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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폴 들라로슈 - 그림에 담긴 역사의 순간들

작성자fineclub|작성시간18.11.25|조회수108 목록 댓글 2

요즘 미국의 토마스 맥나이트 (Thomas Mcknight)의 작품과 자료를 보고 있는데 자꾸 옷을 당기는 손길이

있어서 돌아 보았더니 한 화가가 서 있었습니다.

내가 제자 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어서 나는 건너 뛰는 거야?

못해서 건너 뛴 것이 아니고 프랑스를 좀 벗어날까 하고 ---

바로 전에 소개한 토마 쿠튀르의 스승이었던, 우리에게는 폴(Paul) 들라로슈로 더 잘 알려진 이폴뤼트 들라로슈

(Hippolyte Delaroche / 1797~1856) 입니다.

 

 

 

 

젊은 엄마와 아이들   Young Mother and Her Children / 162.6cm x 134.6cm

 

아이들 성화에 엄마는 정신이 나간 듯 합니다. 무릎에 앉아 있던 아이는 몸을 뒤로 한껏 젖혔습니다.

혹시 아이가 떨어질까 봐 손으로 배를 누르고 있습니다. 조금 더 큰 아이는 귓속말로 가뜩이나 정신 없는 엄마의

머리 속을 헝클어 놓는 중입니다. 그나마 팽이를 돌리는 녀석이 좀 조용한 편이군요. 오른쪽 맏이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무슨 기도일까요, 잠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하느님, 저희 좀 빨리 자게 해 주세요. 그래서 우리 엄마를 이 소란에서 구해주세요.

착한 아이군요. 예전에 저를 포함한 4형제가 마루에서 뛰면 어머니께서는 머리를 서로 묶어 놓으셨습니다.

지금도 굳건한 형제애는 그 때 어머니가 심어 준 것이죠.

 

들라로슈는 파리에서 알선업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 출신입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들라로슈를

그의 아버지는 아주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재능을 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도 아버지였습니다.

이런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는데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길보다

부모가 원하는 길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데 ---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모델과 사랑에 빠진 필리포 리포  Filippo Lippo Falling in Love with his Model / 1822

 

필리포 리포 (1406~1469)는 필리포 리피 (Lippi)라고도 표기되는 이탈리아 화가입니다. 그림의 내용을 보면

리포에 대한 이탈리아 화가이자 작가 바사리 (Vasari)의 책을 들라로슈가 읽었던 것 같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리포가 52세가 되던 해 프라토에 있는 성 마그리타 성당을 장식할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모델은 수녀원의 관리를 받고 있던 루크레치아 부티라는 어린 소녀였는데 어찌 어찌 해서 부티는 리포의

아이를 낳게 됩니다. 수녀원이 발칵 뒤집혔겠지요. 부티가 낳은 아이는 나중에 화가가 되는데 아버지만큼은

유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쪽 팔은 남자에게, 다른 한쪽 팔에는 묵주를 감고 있는 여인의 표정에는 망설임과

두려움이 보입니다. ()과 속()의 갈림길 앞에서 결정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아닌가요? 남자는 아주

간절합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별이라도 따다 줄 얼굴입니다. 그런데 52세의 남자 얼굴은 아니군요. 나이든 남자,

조심해야 합니다 ---- 에휴.

 

19세가 되던 해, 들라로슈는 에콜드 보자르에 입학해서 5년 동안 차례로 데보르네와 그로의 지도를 받습니다.

앙투앙 그로는 등신대 크기의 역사화를 제작하는 유명한 화가였고 그의 화실은 학생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림 공부가 끝날 때까지 들라로슈는 살롱전 출품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확실한 기준이 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옥에 갇힌 다르크  Joan of Arc in Prison / 1824

 

붉은 옷을 입고 잔 다르크를 심문하는 남자는 윈체스터 추기경입니다. 100년 전쟁 당시 영국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었죠. 험상궂은 얼굴의 추기경은 잔 다르크를 노려보고 있지만 그녀의 얼굴은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추기경의 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지만 잔 다르크의 손은 가슴에 멈춰 하늘의 이야기를 듣는 중입니다. 스무 살도

안 되는 처녀를 화형 시켜야 할 만큼 영국은 절박했었죠. 남아 있는 재판 기록 중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재판관 - 당신은 신의 은총을 입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아주 교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법에는 사제계급만이 신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거든요.

