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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드윈 로드 윅스 - 화가야, 여행가야?

작성자fridays|작성시간18.09.16|조회수118 목록 댓글 1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고 그림만 놓고 단순하게 본다면 저는 19세기 후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작품이 제일

좋습니다. 섬세한 묘사와 화려한 색깔을 볼 때마다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그들의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 능력이 갖춰지면 그 이유를 한 번 써보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작품의 무대인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여행은 오리엔탈리스트들에게 필수 코스였겠지요.

많은 화가들 중 오늘 소개할 미국의 에드윈 로드 윅스 (Edwin Lord Weeks / 1849~1903)는 인도 전문 화가

라는 평가 이전에 혹시 탐험가나 여행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행을 많이 했던 화가입니다.

 

 

 

 

사하란푸르의 인도 이발사    Indian Barbers - Saharanpur / 142.88cm x 190cm

 

인도 북부의 도시, 사하란푸르의 길거리 이발소 풍경입니다. 그림을 통해 추정해보면 붉은 색 천이 깔린 곳이

일종의 손님이 앉는 의자가 되겠지요. 신발을 벋고 천에 앉아 원하는 머리 스타일을 말하면 이발사는 작은

거울을 손님에게 쥐어주고 칼이나 가위로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합니다. 손님은 땡 볕에 앉아 이발사가 하라는

대로 하고 있는 것이 고생스럽지만 이발을 하고 나면 1주일이 즐거우니까 참을 만 한 일입니다. 인상을 쓰고

있는 꼬마 얼굴을 보니 어렸을 때 이발소 가는 것이 죽기 보다 싫었던 생각이 납니다.

, 따가워요. 좀 살살하세요.

가만있어 이 녀석아, 움직이면 더 아파

옥신각신 하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그나저나 뒤 쪽의 어른들은 별로 다듬을 것도 없어 보이는데요 ---.

 

여행과 여행지에 대한 견문록 그리고 작품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윅스 개인에 대한 자료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보스턴 교외의 뉴튼에서 출생한 윅스는 부모가 차와 향신료 도매업을 하고 있어서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때문에 부모는 재정적으로 그림과 여행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던 아들을 지원할 수

있었고 또 격려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여유가 있으면 ----– 좋겠지요.

 

 

 

 

페르시아 까페     A Persian Cafe

 

큰 나무 밑에 자리 잡은 카페에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볕이 잘 드는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사람도 보이는데 저쪽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얼굴들을 보니 대강 사정이 짐작이 됩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점원이 치우는데 먼지가 일었던 모양입니다.

조금 있다가 하면 안돼, 먼지 나잖아!

주인이 빨리 치우라고 성환데, 지금 치워야 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바로 한 마디가 이어졌을 것입니다.

사장 나오라고 해!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윅스는 그림도 그릴 겸 여행을 떠납니다. 플로리다키스 제도를 거쳐 수리남까지의

여행이었는데 이 때 제작한 작품의 연도가 1867, 열 여덟의 나이였습니다. 작품 구성에 대한 안목이나

그림을 그리는 기법을 고려해보면 회화에 대해 전문적인 수업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 평론가들의 말입니다.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윅스는 고향인 뉴튼에 화실을 엽니다. 그리고 같은 해 뉴햄프셔 출신의 프랑세스

롤린과 결혼을 합니다. 이후 롤린과 여행을 함께 한 기록만 남아 있어서 좀 아쉽습니다. 남의 가족 이야기가

뭐 중요하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언젠가도 썼던 기억이 나는데, 가족 이야기를 알면 한층 화가에 대한 이해가

빠를 때가 있거든요.

 

 

 

 

코르도바의 이슬람 사원 내부  

Interior of the Mosque at Cordova /142.24cm x 182.88cm / 1880~1889

 

사원의 예배시간인 것 같습니다. 모두 경건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신에게 바라는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마음은 같겠지요. 그림을 보는 동안 그림 속 인물들이 간절하게 구하는 것들이 모스크 안의 어둠을 건너

하늘에 오르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나저나 간구해야 할 것이 줄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 아직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니 제대로 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1871, 스물 두 살의 윅스는 삽화를 그리던 친구 클로즈 (A. P. Close)와 함께 이집트, 예루살렘, 시리아

그리고 다마스커스에 이르는 여행 길에 오릅니다. 스케치북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풍경으로 넘쳐 났습니다.

