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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93년, 콜럼비아 크레스트 그랜드 에스테이츠가 첫 발매된 그 해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8.10.09|조회수54 목록 댓글 0





주말은 주말의 분위기라는 게 특별히 존재하는 걸까요? 아이들이 성당에서 개최한 캠프에 가고 우리만 있던 주말, 나름으로 분위기도 좀 잡아보고 싶긴 했는데 그 분위기라는 게 그렇게 쉽게 잡히는 게 아니더군요. 익숙함, 나이탓,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해야 할 일들' 때문에도. 우리 방과 응접실을 치우고 애들이 침낭 찾는다고 완전히 방이고 차고며를 뒤집어 놓았다고 아내는 툴툴댔고, 저는 그 덕에 팔자에 없던 집안일 하다가 녹초가 돼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아내와 저녁 시간에 뭐래도 좀 특식을 하자 하여, 굴러다니던 등심 썰어서 와인 한 잔을 했습니다. 여기에 맞출 와인으로 꺼냈던 것이 좀 뜻깊은 와인. 오랜만에 집중해서 와인을 마셔보고 싶었던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 아이들이 집에 없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고. 이미 하루 일과를 마치고, 여기에 운동까지 하고 집에 들어와서 좀 지친 몸에 들어간 와인은 금방 나른한 기운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1993년산 콜럼비아 크레스트 그랜드 에스테이트 카버네 소비뇽. 지호보다도 다섯 살 많은 와인인 셈입니다. 제 와인 구루, 오리건 한인 순교자 본당의 사목회장을 지내시기도 한 정상규 세바스찬 형님 내외께서 지난번 저희집을 들르셨을 때 선물로 주셨던 겁니다. 이 해가 중요한 것은 콜럼비아 크레스트에서 '그랜드 에스테이트'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투바인'과  최상급의 '리저브' 사이에 처음으로 중간 퀄러티의 와인이 생산된 해이고, 이 와인은 바로 그때 처음으로 릴리즈 된 카버네 소비뇽이었습니다.


1993년, 즉 1990년대 초반부터 미국 와인은 급성장을 했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그 급성장세가 이뤄진 것은 탐사 보도 프로그램인 '식스티 미니츠' 를 통해 이른바 '프렌치 패러독스'라고 하는, 프랑스인들의 레드와인 음주 습관이 심장병의 위험을 낮춘다는 보도가 크게 반향을 일으키고, 적당한 와인 음주가 오히려 건강에 좋다고 하는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올 때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와인 판매고는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사실 1990년대 초, 미국 와인이라면 캘리포니아의 나파와 소노마 지역산만 유명하던 그 때, 워싱턴주의 와이너리는 30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이 서북미의 워싱턴 주에서 와이너리는 8백개가 넘어설 정도로 성장을 했으니, 이것이 얼마나 폭발적인 확산과 성장이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콜럼비아 크레스트는 이 새로운 와인 소비층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그랜드 에스테이츠라는 레이블을 만들었을겁니다. 대표적인 레드 와인 품종인 카버네 소비뇽의 경우, 투바인은 당시 5-6달러 선 사이에 팔리고 있었고 리저브는 병당 3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콜럼비아 크레스트는 이미지는 조금 고급화시키고, 가격은 부담되지 않는 선의 전략상품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것이 그랜드 에스테이츠 라인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뒤로 콜럼비아 크레스트는 몇 가지의 라인들을 더 만들어 냅니다. 가장 최근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이른바 '호스 헤븐 힐'이라는, 비교적 최근에 구획되고 나누어진 새 와인 산지 (AVA)에서 자란 포도들로 만든 H3 이라는 라인업입니다. 이 와인은 최근의 와인 소비 감세에도 불구하고 그 품질, 그리고 무엇보다 코스트코에서 대량 판매된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그 판매고가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쨌든, 스물 한 살이 된 와인은 꺾이지 않았었습니다. 색깔도 단단했습니다. 그것은 워싱턴산 포도의 강건함을 그대로 표현해줄 뿐 아니라, 장기 보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물론 1993년이 꽤 단단한 빈티지였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하겠지요. 박하뇌의 향이 감돌고, 진한 자두의 느낌도 살아있고, 색깔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 당시 콜럼비아 크레스트 와이너리가 이 라인업을 얼마나 신경써서 출시했는지가 그대로 느껴지더군요. 


아내와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는 이야길 하는데, 그녀가 먼저 소파에 누워 뻗어버리고 맙니다. 아, 이건 뭐지. 정말 우리 나이의 한계인가. 아내를 살살 깨우려 하다가 한대 얻어맞고 혼자 방으로 들어가다가 억울해서 -_-; 조금 남은 와인을 잔에 따르고 마저 마시고, 어떻게 기어이 이 닦고 뒷정리 하고 그리고 잠자리로 들어갑니다. 이 와인들이 미국의 '주류계'를 호령하던 때는 이른바 닷컴 붐이라고 하는, 실물경제가 제대로 받쳐지지 않은 상태에서 키운 거품들이 경제를 주도할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고 시가를 피웠습니다. 거기에 쓰여진 돈은 노동의 댓가가 아니라, 자본의 놀음에 동참했기에 얻어진 떡고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미국도 그때엔 다단계 같은 것들이 한참 성행했습니다. 성장의 신화와 사기가 주식불패론, 부동산불패론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둠스데이가 덮쳤습니다.


이 와인엔 그 '잘 나가던 미국'의 향기가 배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에테르, 약간의 시가의 느낌, 뭔가 탐미적이고 퇴폐적인 그런 느낌이 살아 있었습니다. 스물 한 살 먹은 와인의 이같은 느낌이라니. 뭔가 농염한 중년에 다가서는, 자기 관리는 나름대로 잘 하고 있는 유한마담의 유혹 같은 그런 느낌? 마치 노동이 배제된 불로소득이 갖는 어떤 퇴폐성? 이 와인에서 그런 걸 느꼈다면 과장일까요? 그래도 콜럼비아 크레스트는 꽤 합리적인 가격으로 좋은 와인을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타운홀들이나 펍엔 다시 사람들이 모입니다.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는 거지요. 미국 사람들이 다시 모여 술을 나누며 정치 이야기를 하는 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체육관에서도 정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공화당 후보들 이야긴 별로 안 나오는데, 가끔가다 라티노 친구들은 젭 부시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아내가 중남미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샌더스와 클린턴의 이야길 합니다. 펍에서 그런 이야길 하는 사람들의 손엔 와인이 아니라 맥주가 들려져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저는 그 시대의 추억이 될 만한 와인을 한 병 따서 아내와 이렇게 마셨습니다. 어떤 시대 하나가 추억이 되어 날아가 버린 느낌이지만, 그것이 어쩐지 새 희망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믿는 자의 의식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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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Seatt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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