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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 ②]

작성자fineclub|작성시간18.12.26|조회수242 목록 댓글 1
맥주가 영웅을 만든다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 ③]
기사입력 2015.09.10 09:24:28 | 최종수정 2015.09.10 09:24:28 |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 stern100@hanmail.net
 
"책은 고통을 주지만 맥주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영원한 것은 맥주뿐!" 

괴테의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불후의 명작을 쓴 대문호도 독서보다 맥주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16세기 벨기에의 풍속화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의 그림 속 농민들의 결혼식과 축제 장면에는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와인이 귀족과 부자들의 술이었다면, 맥주는 왕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은 '평등의 술'이었습니다.

맥주의 역사를 더듬으면 유럽 근·현대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사회 경제사적인 의미가 보입니다. 나치 독일을 이끈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우수성은 건강한 아이에 달려있다'며 갓난아기를 둔 엄마에게 맥주 마실 것을 권했습니다. 혁명과 독재뿐 아니라 사랑과 예술의 뒤편에는 어김없이 맥주가 있습니다. 맥주를 이해하는 것은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맥주를 사랑했던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럽 역사에 녹아있는 서민들의 맥주 이야기를 찾아가다 보면 여러분도 '악마보다 검고 사랑보다 쓴' 맥주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 크래프트 비어의 참맛을 소개한 하우스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의 대표를 지낸 백경학 푸르메재단 이사가 유럽 역사 속 서민과 함께 한 맥주의 재미난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립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왜 중세 수도원을 통해 맥주의 전통이 유지되었는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와 종교 개혁을 이끈 독일 성직자 마르틴 루터가 왜 그토록 맥주를 사랑했는지를 밝혀주는 실마리를 드리고자 합니다. 연재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는 격주 목요일 발행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

① 명예보다 맥주를 사랑했던 셰익스피어 부자
② 여성들이 맥주 잔치 벌이면, 남성들은...


맥주는 양조장이 보이는 곳에서 마셔야 한다. 
사랑의 화살을 맞으면 맥주로 그 상처를 씻는 것이 좋다.
(독일 속담)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로마의 위대한 군인이자 정치가, 역사가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광대한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어 로마에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줬습니다. 로마의 군사 제도와 법 체계를 확립하고, 도로와 수도를 정비해 이를 기반으로 지중해를 내해로 삼는 통일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는 로마 문화와 기독교 신앙을 식민지 전역에 전파했을 뿐 아니라, 식민지로부터도 우수한 문물을 수입해 발전시켜 오늘날 서구문명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카이사르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야심가였습니다. 로마 시민이 그토록 열망했던 히스파니아(스페인)를 로마의 첫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거대한 밀 곡창 지대와 올리브 산지를 선물 받은 로마 시민은 카이사르에게 열광했습니다. 로마 시민의 환호성을 들으며 그는 북쪽으로 진군해 지금의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라인 강 서쪽 독일, 영국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개척했고, 동쪽으로는 터키와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로마 문화를 전파했습니다.

도시 국가였던 로마를 세계적 제국으로 만든 카이사르가 정복지였던 이탈리아 북부 갈리아 지방 순시에 나섰을 때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두 가지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원주민 켈트족이 로마인처럼 점잖은 치마가 아니라, 야만스럽게도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있는 것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두 번째로 켈트족이 밤마다 이상한 음료를 마시며 행복해 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저서 <갈리아 전기(Gallia 戰記)>에서 "켈트인들은 오크나무(참나무)로 둥근 통을 만든 뒤, 보리로 만든 이상한 술을 즐기고 있다"고 기술했습니다. 좀 솔직하게 썼다면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고, 창피하게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은 야만인들이 밤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마시면서 행복해했다. 그런데 그들이 오크통에 저장했던 것은 붉은 포도주가 아니라 말 오줌처럼 누렇고 싱거운 맛의 이상한 술이었다.'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태양이 준 선물인 포도로 만든 붉은 와인이 아니라 말 오줌 색의 밍밍한 술을 마시며 행복해하는 켈트족은 그가 보기에 미개인, 야만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5세기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였던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도 당시 켈트족이었던 영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에 대해 "맥줏집은 흥겨운 곳이지만 맥주는 맹물처럼 맛이 없다"고 혹평했습니다. 

켈트족은 뒤이어 유럽을 지배하게 된 게르만족과 함께 맥주 마니아였습니다. '훌륭한 사람의 집에는 반드시 맥주가 있어야 한다'는 격언이 있을 만큼 그들은 맥주를 사랑했습니다. 
 