그러나 함께 갔던 클루즈가 그만 열병에 걸려 베이루트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 곳에 친구를 안장한 윅스는

모로코의 탕헤르에 잠시 머물게 됩니다. 그 곳에서 1870년대 그 곳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던 로버트

가빈 (R. Gavin)을 만납니다. 가빈은 나중에 윅스와 함께 북아프리카를 함께 여행하는 친구가 되죠.

탕헤르 항을 묘사한 1872년 작품이 있는데 오리엔탈리스트 화풍으로 제작된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비단 장사    The Silk Merchants / 91.4cm x 66cm

 

오린엔탈리스트들의 작품에는 양탄자나 비단을 파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화려한 문양과 색을 놓치고 싶은

화가는 없겠지요. 그런데 비단을 팔러 온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입니다. 외간 남자를

직접 대하지 못하는 풍속 때문일까요? 그래도 천으로 가린 뒤에 앉아 비단을 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거 어디에서 가져 온 건지 물어 보세요, 그리고 가격이 좀 비싼 것 같은데 조금 더 깎아 봐요.

비단은 오른쪽 이층 테라스에 있는 여인의 눈 길도 끌어 당기고 있습니다.

이거 중국산 짝퉁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수염 난 상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고향 뉴튼으로 돌아온 윅스는 보스턴 미술 클럽에 그 동안 제작한 작품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지역 신문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신문들은 그가 화가로서 진일보 했다는 평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윅스는 여행에서 본

풍경을 잊을 수 없었고 색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자 파리로 갈 결심을 합니다. 이 때는 아내와 함께였는데,

제가 아내였더라도 혼자 가면 가만 안 두었을 것 같습니다.

 

 

 

 

마차에 누워 있는 무어 소녀, 모로코의 라바트

Moorish Girl Lying On A Couch, Rabat, Morocco / 48.2cm x 72cm

 

라바트는 모로코의 수도입니다. 화려한 양탄자를 깔아 놓은 마차 의자에 누워 있는 무어 소녀의 모습이 매혹적

입니다. 초기 오리엔탈리스들은 노골적으로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여인들을 에로틱하게 묘사했죠.

다분히 여성과 문명 비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못 마땅합니다. 다행이 후기로 오면 좀 점잖아

지는데, 이 작품 속 나이를 좀처럼 알 수 없는 소녀의 얼굴에는 건강함이 보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담긴 눈입니다. 이상하죠 --- 나이를 먹으면서 눈이 작아집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많다는 뜻일까요?

 

윅스는 파리에 도착, 에콜드 보자르의 장 제롬 화실에 입학 원서를 제출하고 허가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레옹 보나의 화실에서 우선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보나는 제롬과는 친구 사이였지요. 지난 번 보나를 소개

할 때 좋은 선생님이었다고 했는데 윅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기다리던 입학 허가서가 도착했지만

보나와 함께 하는 것에 대만족이었던 윅스는 그냥 보나 밑에 머물기로 결정합니다.

 

 

 

 

모로코 외곽에 도착한 라반   Arrival of a Caravan Outside The City of Morocco

 

먼 길을 따라온 캬라반이 성곽 앞에 도착했습니다. 물건을 내려 놓고 잠시 그 동안 지쳤던 몸을 쉬는 사람들

사이로 낙타들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캬라반은 점과 점을 잇는 일입니다. 때문에 선을 따라 가는 것 보다

목숨을 담보로 해야 일이 많습니다. 사지를 뚫고 앞에 물이라도 가득했으면 좋겠는데 개울 물은

바닥을 보인지 한참입니다. 그래도 살아 다시 여기에 왔으니 참을 하겠지요. 낙타 등에 흔들리며 꿨던 꿈을

이제 만들어 시간입니다.

 

고향에서는 윅스가 당시 대가의 반열에 있던 장 제롬의 제자가 되었다고 보도했지만 윅스는 자신은 장 제롬의

제자가 아니라 보나의 제자라고 밝혔습니다. 보나는 성실한 선생님이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

이상 아침 일찍 화실에 나왔고 일요일에는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고 하죠. 따뜻한 선생님, 맞습니다.

