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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벨 안드레예비치 페도토프 -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냉소와 눈물

작성자fineclub|작성시간18.11.06|조회수144 목록 댓글 0

화가들 중에 단명한 화가를 만나면 아쉬움이 먼저 옵니다. 화가로서의 경력이 쌓이면서 더 좋은 작품을

남겨 주었을 텐데 하는 마음도 있지만 한 세상 너무 짧게 산 것에 대한 안쓰러움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풍자화가로 유명한 영국의 윌리엄 호가스에 빗대어 러시아의 호가스로 불리는 파벨 안드레예비치 페도토프

(Pavel Andreevich Fedotov / 1815~1852)는 서른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 속 신랄한

풍자는 지금도 멈추지 않습니다.

 

 

 

 

어린이 모습의 다노비치 초상화

Portrait of N.P. Zhdanovich as a Child / 26.7cm x 21.7cm / 1846~1847

 

다소곳한 모습이 처음 만나는 그림의 표지 모델이었던 프랑세스와 닮았지만 훨씬 어른스러운 얼굴입니다.

풍성한 검은 머리와 다소 우수 어린 큰 눈을 가지고 있지만 다문 입술에는 웃음이 걸려 있는 듯 합니다.

웃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뜬 모습 같아서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소한 묘사는 과감하게 단순하게 처리하고

모델의 속내를 찾아 내 화폭에 옮기는 것은 페도토프의 장기였습니다.

 

페도토프는 은퇴한 장교의 아들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짧은 생애 때문인지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본인이 원했는지 알 수 없지만 모스크바 생도 학교에 입학합니다.

학교를 졸업 후 열 아홉의 나이에 상트 페테스부르그에 있는 근위대에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합니다. 미술가

이야기를 100명 넘게 쓰고 있지만 현역 군인이 화가가 된 예는 페도토프가 처음 아닌가 싶습니다.

 

 

 

 

다루기 힘든 신부   Difficult Bride / 37cm x 45cm / 1842

 

공주과신부인 모양입니다. 무릎을 꿇고 꽃을 건넨 남자는 여인의 손을 잡았지만 여인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표정입니다. 커튼 밖에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관입니다. 여자의

치켜든 손가락에서, 미간을 잡고 아이구 머리야하는 사내의 몸 짓에서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돈 많은 집의 외동딸쯤 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유서 깊은 집안은 아니겠지요. 여인의 손을

잡고 있는 사내의 표정은 아주 간단합니다.

너하고 결혼 할 수 만 있다면 이런 수고쯤이야

여인보다는 돈을 보고 있는 음흉한 사내의 속마음이 들려 옵니다.

내용은 우습지만 장면을 바라보는 페도토프의 눈은 차갑습니다.

 

19세기 전반부에 시작된 러시아의 아마추어리즘은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예술가의 흉내를 내는 것인데 (따라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도 같습니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광범위한

예술적 토대가 쌓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구축된 역량은 젊은 예술가들이 끝없이

탄생하는데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었죠.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물질 숭배를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답답합니다.

 

 

 

 

철학자의 아침 식사     Aristocrat's breakfast / 51cm x 42cm / 1848

 

(제목대로 해석을 하면 귀족의 아침식사가 되어야겠지만, 그림에 어울리게 철학자의 아침식사라고 의역을 했습니다.

이 부분을  건너 뛰었는데 gufo님에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막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인데 예기치 않은 손님이 방문했습니다. 손님도 어지간히 급한 성격인지 한 손으로는

벌써 커튼을 열고 있습니다. 손님을 보고 짖는 개도 놀랐겠지만 더 놀란 사람은 철학자입니다. 근사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철학자의 아침 식사 모습은 보잘것 없습니다. 급한 마음에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책을 들었지만 책상에 놓인 음식은 어떻게 하죠? 더 큰 문제는 입이 불룩 튀어 나오도록 먹은 음식입니다.

보여주는 모습과 보여지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세상 사람 대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 간극이 차이가

그 사람의 당당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림 속 철학자만큼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는 것은 그 차이를 끝없이 좁혀 가는 것이겠지요.

 

군에서는 정직하고 매우 열심히 일하는 장교로 인정을 받았던 페도토프도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다른 많은

동료들처럼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플룻을 연주하는가 하면 아마추어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드로잉과 그림을 그리는데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군인 신분인 것을 감안하면

참 대단한 열정입니다. 생각해보면 20대는 무엇을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크기를

짐작할 수 없었던 그 철없는 자신감을 조금씩 빼앗겨 가며 지금까지 살아 온 것 같습니다. 자신감 창고의

바닥이 보이지 않게 관리를 잘 해야겠군요.