고대부터 와인은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한 술, 왕과 귀족이 즐기는 술이었습니다. 요즘 와인이 많이 대중화되긴 했지만 좋은 와인 한 병에 수백만 원, 심지어 수천만 원하는 것을 보면 와인은 예부터 권력자, 부자를 위한 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등 태양이 작열하는 더운 지방에서는 주로 포도를 재배했습니다. 포도 농사는 많은 노동을 요구합니다. 때맞춰 거름을 줘야 하고 가지를 세워주고 포도 알을 키우기 위해 잎을 수시로 따줘야 합니다. 수확할 때까지 쉴 틈이 없습니다. 포도송이는 인간의 정성에 자연적 조건이 더해질 때야 영그는 거지요. 술을 담글 때도 포도알을 잘 으깨서 발효 숙성해야 하는 등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와인은 노동이 집약된 술입니다.

반면 맥주는 단순합니다. 추위에 잘 견디는 밀이나 보리를 봄에 드넓은 벌판에 뿌리고 가을이 되면 수확하면 됩니다. 포도처럼 김을 매주거나 거름 줄 필요가 없습니다. 큰 재해가 없기를 기도하다, 가을 하늘이 높아지면 걷어 들이면 되지요. 수확한 밀과 맥주보리를 거칠게 빻은 뒤 홉을 넣어 삶습니다. 그리고 3주 이상 발효 숙성시키면 맛있는 맥주가 탄생합니다. 와인에 비하면 거저 마시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와인과 맥주의 이런 차이는 결국 왕과 귀족의 술과 평민의 술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서늘한 날씨 때문에 포도 농사가 어려운 영국과 독일 북부지방에 살던 켈트족과 게르만족은 맥주를 즐겨 마셨습니다. 야만인 켈트족이 즐기던 맥주는 중세 게르만 시대를 거치면서 모든 계층으로부터 사랑받는 대중적인 술로 변모하게 됩니다. 로마의 역사가 푸블리우스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는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족은 보리 음료를 많이 마시고 잘 취하는 민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게르만족도 켈트족 못지않은 맥주 애호가입니다. 

맥주를 널리 보급한 사람은 카를 대제(742~814)입니다. 독일에서는 칼,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 영국에서는 찰스, 스페인에서는 카롤루스, 체코에서는 카를 대제로 불리는 사람이지요. 이 게르만 정복왕은 부리부리한 눈매와 얼굴을 뒤덮은 수염,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로 평생을 전장에서 살았습니다. 

카를 대제의 비서실장 겸 궁정작가였던 아인하르트는 "카를 대제는 그 어떤 지배자보다 유능하고 출중했으며, 무엇이든 한번 손댄 일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장을 보았다. 궁지에 몰려서도 절망하지 않고, 행운 앞에서 교만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저는 그의 탁월한 성공의 비결이 맥주라고 봅니다. 그는 한마디로 맥주 광이었습니다. 맥주를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전쟁터에도 맥주 오크통을 늘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큰 전투를 치르기 전이면 반드시 병사들과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셨습니다. 그리고 카를 대제의 군대는 무서운 괴력을 발휘해 대승을 거두곤 했습니다. 맥주가 없었다면 승리도, 영웅도 없지 않았을까요?

카를 대제는 로마에 버금가는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슬람교를 믿었던 무어인이 점령한 스페인을 제외하고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체코, 폴란드, 헝가리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일했습니다. 서구 유럽의 틀이 이때 형성됐습니다. 로마제국의 전통과 영광을 계승한 신성로마제국을 세우고 유럽을 통일한 카를 대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국 곳곳에 수도원을 지어, 전쟁터에서 고생한 부하들을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을 동시에 가진 수도원장으로 파견하는 일이었습니다.

5세기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의 중세유럽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망망대해였습니다. 찬란했던 로마 문화와 학문은 사라지고 무지와 맹목적인 신앙이 거센 파도와 폭풍우로 변해 모든 것을 집어삼켰습니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외로운 섬들 가운데 희미한 불빛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카를 대제가 세운 중세 수도원이었습니다. 

카를 대제는 유럽 곳곳에 세워진 수도원 중 30곳에 맥주 양조시설을 설치하도록 지시하고, 이 수도원에 세금으로 맥주를 징수하거나 일반 양조장에도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교회나 수도원에 소속된 학교에도 맥주를 공급했습니다.