때문에  ""라고 답한다면 그녀 스스로 법을 어기는 셈이 되는 것이고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이제까지 하늘과

이야기 했다는 것이 거짓임을 말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잔 다르크 - 제가 만약 신의 은총을 입었다면, 신은 나를 계속 그 상태로 놓아둘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은혜를 입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문맹의 시골 처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맞습니까?

 

1822, 25세로 학교 공부를 끝낸 들라로슈는 살롱전에 출품합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이

입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뜻밖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전시회를 통해서 들라크루아와 제리코를 알게

되었는데 세 사람은 평생 친구가 됩니다. 또 파리 역사화가들 모임의 핵심이 됩니다.

 

 

 

 

탑에 갇힌 에드워드 왕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King Edward imprisoned in the Tower / 1830

 

1674, 런던탑에서 두 구의 유골이 발견됩니다. 200년 전에 죽은 두 왕자의 것이었는데 에드워드 4세의

두 아들로 밝혀졌습니다. 에드워드 4세는 장미전쟁 중 왕위를 놓고 뺏고, 빼앗기는 와중에 등장하는 이름이죠.

원래 그는 동생인 리처드 3세와 함께 왕위를 다시 차지하고 훗날 동생에게 자신 아들들의 미래를 부탁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리처드 3는 꼽추에 사악한 인물이었죠. 그는 자신이 왕이 되고자 조카들을

살해합니다.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군요.

하루 하루 다가 오는 죽음의 공포가 아이들의 눈에 어려있습니다. 침상 옆 개의 자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혹시

죽음의 사자가 오는 것을 느낀 것일까요? 그림 전체에 긴장이 감돌고 있습니다.

 

살롱전의 출품은 나름대로 들라로슈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고 합니다. 작품 주제는 주로 영국 역사에서 가져

왔는데 그 후 10년 이상 계속됩니다. 파리 시내에 화실을 마련한 그는 단 하루도 헛되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실력 날이 갈수록 늘었고 지식도 많았습니다.

 

 

 

 

크롬웰과 찰스 1   Cromwell and Charles / 1831

 

왕권 강화를 추구했던 찰스 1세의 왕당파와 의회의 권리를 주장했던 의회파와의 전쟁은 크롬웰이 등장하면서

찰스 1세의 참수로 막을 내립니다. 광장에서 참수를 당했던 찰스 1세의 시신을 열어 보는 크롬웰의 모습은

거짓이라는 평론가들의 말이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들라로슈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돌려 놓고자 했던 사람들 가운데 승리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극단적인 결과 아니었을까요?

패자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세상을 저는 야만이 가득한 곳이라고 봅니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만큼은 패자도

조용히 물러나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지금은 --- 패자에 대한 승자의 적개심이

오히려 커지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찰스 1세의 시신을 보는 크롬웰의 표정이 즐거워 보이시는지요?

 

1832년 아카데미 회원이 된 들라로슈는 그 다음 해 36세의 나이로 에콜드 보자르의 교수로 임명됩니다. 거꾸로

계산하면 졸업 후 12년 만에 모교의 교수가 된 것이죠. 2년 뒤 스승인 그로의 화실을 인수합니다. 곧 들라로슈의

화실은 파리에서 가장 실력 있는 화실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학생들이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하니까 --- 들라로슈의 가르치는 솜씨도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제인 그레이의 처형   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 /97cm x 117cm / 1833

 

신부가 눈을 가린 여인의 팔을 끌고 참수대 위에 목을 올려 놓으라고 인도하고 있습니다. 도끼를 든 도부수의

표정도 침통합니다. 그림 속에 제대로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신부와 도부수뿐이군요. 흰 천으로 눈을 가리운

제인 그레이의 나이는 이제 열 일곱 살입니다.