1년 반을 보나와 함께 하면서 윅스는 사실주의 화풍을 받아 들였고 자연스런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서 야외에서 그림 작업을 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마투라 지방의 가트    Along the Ghats, Mathura / 65.4cm x 81cm

 

가트는 강가에 있는 계단을 말합니다. 마투라는 인도에서 불상이 처음 만들어 진 곳 중 하나로 미술사에 등장

하는 곳입니다. 흐르는 강에 들어가 몸을 씻으면 죄가 씻긴다는 힌두교들의 믿음이 있지요.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인 이 행위가 대책 없이 흔들리는 연약한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요. 죄의 크기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이가 어려 물가로 나온 사람들은 아직 몸을 많이 씻지 않아도 될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강 때문에 온 세상이 시끄러운데, 그림 속 강은 먹는 물로 육체도 살리지만 죄를

씻어 영혼도 살리고 있군요.

 

그 후 윅스의 행적이 명확하지는 않은데, 1875년 봄에는 카이로, 여름에는 파리 그리고 가을에는 모로코에서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1877 2, 고향으로 귀국한 윅스는 보스턴에서 작품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작품들은

호평을 받았고 판매도 잘 이루어져 몇 년간의 여행 경비가 만들어졌습니다. 1878년의 파라 살롱전에 출품하기

위하여 윅스는 다시 대서양을 건넙니다. 참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여행     The Last Voyage / 1884

 

배 한 척이 강의 한 가운데로 미끄러져 나가고 있습니다. 배 위에 누워 있는 노인 위로 햇볕이 따가운데,

노인을 덮은 붉은 천 한 자락이 강물로 숨어 들고 있습니다. 제목을 놓고 본다면 이 노인의 생명이 그다지

많이 남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제 흔들리는 배 위에서 노인은 강물처럼 흘러갔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겠지요.

강 가에는 죽은 사람을 화장하는 연기가 하늘로 오르고 있습니다.  다음 순서는 혹시 이 배 위에 있는 노인이

될까요? 사는 것을 흐르는 것에 비유한다면 배 위에 실린 살아 있는 몸이나 화장 후 재가 되어 강물에 떠 있는

몸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삶과 죽음이 한 곳에 있는 강의 풍경 속,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잠시 윅스는 라바트를 방문하고 싶어서 탕헤르에 도착합니다. 가빈과 함께 3개월 정도 머물 계획으로 산 넘고

물 건너 5일만에 찾아간 라바트는 기근이 덮친 상태였습니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계획을 접고 살롱전 준비를

위해 파리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라바트를 떠나기로 한 2월 어느 날, 모래폭풍이 불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바람이 멎은 후 낙타를 타고 이동하기 했는데, 이번에는 윅스와 아내가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가빈의 간호로 건강을 회복한 윅스 내외가 길을 떠난 것은 봄이 다 가고 난 후였습니다.

 

 

 

 

갠지즈 강의 긷는 사람들   Water Carriers of The Ganges / 62.2cm x 92cm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갠지즈 강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아마 상류 쪽 어디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강가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모두가 다 물을 길러 나온 것은 아니겠지요. 목을 축이러 온 소도 몇 마리

눈에 보입니다. 강은 저렇게 사람과 동물들이 모여야 빛이 나는 곳입니다. 물을 긷고 떠나는 여인들 위에 얹힌

금속 항아리들의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저것도 패션이라면 패션이군요. 물을 길러 왔다가 아예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한 두 여인의 모습은 세상 모든 우물 터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아닐까요?

 

1년도 지나지 않아 윅스는 다시 라바트를 방문할 계획을 세웁니다. 참 대단한 오기이자 정열입니다. 이번에는

무장한 경호원을 대동하고 모로코 내부의 모습을 그려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라바트와

모로코의 심장부는 윅스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무너진 고대 유적들 사이에서 열리는 시장의 모습

같은 것들이 그를 매혹시킨 것이죠.

 

 

 

 

아흐메다바드 지방의 티크나무 건물 옆에서 상자를 파는 장인

Craftsman Selling Cases By A Teak-Wood Building, Ahmedabad 99.7cm x 73cm c.1885

 

티크나무를 이용해서 만든 2층 테라스와 무게를 받치기 위해 출입문 옆에 설치한 공포 (栱包) 모양의 장식이

기가 막힙니다. 가게랄 것도 없는, 문 앞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만드는 장인들 앞에 한 사내가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모습을 보니 한 자락 하는 집안의 사람 같습니다.

그 상자 얼마인가?

아뇨, 그냥 드리겠습니다. 가져가세요.

비딱하니 선 남자와 말 위에 탄 남자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량함이 느껴집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장인의

허벅지가 애처로워 보이기 때문이겠지요.