성지순례가 활성화되면서 순례자들의 입을 통해 이들 수도원 맥주의 명성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스위스의 장크트 갈렌 수도원과 독일의 트라피스트 수도원 등이 맥주로 유명해진 수도원들입니다. 이곳에서는 맥주뿐 아니라 와인과 치즈 제조기술도 전수됐습니다. 

잉여 자본은 더 큰 자본을 낳습니다. 카를 대제가 부여한 거대한 토지와 맥주 독점권, 귀족들이 기부한 재산으로 중세 수도원은 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맥주 독점권은 황금을 만드는 연금술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농민과 장인, 농노, 시민들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습니다. 맥주보리를 추수해 운송할 때의 통행세, 홉을 넣어 삶을 때의 홉 사용세, 맥주를 여관이나 술집에 내다 팔 때 판매세를 내야 했습니다. 심지어 수도사들은 일반 양조장에서 생산된 맥주에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행사인 축성(祝聖)을 했는데, 이때도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맥주는 세금 덩어리였지만 와인과 비교하면 그래도 값이 쌌습니다. 농가에서도 맥주를 만들긴 했지만 뛰어난 양조기술을 보유한 수도원 맥주와 맛을 비교할 수 없었지요. 서민들에게 수도원 맥주는 사치품이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활 속 사치품이었습니다.
 
여성들이 맥주 잔치 벌이면, 남성들은…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 ②]
기사입력 2015.08.27 10:26:23 | 최종수정 2015.08.27 10:26:23 |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 stern100@hanmail.net
 
"책은 고통을 주지만 맥주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영원한 것은 맥주뿐!" 

괴테의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불후의 명작을 쓴 대문호도 독서보다 맥주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16세기 벨기에의 풍속화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의 그림 속 농민들의 결혼식과 축제 장면에는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와인이 귀족과 부자들의 술이었다면, 맥주는 왕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은 '평등의 술'이었습니다.

맥주의 역사를 더듬으면 유럽 근·현대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사회 경제사적인 의미가 보입니다. 나치 독일을 이끈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우수성은 건강한 아이에 달려있다'며 갓난아기를 둔 엄마에게 맥주 마실 것을 권했습니다. 혁명과 독재뿐 아니라 사랑과 예술의 뒤편에는 어김없이 맥주가 있습니다. 맥주를 이해하는 것은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맥주를 사랑했던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럽 역사에 녹아있는 서민들의 맥주 이야기를 찾아가다 보면 여러분도 '악마보다 검고 사랑보다 쓴' 맥주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 크래프트 비어의 참맛을 소개한 하우스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의 대표를 지낸 백경학 푸르메재단 이사가 유럽 역사 속 서민과 함께 한 맥주의 재미난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립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왜 중세 수도원을 통해 맥주의 전통이 유지되었는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와 종교 개혁을 이끈 독일 성직자 마르틴 루터가 왜 그토록 맥주를 사랑했는지를 밝혀주는 실마리를 드리고자 합니다. 연재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는 격주 목요일 발행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

① 
명예보다 맥주를 사랑했던 셰익스피어 부자


서민과 함께한 맥주

맥주를 마시는 것은 좋은 식사를 하는 것과 같다.
맥주는 인간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 맛은 쓰지만, 마음을 여는 묘약이다.
(독일속담)

11세기 영국 북부 노팅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로빈 후드>가 197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송승헌처럼 잘 생긴 로빈 후드와 호섭이처럼 바가지 머리를 한 뚱뚱한 수사가 주인공으로 나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어렸던 제가 '서양인들은 웬 술을 그리 좋아할까?'라며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욕심 많은 지주의 꿀 술을 빼앗은 로빈 후드 일당이 남녀노소 어울려 축제를 벌이는 장면이 자주 나왔습니다. 

중세 초기만 해도 자연 효모로 발효시킨 꿀 술이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꿀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뿐더러 지속해서 술을 담그려면 많은 양의 꿀이 필요했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꿀 술 대신 맥주가 점점 인기를 얻게 됩니다. 당시에는 귀족뿐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조금씩 맥주를 빚을 수 있었습니다.    


중세는 영주들의 장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농업공동체 사회였습니다. 자작농과 장원에 소속된 농노들이 공동으로 씨를 뿌리고 추수하고, 함께 도랑을 파고 성벽을 쌓았습니다. 고단한 일이 끝나면 빠지지 않는 것이 맥주였습니다. 우리 농가에서 모내기가 끝나면 막걸리 잔치를 열 듯, 이들도 집에서 만든 맥주로 그날의 피로를 풀었습니다. 고단한 노동이 인생 전부였던 서민들에게 술자리는 종교의식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맥주 빚기는 여성의 몫이었습니다. 맥주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가사노동의 하나였습니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맥주 맛이 결정됐습니다. "그 집 맥주 참 맛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집 부인의 손맛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어도 집안 가장과 동네 사람들이 먹을 정도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밖으로 내다 팔다가는 큰 처벌을 받았으니까요.  