제인 그레이는 헨리 7세의 외증손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해서 여러 나라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인생이 엉망이 된 것은 아버지와 시아버지의 권력욕 때문이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 때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그녀의 시아버지는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동생인 메리 튜터와 엘리자베스를

제치고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앉힙니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기절을 했다고 하죠. 그러나

국민들은 메리 튜터를 지지했습니다. 시세의 흐름을 깨달은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는 그녀를 설득해서 왕위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그녀가 왕위에 있었던 기간은 9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9일의 여왕(Nine Day’s Queen)

이라고도 하죠. 메리 튜더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자 마자 제인 그이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아버지를 런던탑에

가둡니다. 죄명은 반역이었고 체포된 지 7개월 뒤 남편과 함께 참수를 당합니다. 아버지는 2일 뒤 역시 참수를

당했죠. 열 일곱살에게도 반역의 죄를 물어 목을 자르는 것이 정치이고 권력욕입니다. 그림 속 신부가 참 밉군요.

나중에 평론가들은 참수된 장소가 공개 된 곳이었다는 점과 쓰인 도구가 실제의 것과 다른 다는 것을 지적하며

작품에 오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무렵 들라로슈는 화가의 딸인 루이지와 결혼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그의 생애 전체를 그녀에게

빠져있었습니다. 들라로슈가 48세 되던 해 아내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 충격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을

보면 부부 사이의 정이 아주 좋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저하고 다시 결혼 하지 않겠다는

아내의 말이 떠 오릅니다.

걱정입니다 ---- 다시 태어나면 누군가를 만나서 호구조사부터 또 시작해야 하는 불편을 겪을텐데 말이죠. 

 

 

 

 

기즈공 암살자들  The Murder of the Duke of Guise /57cm x 68cm / 1834

 

오른쪽에 홀로 쓰러져 목숨을 거둔 사람은 기즈 ()입니다. 스페인 왕의 지지를 업고 프랑스 왕을 몰아 내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했던 기즈공은 불루아 성에서 앙리 3세가 보낸 자객들에 의해 암살을 당합니다. 기즈공이

쓰러져 있는 반대편에는 그를 죽인 암살자들이 나가는 앞에 모여 있습니다. 권력에서 사람은 죽어서도

혼자입니다. 냉혹한 세상의 최종 목표는 힘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힘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힘이 영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요? 사람들은 그렇게 단발적인 힘에 목숨을 걸까요?

멍청한 사람들만 목숨을 겁니다.

 

1830년 중반 프랑스에서 가장 환영 받는 화가는 들라로슈였습니다. 미술가들과 대중들로부터 새로운 역사화

장르를 이끄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신고전주의 화풍에서 배운 섬세한 묘사와 빛나는 마지막 처리는

훗날 다른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매력적인 작품들이었습니다.

 

 

에콜드 보자르의 시상홀  The Ecole des Beaux-Arts / 1837

 

에콜드 보자르의 신설 건물에 벽화 제작 의뢰를 받고 들라로슈가 그린 작품입니다. 길이가 27m에 이르는 대작

이죠. 이 작품은 고대부터 당시까지 총 75명의 예술가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앉아 있는 세 사람은

그리스 조각가 피디아스와 조각가 익티누스, 화가 아펠리스입니다. 피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 건설의 총감독

이었고 익티누스는 설계자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술과 관련된 모든 분야의 융합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죠.

1837년 직접 벽에 그림을 시작한 들라로슈는 1841년 끝을 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1855년 불의의 화재로

손상을 입습니다. 들라로슈는 바로 작품 복원에 착수했지만 그 다음 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결국 작품의 많은

부분은 로베르 플러리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아마 죽는 순간까지 가슴에 그림이 남았겠지요. 여인들이

보이는군요. 예술가를 그린 것은 아니고 이상적인 여인들의 모습을 뮤즈나 여신들의 모습으로 남긴 것입니다..

----, 남자들만 있는 모습 보다는 훨씬 사람 사는 세상 같습니다.