 

 

그 후 미국이나 파리에서 윅스의 별다른 전시회가 열리지는 않았지만 모로코를 주제로 한 그의 작품 가격은

당시 프랑스 최고 화가의 가격과 같았다고 하니까 매우 인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83년에는 인도 여행을

하는데 낮에는 작품을 그리고 밤에는 건축물의 세부적인 묘사와 배경을 위해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는 것으로

채워졌습니다. 1892, 윅스는 하퍼스 메거진 (Harper’s Magazine)의 후원으로 테어도어 차일드 (Theodore

Child)와 다시 여행길에 오릅니다.

 

 

 

 

라호르의 야외 식당  An Open-Air Restaurant, Lahore / 157.5cm x 245.7cm / c.1889

 

라호르는 인도와의 국경에서 멀리 않은 파키스탄의 대도시입니다. 성 같기도 하고 사원 같기도 한 건물 앞,

간이 식당들이 모여 있습니다. 시장기를 간단하게 해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잠시 몸을 쉬는 사람도

보입니다. 주문을 받는 주인 뒤로 뜨거운 국물에서 피어나는 김에 쌓인 요리사는 음식의 맛을 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하늘은 맑고 화창한데 남루한 옷을 입고 땅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

음식을 먹을 수 가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생로병사에 대한 생각을 하는 철학자인가요? 밥에 굶주리면 걸인이

되지만 지식에 굶주리면 철학자가 되는 것이겠지요.

 

원래 계획은 상페테르부루그에서 기차를 타고 아프카니스탄을 거처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것이었지만 러시아

지역에 유행한 콜레라 때문에 트레비종부터 쿠르디스탄을 가로지르는 고대 캬라반의 루트를 따라가기로 변경

했습니다. 뭔가 출발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지요.

그래도 페르시아의 작은 마을들을 지나는 여행길은 흥미로웠습니다. 타부리즈라는 사막의 도시를 지날 때

장례행렬을 자주 만났는데 결국 같이 여행하던 차일드와 가이드가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1개월 가까이

휴양을 한 끝에 여행은 계속 되었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웠고 낭만적이었다고 하는데 매일 저녁 텐트를 치고

나면 그 날의 진행상황을 기록하고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텐트의 차일 밑에서 담배를 피우며 먼 지평선 너머

석양을 보는 식이었습니다. 많이 --- 부럽습니다.

 

 

 

 

암리차르의  황금사원    The Golden Temple, Amritsar /213.4cm x 302.3cm/1890

 

피키스탄과의 국경이 멀지 않은 암리차르에 있는 황금사원에 기울어진 햇빛이 내려 앉았습니다. 황금사원은

아침과 한 낮 그리고 저녁과 밤이 다른 모습을 보이는 곳이라고 하죠. 예전에 BBC 방송에서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곳 7위로 선정했는데, 타지마할이 10위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신이 사는 곳에 사람들이 흔적이

가득합니다. 더러는 명상에 빠져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음식을 팔고 있습니다. 그도 저도 아닌 사람은 호수

건너 사원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마 신께서도 이런 모습을 원하시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사람과

멀어진 신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죠.

 

테헤란을 거쳐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차일드가 열병 증세를 보였습니다. 아스파한으로 의사를 부르러 보냈지만

차일드는 콜레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쯤 되면 여행이라기 보다는 탐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싶습니다.

그래도 윅스의 여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892 11, 윅스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인도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그리고 파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 갈 때까지 2년 동안 인도에 머뭅니다.

 

 

 

 

무용   The Nautch

 

그림 속 인물들 보다 건물에 그려진 문양과 섬세한 윅스의 묘사가 먼저 눈길을 끌어 당깁니다.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면 이런 묘사를 할 수 있을까요?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은 양산 아래에 있고 북을 치는

사람에게는 햇빛이 들고 있습니다. 햇볕이 뜨거워지면 혹시 북소리는 점점 커지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권력을

탐내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인도에서 돌아 온 윅스의 작품은 미국과 프랑스 양쪽에서 명성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윅스는 이제 인도

전문화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생은 했지만 그 결과로 큰 화실을 가진 근사한 집도 마련할 수 있었죠.

1896년 레종드뇌르 작위를 받았고 1903 5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인도에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병 때문이었는데 여행은 그에게 부와 명예도

가져다 주었지만 목숨도 가져갔습니다. 그래도 아마 윅스는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난 결과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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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화가 진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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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여행 | 작성시간 18.09.16 멋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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