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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트렌트 종교회의와 매너리즘

작성자카페여행|작성시간19.06.07|조회수14 목록 댓글 0

트렌트 종교회의와 매너리즘

 

 

 

 

트렌트 종교회의는 예술에서의 형식주의와 감각주의 모두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트렌트 종교회의는 도덕적 엄격주의와 반형식주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운동과는 달리 예술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 문예는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루터가 문예를 얼마나 하찮게 보았는지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트렌트 종교회의의 입장은 루터주의에 비해 예술에 관해 매우 온건적이었습니다. 루터는 문학이 고작 신학의 시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조형예술에서 칭찬할 만한 점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우상숭배를 이교도의 주물숭배와 동등하게 취급했는데, 그가 말한 우상숭배에는 실재 종교와는 별로 관련 없는 르네상스의 종교화뿐만 아니라 미술을 통해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는 자체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그림으로 장식하는 것 자체도 우상숭배로 보았습니다. 이에 반해 트렌트 종교회의는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술에 적대적인 이단자들과는 달리 자신들은 예술에 우호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가톨릭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으며, 더 나아가 예술을 이단자의 교리를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심미적 문화는 선전수단으로서의 예술의 가치를 더 없이 높이 올려놓았습니다. 트렌트 종교회의는 중세에서 깨닫지 못한 민중 교화의 효과적인 수단을 예술에서 발견했습니다.

 

트렌트 종교회의 입장의 기본이 되는 예술적 표현이 매너리즘인지 바로크인지에 대해서는 미술사학자들마다 견해가 분분합니다. 아놀드 하우저는 연대적으로 봐서 매너리즘이 반종교개혁에 더 가깝고, 트렌트 종교회의 기간의 정신주의적 태도도 감각적인 바로크보다는 매너리즘에서 좀 더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 운동의 예술적 프로그램, 즉 대중에까지 예술을 통한 가톨릭의 전파가 이루어진 것은 바로크에 이르러서라고 했습니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이 종교회의의 시기에 가장 널리 보급되었고, 가장 활발했던 형식이기는 했지만 반종교개혁 운동의 예술적 임무, 즉 반종교개혁 운동이 제시하는 교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방향은 아니었음을 지적했습니다.

 

종교회의의 시기에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매너리즘 예술가들이 여태까지의 기독교적 문화와 조합적인 사회질서의 체계 속에서 누리던 사회적 위치를 대신할 만한 것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예술구조가 복잡해진 상황에서 예술과 예술가들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들이 이용하고자 하는 예술수단의 효용성을 쉽게 파괴시키는 결과가 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술가들의 경우 그들에게 깊은 기독교 신앙이 있다 하더라도 예술적 전통의 현세적이고도 이교적인 요소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표현 수단이 지닌 상이한 요소들 사이의 내적 모순이 해결되지도 않았고, 또 해결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갈등의 중압감을 견뎌낼 수 없었던 예술가들은 기교에 도취되거나 아니면 미켈란젤로와 같이 종교 속으로 도피했습니다.

 

매너리즘 시대의 예술가들은 중세의 수공업적 예술가들을 비롯해서 수공업적 단계에서 벗어나고 있던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도 여러 면에서 근거가 된 모든 요소들, 즉 사회에서의 견고한 위치, 길드의 보호, 교회와의 명확한 관계, 대체적으로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던 전통과의 관계 등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개인주의 문화는 중세에서 이들에게 폐쇄되었던 무수한 가능성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자유라는 진공 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때로는 자신을 상실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만들었습니다. 16세기는 정신의 변혁기였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세계상을 재정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적 충동에만 의존할 수 없어 자유와 강제의 틈바구니에서 방황했으며, 정신세계의 질서를 위협하는 혼돈에 노출되었습니다. 하우저는 이들에게서 처음으로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 즉 생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현실도피적이며, 역사적으로 구속되어 있으면서 겁 없이 반항하고, 노출증에 가깝도록 자신을 내세우는 주관주의와 더불어 최후의 비밀은 끝내 감추는 폐쇄성을 지니는 등 내적 분열로 신음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때부터 예술가들 가운데 괴짜와 기인, 정신병자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파르미지아니노의 <성 캐터린의 신비로운 결혼>, 1530년경, 패널에 유채, 74.2-57cm.

 

 

야코포 다 폰토르모의 <이집트의 요셉>, 1515년경, 패널에 유채, 96,5-109.5cm.

 

 

로소 피오렌티의 <아드로의 딸을 보호하는 모세>, 1523년경, 패널에 유채, 60-117cm.

 

 

엘 그레코의 <라오콘>, 1610년경, 캔버스에 유채, 137-173cm.

 

 

파르마 태생 파르미지아니노Parmigianino(1503-40)는 생애 후반에 연금술에 심취했고, 우울증에 걸려 있었으며, 세간에서 보기에는 폐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야코포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1494-1557)는 유년시절부터 심한 우울증에 걸려 고생했으며, 나이가 들수록 대인기피증이 심해지고 폐쇄적이 되었습니다. 로소 피오렌티노깬내 Fiorentino(1494-1540)는 정신병자였고, 자살로써 생애를 마쳤으며,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는 대낮에도 방안에 커튼을 내리고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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