 

 

 

 

 

점원의 아침     Clerk's Morning / 48cm x 42cm / 1848

 

바닥이 어지러운 것을 보면 어제 밤에 한 잔 한 모양입니다. 기타도 보이는군요. 뒤늦게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이 도착한 것은 아마 어제 저녁이었겠지요. 오늘 아침 훈장을 달고 행사에 참석이라도 하는

모양입니다. 일어나서 면도와 머리 손질을 하다 말고 어제 받은 훈장이 너무 자랑스러워 다시 가슴에 달고

아내 앞에서 을 잡아 보았습니다.

나 어때?

당신 아주 근사해 보여요

그럼 그래도 내가 한 때는 말이야 ---

결혼 처음에는 아내에게 자랑할 것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혼날 것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자랑거리를 개발해야겠습니다. 남편은 늘 머리가 아픈 자리인가 봅니다.

 

또한 페도토프는 장교로서 주간 근무를 끝내고 밤에는 미술 아카데미의 야간 수업에 참석했습니다. 학생으로

서는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부대의 모습과 장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는 부대 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일반적인 수채화와 초상화에 관계된 테크닉은 모두 끝낸 그였습니다. 이 때 페도토프의

작품은 수채화와 연필로 제작되었습니다. 그가 유화로 방향을 바꾼 것은 훨씬 뒤의 일입니다. 페도토프는

초상화에 이어 캐리커처로 범위를 넓혔습니다. 이 때까지는 신랄한 풍자를 담은 작품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소령의 청혼    The Major's Proposal / 58cm x 75cm / 1848

 

이럴 수는 없어요

등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여인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애처롭습니다. 청혼을 거절당한 소령은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지만 별로 부끄러운 기색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딸의 치마를 끌어 당기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모든 광경은 사전에

딸이나 남편에게 아무런 상의 없이 저지른 어머니의 욕심 때문이겠지요. 어머니의 마음에는 딸의 사랑보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위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방 구석 그늘에 있는 아버지는 있는 듯 마는 듯 합니다.

하인들은 서로에게 귓속말로 이 상황을 따져 보고 있습니다.

아가씨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아직도 모르겠어? 결국은 주인 마님 의견대로 아마 저 늙은 소령하고 결혼하게 될 거야.

어휴, 안타까워라.

도시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를 숨기지 않았던 페도토프의 성숙된 테크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입니다.

 

군대에서 종군 화가라는 직책도 매력적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페도토프는 진정한

창의력 있는 화가는 미술에 모든 것을 받쳐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10년간 복무하던 부대에 전역을 신청합니다.

그 때 그의 나이 28세 되던 1843 11월이었습니다. 제대를 하기 위해 황제로부터 미술에 전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페도토프는 우선 공부를 위해 미술 아카데미에 정규 출석합니다. 처음 그는 전쟁화를 그리는

반에 들어 갔으나 곧 풍속화반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군 출신이니까 전쟁화반 ---- 처음에는 좀 편한 선택을

했던 모양입니다.

 

 

 

 

멋쟁이 아내    Fashionable Wife / 24.5cm x 29.8cm / 1849

 

모두 어두운 실내의 그림자에 갇혀 있는데 붉은 옷을 차려 입고 담배를 입에 문 여인만이 도도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모자를 벗고 여인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남편입니다. 아마 외출이라도 할

모양인데 아내에게 돈을 달라고 한 것 같습니다. 굳어진 여인의 얼굴과 대비되는 어수룩한 남자의 얼굴에는

비굴함도 보입니다.

얼마나 필요한데?

지급에 한 손을 넣고 있는 여인의 싸늘한 소리가 들립니다.

어이구, 차라리 안 보고 말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여인의 구부정한 허리 위로 답답함과 체념 그리고 분노가 한꺼번에 쌓여 있습니다.

한심한 남자들에 대한 페도토프의 비아냥을 보고 웃다가 문득 저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모시고잘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해 봅니다.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페도토프는 제대를 했지만 군대 밖은 생각보다 쉬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군에서 받던

월급은 그의 유일한 수입원이자 모스크바에 있는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한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초상화는 복잡하지 않은, 단순 명료했습니다.

