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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깊어가는 가을, 그리고 떠난 이와 남은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09.30|조회수54 목록 댓글 3

 

 

장인어른 상을 당해 뉴욕에 일주일간 다녀온지도 열흘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장모님의 기일이기도 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때, 천천히 붉게 물들어가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인 동시에 겨울의 엄혹함을 대비하는 계절. 이런 의미들이 우리 인생의 의미들과도 겹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 자들은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장례가 끝나고 나서 음식을 나누는 것도 아마 이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입니다. 망자를 추모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보다 충실하게,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는 것이지요.

 

그 깊어가는 가을, 우리집 뒷마당의 포도는 그 어느때보다도 잘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은 탓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옆집 루디 아저씨는 우리 가족들이 뉴욕에 가 있는 동안 우리집 정원을 당신의 정원인 양 공들여 가꿔 주셨고, 저는 생각도 못 했던 잡초 제거까지 다 해 주셨습니다. 우리집 우편물을 대신 챙겨 주고, 심지어는 제 차까지도 왁스를 입혀 놓으셨습니다. 이웃이 그냥 이웃이 아니라,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미뤄왔던 일 하나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정원에 '바크'라고 부르는, 나무껍질을 ?효시켜 만드는 일종의 정원 미장재를 까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잡초가 많으면 하기 어려운 작업인데, 루디 아저씨가 잡초를 모두 없애주신 덕에 이 작업을 몇 시간 만에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앞마당 정원은 아주 예뻐졌습니다.

 

아내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갈비를 재었습니다. 아마 우리 음식 중에서 미국인들을 거의 '미치게' 할 수 있는 양념갈비를 받아들자 루디 아저씨는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이게 조금 남았기에 가을의 정취가 깊어져가는 뒷마당에 불을 피우고 갈비를 굽고, 와인을 땄습니다. 마침 처형 내외가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왔기에 우리는 함께 음식을 나누고, 술을 나누고, 세상을 떠난 장인어른을 다시 추억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레드와인을 좋아하시는 형님을 위해 꺼낸 와인은 '그리폰'이란 이름을 지닌 프리미티보로 만든 와인입니다. 프리미티보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널리 자라는 품종 중 하나인 진판델의 조상 격이고, 사실은 똑같은 포도이고 크로아티아와 이태리에서 많이 자랍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진판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미국적인 와인이 됐고, 특히 진판델로 만드는 스윗 로제인 '화이트 진판델'은 와인을 시작하는 사람이나, 와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어필하는 와인이 됐습니다.

 

그러나 프리미티보, 즉 진판델의 참맛은 레드 와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후추끼가 조금 돌고, 높은 알코올은 일견 시라와 비슷하지만 태닌이 시라보다는 적고, 보다 둥글어진 맛을 냅니다. 이 와인은 특별히 이태리의 와인 원산지 규정을 받지 않음은 레이블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Italy 라고만 적혀 있는 산지표기에서 보듯, 한 지역에서 나오는 포도로만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대부분은 이태리에서 프리미티보의 재배가 가장 왕성한 뿔리아 지역 - 이태리 지도에서 보면 장화의 발굽으로 보이는 부분입니다 - 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특히 뿔리아의 만두리아 지역은 좋은 프리미티보가 많이 생산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지역의 다른 유명한 와인으로는 네그로 아마로라고 하는 품종으로 만든 살리체 살렌티노라는 것이 있습니다. 태닌이 무겁고 일견 투박하게 느껴지지만 숨은 깊은 맛이 있는 와인이지요. 그리고 이 지역의 와인들은 일반적으로 가격이 착합니다. 그리폰 역시 트레이더 조에서 5달러가 채 되지 않는 가격으로 구할 수 있지요. 산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편. 여성들이 마시기에도 부담이 덜 합니다. 레드 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처형도 맛있다고 하는군요. 태닌은 진판델답게 너무 무겁진 않지만, 그래도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깊은 인상을 남기는 다른 이태리 지역의 와인들에 대면 이 와인은 그런 인상깊은 맛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격 대비로는 최고로 괜찮은 와인들 중 하나로 꼽겠습니다.

 

차콜(숯)이 모자라서 루디 아저씨가 일전에 새 그릴을 장만하시면서 제게 넘겨 주셨던 개스 그릴을 켜고 식구들이 먹을 갈비와 고등어를 굽는 동안 저는 콜럼비아 와이너리의 콜럼비아 밸리산 피노 그리를 홀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피노 그리 역시 자기 개성을 팍팍 뽐내면서 화려함을 보여주는 다른 화이트 품종들, 예를 들어 샤도네라던지, 아니면 개성 강한 소비뇽 블랑 같은 와인과는 다른 '얌전한' 와인입니다. 그러나 이 와인을 하루 이틀 열어두면 또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숨겨뒀던 야성미가 그대로 드러난달까요. 원래는 조금 밋밋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이 와인이 이런 식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꽃향기에 미미하게 섞여나오는 꿀의 느낌은 며칠 바깥에 놔뒀던 와인이 조금 산화했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산화란 것이 꼭 나쁘게만 받아들여질 이유는 없습니다. 뭐든지 지나치지 않다면, 때로는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형님과 함께 한 또 다른 레드와인은 샤토 생 미셸의 멀로. 자타가 공인하는 워싱턴주 최대의 와이너리이면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입니다. 또 워싱턴주의 대표 와이너리라는 이름도 전술한 콜럼비아 와이너리나, 혹은 몇년 전 와인스펙테이터의 '올해의 와인' 상을 수상한 콜럼비아 크레스트와 함께 누리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멀로. 원래 멀로는 리즐링과 더불어 워싱턴주 와인으로 하여금 이곳 와이너리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딸기를 씹는 듯한 맛, 그리고 적절히 순화된 태닌. 입에 착착 감기는 듯한 질감은 워싱턴주 멀로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조카 이빈이는 뒷마당의 포도를 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의 먹거리를 그대로 빼앗기는 것이 억울하기라도 하다는 듯, 딱다구리의 일종인 블루 제이 두 마리가 포도를 따고 있는 조카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풋,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제 저 아이들의 세상이 오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먼저 된 세대로서 저 아이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저희 장인의 세대 역시 우리를 위해 뭔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의 이 세상이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선 바람직하지 않은 세상 같기에, 우리 세대에서 이 부조리한 것들을 바꿔 주어야 할 텐데, 하는 그런 상념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래도, 가을은 성큼 내 곁에 다가왔고, 거기엔 추억할 것도, 생각할 것도 많았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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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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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18.09.30 시간이 잘도가네요 ㅅㅅ
    편안한 밤 되세요
  • 작성자sincerely | 작성시간 18.10.01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sincerely | 작성시간 18.10.01 가을이네요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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