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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비드가 고전의 세계 로마로 향한 건 1775년 10월이었다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9.05.16|조회수14 목록 댓글 0

다비드가 고전의 세계 로마로 향한 건 1775년 10월이었다

 

 

 

 

다비드가 고전의 세계 로마로 향한 건 1775년 10월이었다. 약 170cm 정도 키에 강렬한 눈을 가진 그의 피부는 검었고 머리카락은 약간 곱슬이며 반듯한 용모가 사람들에게 차분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비엥을 선두로 한 그룹에 끼어서 로마로 향했는데 비엥은 로마의 코르소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책임자로 부임하기 위해 제자들을 인솔하고 갔다. 일행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파리를 떠난 지 한 달 남짓 후였는데 볼로냐와 피렌체에 잠시 체류하면서 주요 대가들의 작품을 습작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부터 로마는 다시금 유럽 예술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1738년 고고학자들이 헤르쿨라네움을 발굴했고 십 년 후에는 폼페이를 발굴했으므로 고대 유적과 유물을 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대여행길에 올랐다. 그들은 고대 번영의 수도 로마에 오래 머물면서 이탈리아 각지를 두루 여행했다. 헤르쿨라네움(현재 이탈리아 명칭으로 에르콜라노Ercolano)은 나폴리 동남쪽 베수비우스Vesuvius 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로서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비우스 산 분화 때 폼페이와 함께 매몰되었지만 폼페이와 달리 용암이 응회암으로 변했으므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미술사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고대 그리스 미술에 대한 찬양으로 로마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1755년 5월에 출간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하여』에서 빙켈만은 “이상적 예술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고대의 모방”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유럽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이론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빙켈만은 이 책을 출간한 후 이탈리아로 가서 1759~64년에 걸쳐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비안코니 서한』(사후 간행),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브륄 서한』(1762년에 간행), 『최근의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퓌슬리 보고』(1764년 간행) 등 세 편의 보고서를 집필했다. 빙켈만은 아테네의 황금기였던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인의 조각을 찬양하는 가운데 제스처와 표정의 특징으로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Edle Einfalt und stille Gr슙e”를 꼽았다. 이 말은 날개를 달고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고대 그리스인의 미를 규정짓는 말이 되었다.

 

<라오콘>을 고대의 걸작으로 꼽은 빙켈만은 이 작품을 찬양해마지 않았다.

 

그리스 걸작들의 일반적이며 탁월한 특징은 결국 자세와 표현에서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이다. 바다의 수면이 사납게 날뛰어도 그 심해는 늘 평온한 것처럼 그리스 조상들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영혼을 나타냈다. 이 영혼은 격렬한 고통 속에 있는 <라오콘>35 군상의 얼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고통은 얼굴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근육과 힘줄에도 나타나 있어서, 우리는 얼굴이나 육체의 다른 부분을 보지 않고 고통으로 움츠러든 하복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얼굴이나 전체 자세에서는 전혀 고통에 찬 격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고통은 우리의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위대한 이처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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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로마에는 각 나라에서 온 예술가들로 붐볐다. 영국인 해밀턴36과 독일인 멩스37는 이탈리아에 오래 체재하면서 고전의 아름다움을 탐닉했고 두 사람을 통해 독일과 영국에서 고전주의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유럽인들의 대여행은 이탈리아에 큰 수입을 안겨주었는데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 온 관광객들 가운데는 미술품 콜렉터와 딜러들도 많았으며 그들은 로마 외에도 주요 고대 도시들에 오래 머물렀다. 관광객들은 현지 화가들을 고용해 고대 유적을 배경으로 자신의 초상을 그리기 보통이었고 귀국할 때는 고대 유물을 몇 점 가지고 가기 예사였다.38 당시만 해도 유물들이 유적지에 널려 있었다. 여행자들 다수의 관심은 고대 그리스 문화가 서양문명 전반에 미친 영향에 있었다.

 

로마로 떠나기 전 파리에서 다비드는 친구들에게 자신은 생기 없는 고대 미술에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1780년까지 5년 동안 로마에 체류하면서 그의 작품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1779년 7월과 8월 나폴리를 방문한 후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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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엥은 학생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는데, 여름에는 5시에 기상시키고 6시부터 8시까지 실제 모델을 그리게 했으며 겨울에는 저녁에 조명을 사용해 모델을 그리게 했다. 바티칸 뮤지엄, 교회, 궁정에 있는 작품들을 모사하게 했으며 의무적으로 파리로 발송해야 하는 부과물에 대해서는 학생들 자율에 맡겼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의 활동에 제약을 두었는데 외출했을 경우, 겨울에는 오후 10시, 여름에는 11시까지 아카데미로 돌아와야 했다. 심지어 그는 학생들로 하여금 유니폼을 입게 했는데 그의 말을 거스르면 파리로 보내졌다. 다비드는 비엥의 지침을 따랐고 로마의 의상과 유적들을 드로잉하면서 고전의 아름다움을 몸소 체험했다.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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