결혼할 때 맥주를 끓이는 큰 솥은 중요한 혼수품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여성은 맥주를 빚기만 했느냐고요? 물론 아닙니다. 여성도 남성 못지않은 술꾼이었습니다. 아기를 낳으면 동네 여성들이 떠들썩한 술판을 벌이곤 했습니다. 술에 취한 여인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평소 미워했던 남성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의 맥주 잔치가 벌어지면 남성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야 했습니다.
   
수공업 길드의 음주문화는 위계질서가 엄격했습니다. 장인과 도제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린 후, 소속감을 다지기 위해 꼭지가 돌 때까지 맥주를 마셨습니다. 새로 들어온 도제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지 못하거나 파도타기 순서가 됐는데 더 마시지 못하면, 벌로 남은 맥주를 머리에 들이부었습니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왕따가 되거나, 심지어 조직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소금이 고대 화폐 역할을 했듯이, 중세에는 맥주가 서민의 지불수단이었습니다. 영주는 토지에 묶여 있는 농부들에게 일한 대가로 맥주를 지급했고, 장인도 도제의 급여를 맥주로 계산할 때가 있었습니다. 아내들은 울상을 지었지만, 월급으로 맥주 통을 받은 남성들은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 유럽의 맥주 역사를 쓴 야곱 블루메(Jacob Blume)는 "중세의 위계질서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만든 것은 바로 의식과 풍습이었으며, 그 핵심은 맥주를 함께 마시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겸 역사가였던 앙드레 모루아(André Maurois)가 쓴 영국사를 보면, 중세에도 돈을 벌기 위해 온갖 농간으로 양을 속이거나 질 나쁜 맥주를 판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자신이 만든 엉터리 맥주를 매일 마시거나, 산꼭대기로 물을 운반하는 '물 긷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맥주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시대건 엄격한 잣대와 가혹한 형벌을 적용했습니다. 
     
중세의 절대군주는 큰 수도원에 맥주 제조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술을 보유한 수도원이 맥주 양조장을 세우면서 맥주는 한 단계 도약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맥주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홉이 8세기 독일 뮌헨 근교에서 재배됩니다. 

이전까지는 맥주의 쓴맛을 얻기 위해 로즈메리, 쑥, 생강, 파슬리, 호두나무 열매를 빻은 가루를 맥주보리와 함께 삶았습니다. 이렇게 만든 맥주는 신맛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발견한 홉을 사용하자, 식혜처럼 달콤하거나 식초처럼 신맛은 사라지고 향이 진한 쓴 맥주가 탄생했습니다. 쓰면 많이 마실 수 있습니다. 설탕물은 한두 잔 먹으면 배가 부르지만, 씁쓸한 맥주는 끝없이 들어갑니다. 홉을 첨가한 쓴 맥주는 중세시대 다른 맥주를 제치고 서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홉은 맥주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고 항균효과를 높였습니다. 홉이 들어간 맥주는 넓은 지역에 오랫동안 유통될 수 있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전수된 비법에 홉까지 첨가되자, 맥주는 더 큰 인기를 끌게 됐습니다. 종교가 생활을 지배하면서 수도원에 재산을 헌납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수도원에서 하루 1갤런(3.78리터)의 맥주를 배급받았습니다. 

그들은 서민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맛있는 맥주 한 잔과 비스킷 한두 조각으로 해결하는 아침은 서민들에게 꿈의 식사였으니까요. 당시 맥주는 영양가 높은 수프처럼 인식됐습니다. 술이 아니라 액체로 만든 빵이었지요. 서민들의 소원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더디게 진행되던 도시화는 14세기 들어 가속합니다. 왕과 영주들이 버려진 황무지와 숲을 개간하면서 경작지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경작지가 늘자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이 생기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경작지의 확대는 잉여생산과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고, 곳곳에 도시를 탄생시켰습니다. 

도시 거주자는 세금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자본력을 가진 시민계급이었습니다. 나머지 서민은 도시와 맞닿은 시골에 얼기설기 이은 나뭇집을 짓고, 수백 년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성안의 귀족과 도시의 시민계급은 동물 가죽과 두꺼운 솜으로 만든 따뜻한 옷을 입고 양탄자 깔린 방을 걸으며 겨울을 견뎠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농부와 빈민은 자신의 체온으로 길고 추운 겨울을 견뎌야 했습니다. 