 

1837년 본격적인 첫 종교화를 전시했는데 비평가들과 관객들로부터 혹평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들라로슈는

전시회를 중단했는데 이 때의 충격도 한 몫을 했겠지요. 그러나 1837년 에콜드 보자르의 건물에 그린 작품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습니다.

 

 

 

 

헤로디아    Herodias / 1843

 

헤로디아는 헤롯의 아내입니다. 원래는 헤롯의 형수였는데 부적절한 관계가 유지되면서 왕비가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 사실을 비판하자 앙심을 품고 있던 헤로디아는 딸 살로메를 사주하여 헤롯왕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게 합니다. 살로메는 오늘도 예술 분야에서 팜므 파탈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고 헤롯은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쟁반 위 세례자 요한의 머리는 어둠 속에 있고 살로메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습니다. 살로메가 세례자 요한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아니군요.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 때문에 그림은 냉정하고 잔혹하게 다가옵니다. 할 수 없는 약속을 했던, 정신 나간 헤롯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1843 46세의 나이에 들라로슈는 화실 문을 닫고 초기 이탈리아 미술을 공부하기 위하여 로마로 떠납니다.

로마는 5년 전에도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번 여행에는 제자들 3명과 동행했습니다. 그 제자 중 한 명이

장 제롬입니다.

 

 

 

 

젊은 기독교 순교자     Young Christian Martyr  / 1855

 

손이 묶인 여인이 물 위에 떠 있습니다. 죄명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라는 이름이 보편화 된

것은 로마 제국시대부터이니까 여인이 떠 있는 강의 이름이 테베레 라는 것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여인을 강물에

던진 사내의 모습은 왼쪽 그림자 속에 숨어 있지만 숨진 순교자의 얼굴 위에는 성인임을 나타내는 광륜이 달빛

처럼 물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전시장에 걸리자 관객들은 너무나도 감동적인 장면 묘사 때문에 자신이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제작된 이 작품은, 어쩌면 아내의 영원한 안식을 원했던 그의

마음이 담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들라로슈의 작품에는 허세가 없고 극적인 구성이 있어서 인기가 좋았습니다. 때때로 부정확한 장면 묘사가

있었지만 구성에 더 치중했다고 보는 것이 들라로슈에게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이겠지요. 사실 극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는 자연주의 화가들에게 닿아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연주의와 신고전주의 그 사이를 걸어 갔습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Napoleon Crossing the Alps / 1850

 

나폴레옹을 묘사한 작가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자크 루이 다비드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에 한 손을 넣고

있는 나폴레옹의 포즈는 곧 상징입니다. 속병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손을 넣고 있었다는 의사들의 판단도

있지만 저도 어렸을 때 저런 포즈를 흉내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들라로슈의 나폴레옹은 형형한 눈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해 못할 묘사도 보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폴레옹이 걸친 바지가 얇아 보입니다.

저 추운 고개를 아주 얇은 바지만 걸치고 있습니다. 대장은 어디엘 가도 튀어야 되나 봅니다. 그런데 고민하고

있는 저를 보던 아내가 도와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기능성 옷을 입었네, 그러니까 안 춥지!

그 시절에도 기능성 옷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내 말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믿는 편이 너무 추워서

손을 옷 속에 넣고 떨리는 몸을 잡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보다 나폴레옹을 더 예우 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들라로슈는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4장의 그림으로 작업하던 중 59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살아서는 역사화가로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세상을 떠나고 난 후 그의 명성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인상파와 아방가르드가 등장하면서 그의 이름은 비평가들에 의해 깎여 나갔기 때문이죠. 그러나

쉽게 이해되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의 작품은 일반 대중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사진기가 발명된

것을 보고 들라로슈가 했다는 말이 더 오릅니다.

이제 회화는 끝났다!

들라로슈 선생님, 아직도 회화는 유효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할 것입니다. 사진이 못 따라 오는 부분이

있거든요. 화가가 남긴 손의 흔적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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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화가 진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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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여행 | 작성시간 18.11.2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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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questions | 작성시간 18.11.2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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