그러나 모델의 내면 모습을 묘사하는데 탁월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담는데도 열중했습니다. 군인 출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화가는 확실히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합시코드를 연주하는 즈다노비치 초상화

Portrait of N.P. Zhdanovich at the Harpsichord / c.1849~1850

 

맨 처음 초상화 모델의 어른 모습입니다. 아마 이 모습이 본래 모습이겠지요. 페도토프는 같은 부대에서 근무

하던 즈다노비치 식구들의 초상화를 연작으로 남겼습니다. 목이 너무 길다고 했더니 아내는 목이 길어야 우아

하다고 하더군요. 물론 얼굴이 어깨에 붙어 있는 것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요. --- 기린이 우아한 이유가

있었군요. 아주 야무진 즈다노비치양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내의 목이 짧은가요?

글쎄요, 자로 재 본 적이 없습니다.

자를 들고 재 보자고 덤볐다가 자로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846, 서른 한 살부터 페도토프는 유화를 시작합니다. 그는 유화를 통해 19세게 중반 러시아 부르주아들에

대한 풍자와 비평을 시작했습니다. 1849년과 1850년 상 페테스부르그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전시회에 그의

작품이 걸렸고 화가로서의 성공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화가로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는 곧 거대한 벽을 만나게 됩니다. 완고한 아카데미 화가들의 반발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자화상    Self-portrait / 29.2cm x 20cm / 1840년대 / Lead Pencil in paper

 

화가들의 이야기를 쓸 때면 화가들의 자화상을 자주 보게 됩니다. 어떤 얼굴인지 궁금하거든요. 약간 벗어진

머리와 형형한 눈 빛 그리고 멋진 콧수염은 그가 쉽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의지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차가운 냉소도 묻어 있습니다.

자화상을 그린다면 무엇을 그리게 될까요?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을 그릴까요? 보아 주었으면 하는 것을

그릴까요?

 

 

겨울날   Winter day / c.1851

 

눈이 지붕과 길에 수북한 날, 하늘이 누렇게 떠 있습니다.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바람도 심하게 부는

날입니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길을 걷는 행인의 모습은 위로 열린 하늘 때문인지 더 왜소합니다.

혹시 페도토프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요? 지붕 위 붉은 색 굴뚝은 마치 하늘을 향해

지붕 위로 솟은 사람 같습니다. 겨울 하늘을 향해 질식할 것 같은 사회를 고발하는 것은 아닐까요?

 

전시회가 끝나고 페도토프는 페트라세프스키가 주동이 된 공상적 사회주의 서클에 가입합니다. 적극적으로

이 서클과 연계를 맺고 있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서클의 멤버였다가 체포되어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죠.

물론 구사 일생으로 살아나지만요. 당시 1848년과 1849년의 서유럽 혁명의 여파가 러시아로 밀어 닥칠 것을

염려한 러시아 정부는 적극적으로 사상 통제를 실시합니다. 당시 많은 민주주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이

당했던 것처럼 페도토프 역시 반동의 물결에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젊은 미망인    Young Widow / 62cm x 47cm / 1851

 

촛불을 켜 놓고 기도를 올리다가 벌떡 일어나 세상을 떠나 지금은 옆에 없는 남편 초상화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림 속 남편과 눈을 맞추다가 결국 아내는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더 그렇게 순간이 흐르면 그냥

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손이 배 위에 머물렀습니다. 남편이 남겨 준 생명은 엄마의 격한 마음을

알고 있겠지요.

 

노름꾼들    Gamblers / 60.5cm x 70.2cm / 1852

 

이제 판이 끝났습니다. 왼쪽 남자는 모든 것을 날린 것 같습니다. 정면을 바라보고 앉은 남자도 망연자실한

표정입니다. 그렇다면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와 기지개를 펴고 있는 오른쪽 남자가 승자이겠지요. 노름에서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철저하게 야만적이기 때문입니다. 속여야 하고, 더 많이 빼앗아야 하고

그리고 약한 자의 숨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아주 당당해 보입니다. 돌아보면

당당함을 가정한 비열함은 있어도 비열함을 가장한 당당함은 없었습니다.

정부와 아카데미 화가들로부터의 압력이 점차 커져가자 페도토프는 자포자기 심정이 점점 커져갔고 그 것이

그림에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페도토프는 고골리가 러시아 문학에 추악한 삶에 대한 풍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남긴 것처럼 그는

미술에 같은 것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852년 노름꾼이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페도토프의 작업은

중단됩니다. 그 해 그는 서른 일곱의 나이로 정신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무엇이 그를

정신병원으로 끌고 갔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를 산산조각 낸 당시의 체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페도토프 선생님, 무엇이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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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화가 진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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