도시는 안전했지만, 공권력이 닿지 않는 시골은 밤이 되면 도둑떼가 들끓는 무법천지로 변했습니다. 강도들이 몰려다니며 집을 털거나 사람을 살해하기 일쑤였습니다. 영국 런던의 템스강변에는 매일 아침 시체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밤사이 사람을 살해하고 시체를 강물에 던진 거지요. 런던 행정관청의 주 업무는 아침 강물에서 시체를 건져 올린 뒤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민에게 추운 겨울밤은 중세 암흑기와 같았습니다. 빛도 희망도 없는 고해였지요. 맥주는 이렇게 불행한 서민의 한 가닥 희망이었습니다. 맥주를 한 잔 마시면 몸이 따뜻해지고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16세기 벨기에의 풍속화가 피테르 브뢰헬의 그림을 보면 술 취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단순히 취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신을 잃고 큰 대자로 드러누워 있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취해 뻗어 있습니다. 농가 결혼식이나 세례식, 축제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맥주였습니다. 

누구나 흠뻑 맥주를 마시고 취하고 싶어 했습니다. 신은 외로움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맥주를 만들어 위안을 받았습니다. 낮에는 각종 세금과 영주들이 요구하는 노역에 시달리고, 밤이 되면 폭력이 난무했던 시대에 맥주는 서민의 큰 축복이었습니다. 프랑스 북부 코르비(Corbie) 수도원에서는 돈을 주고 맥주를 사 마실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형제 맥주'라는 이름으로 맥주 두 잔을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고 취하는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맥주 한잔을 얻어 마실 수 있다면 영혼도 팔 정도였으니까요. 

이런 음주 행태에 대해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는 1539년 <절제와 근신에 대한 설교>에서 "귀족이건 농민이건 다들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독일은 돼지들의 땅이 되었고, 독일민족은 몸과 생명을 타락시키는 추잡한 백성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도시가 성장하고 화폐경제가 도입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숙소와 맥줏집이 문을 열었습니다. 자본의 축적은 경제적인 여유를 낳고, 경제적인 여유가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평등의 시대, 서민의 맥주 시대를 열게 된 거지요. 

영국 청교도는 맥주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영국 국교회의 탄압을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 사람들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지요. 이들은 다른 종파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신대륙의 광야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육체적인 쾌락은 물론, 생활에서의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면서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모든 것에 까칠했던 이들도 맥주에는 관대했습니다. 맥주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 여겼습니다. 1620년 선장 크리스토퍼 존스의 지휘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 땅을 떠날 때 이들의 애초 목적지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아래에 있는 버지니아주였지만, 실제 도착한 곳은 그보다 위의 보스턴 근처입니다. 

초기 이민자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 청교도를 통칭) 중 한 사람이 쓴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는 시간이 없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맥주가 다 떨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맥주가 바닥을 보이면서 청교도들의 인내심도 바닥났고, 결국 계획을 앞당겨 보스턴 플리머스에 닻을 내리게 된 거지요.

다른 청교도 지도자 존 윈스럽(John Winthrop)을 태우고 미국으로 간 배에는 1만 갤런의 맥주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200리터 맥주 통 190개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식량보다 맥주를 더 많이 실은 거지요. 맥주는 이렇게 유럽뿐 아니라 신대륙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영국인과 독일인의 조상인 바이킹에게 맥주가 영생을 약속하는 영약이었다면, 중세의 가난한 서민에게는 세상의 근심을 잊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묘약이었습니다. 이들은 맥주에 흠뻑 취해 때로는 영웅이 되었고, 때로는 왕이 되었습니다.



작가 소개

CBS, <한겨레>,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습니다. 평소 맥주를 사랑하다, 독일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방문한 맥주의 본고장 독일 뮌헨에서 슈바빙(Schwabing) 거리의 흑맥주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중세 문화의 요람이었던 독일 안덱스(Andechs)와 스위스 장크트 갈렌(Sankt Gallen) 등 오래된 수도원을 방문해 마시는 연금술인 맥주 양조술과 맥주의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영국으로 자동차 여행을 갔다, 부인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재활 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해 국내 최초의 하우스 맥주 회사인 옥토버훼스트(oktoberfset.co.kr)를 창업했습니다. 현재는 푸르메재단(www.purme.org)에서 시민의 기금을 모아 장애 어린이를 위한 재활 병원을 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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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done | 작성시간 18.12.26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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