. 물론 이 와인이 늘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녀석을 보면 병을 잡을 때의 느낌만 해도 하도 튼실해서, 병으로 느끼기엔 한 병에 그 케이스 가격이 나간다 해도 믿을만한 놈이란 말입니다. 꽤 괜찮은 와인이 이렇게 엄청난 양으로 풀릴 때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겠지요. 

과거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와인은 매우 정치적인 술인데다가 경기를 확실하게 타는 술입니다. 미국의 거품 경제가 서브프라임 사태라는, 더 이상 거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 실체가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트리클 다운 이론이 현실에서 빅엿을 먹고, 서브프라임 사태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의 허상이 어떻게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때 빠진 거품들은 제일 먼저 사람들의 구매 패턴에서의 변화로 나타난겁니다. 

결국 와인도 '계급이 빠진 술'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금껏 자기들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중저가 와인 브랜드엔 자기들의 포도를 내 놓지 않았던 포도원들이 살기 위해서 자기들의 포도를 중저가 와이너리에 대량으로 방출했고, 이 포도들이 기존의 다른 캘리포니아 포도들과 함께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또 지금까지 UC 데이비스의 포도주 관련 학과를 통해 배출된 실험 정신 가득한 인재들은 기존의 포도 재배 기술과 양조기술을 거의 바꿔 버리는 혁명적인 실험들을 감행했고, 와인의 질은 전반적으로  향상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와인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은 와인 업계의 비극이었던 셈이죠.

그 자리를 메꾼 것이 맥주였습니다. 크래프트 비어로 옮겨탄 애주가들은 오늘도 열심히 맥주를 마셨을 겁니다. 아, 저도 사실은 오늘 시작은 레드훅 브루어리의 롱 해머 에일로 시작했지요. 브랫이라는 짧은, 조금은 쌍욕같은 이름을 가진 소시지의 원래 이름은 브라트브루스트 Bratwurst 입니다. 독일어지요. 이런 짭짤하고 육질 가득한 음식에야 맥주 이상 잘 가는 술은 없으니까요. 그것도 사실은 시원한 독일식의 깨끗한 라거가 맞겠으나, 이 묵직한 에일도 괜찮습니다. 오늘은 와인을 마시느라 맥주를 몇 병 마시지 않았지만, 저는 이 브루어리에서 만들어내는 '발라드 비터'를 꽤 좋아합니다. 임페리얼 IPA나 더블 IPA 계열처럼 홉의 느낌이 풍성하면서도 산뜻한 뒷맛을 만들어 내는 맥주들이야 바비큐엔 딱이지요. 

그리고 나서, 모처럼 이렇게 치워 놓은 뒷마당에 걸터앉아 자판을 두드리네요. 오늘 하루가 갔습니다. 지난 며칠간 꿈처럼 살았습니다. 늘 그렇지만,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 어딘가 내가 속해 있지 않은 곳에 가는 것은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노매드 혹은 베가본드의 본능을 일깨웁니다. 어딘가 확실히 매여 있기를 바라면서도 매이기 실어하는 감정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모순이겠지요. 자기에게 없는 것,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바라는 것을 보면, 전 아직 철이 덜 들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꿈을 꾸어 왔고, 그래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그렇기에 이번 독립기념일이 더 뜻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교민 간담회에 초청받아 참석한 후 처음 가 보는 워싱턴 DC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허드슨 강변을 걷다가 돌아와서 내 집 뒷마당을 정리해 좀 새로워보이는 공간으로 만들어 놓고, 거기서 지금 이렇게 자판질을 하는 것도 아마 그런 내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다시,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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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Seatt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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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critical | 작성시간 18.09.13 베리굿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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