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크랩]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 2

작성자골롬바2|작성시간19.06.16|조회수462 목록 댓글 0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773)

Pompeo Batoni

oil on canvas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Bartolomé Esteban Murillo.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70-74.

Oil on canvas.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방탕한 아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이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요구했고,

유산을 챙긴 작은 아들은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탕진하였다.

곤궁에 허덕이던 그는 돼지를 치게 되었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길 간절히 바랬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멀리서 아들을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즐거운 잔치를 벌였다.

그때 들에 나가있던 큰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 군요” 라며 화를 낸다.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누가 15:1~-32 요약)

참회의 순간

누가 복음이 전하는 이 비유는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 이어 나오는

매우 시적이고도 심리적 통찰력이 뛰어난 일화이다.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와 방탕한 아들, 자비로운 아버지,

모범적인 아들이 엮어내는 분명한 갈등은 미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 이미지는 중세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좌) [방탕한 아들] 1330~1350년 상아함,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우) [돌아온 탕아] 14세기경, 공예품, 상아, 루브르 박물관 소장

 

 

1330~50년 파리에서 제작된 상아 장식함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은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루브르에 있는 상아판에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장면부터 회개하는 장면까지를 담고 있다.

상단의 상아판 맨 왼쪽,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뒤쪽에 서 있는 베일을 쓴 이는 어머니로 여겨진다.

유산을 받은 아들은 말을 타고, 재산과 하인을 앞세우고 집을 떠난다.

이 장면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케 한다.

하단의 상아판, 왼쪽 두 장면은 각각 아들이 친구들과 연회를 베풀며

재산을 탕진하는 모습과 창녀와 어울리는 모습이다.

오른편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과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이 새겨져 있다.

 

 

 

 DÜRER, Albrecht
The Prodigal Son
c. 1496
Engraving, 261 x 202 mm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1496년 경 뒤러는 방탕한 아들의 참회의 순간에 주목하여 이를 동판화로 제작한다.

화면 후경에 펼쳐진 농장은 낡고 방치되어 불결한 분위기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기괴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돼지들, 특히 부모 곁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새끼돼지는

유복한 출신의 젊은이의 비참한 상황을 더욱 강조한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나온 후, 돼지의 먹이를 탐낼 정도로 몰락했다.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 그는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 구나”(누가15:17)며 그제야 제정신이 들고, 무릎을 꿇고 참회를 한다.

이 일화가 강조하는 참회라는 메시지 덕에 서방교회에서는

사순절의 세 번째 주일에 이 복음을 낭독하고,

동방교회는 부활 두 주일 전을‘방탕한 아들의 주일 (Sunday of the Prodigal Son)’로 지낸다.

풍속화로 다루어진 [방탕한 아들]

집을 떠난 방탕한 아들에 대한 세세한 상상은 16세기 북유럽 화가들에 의해 풍속화로 다루어진다.

앤트웨프 길드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헤메센 (Jan Sanders van Hemessen)은

[방탕한 아들]이 쾌락에 빠져있는 모습을 풍속화로 그리고 있다.

화면 전경의 아들은 술병을 들고 창녀들에게 둘러싸인 호색한으로 표현되었으며,

화면 왼쪽 육체적 욕망을 상징하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포주로 여겨지는 늙은 여인, 만취한 노인, 그리고 도박에 열중한 두 남녀의 탐욕스러운 모습,

이들을 조롱하는 듯 쳐다보는 악사등 이 작품에는 탐욕, 탐식, 탐색, 나태와 같은

감각의 죄에 빠진 타락한 인간 군상들이 개성적이고도 풍자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화면 원경, 왼쪽 돼지를 치다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아들의 모습이 나타난 이야기의 주제를 상기시킨다.

 

 

Hemessen, Jan Sanders van

The Prodigal Son
1536
Oil on oak, 140 x 198 cm
Musees Royaux des Beaux-Arts, Brussels

 

 

 

Gerrit van Honthorst

The Prodigal Son
1622
Oil on wood, 130 x 196 cm
Alte Pinakothek, Munich


1623년 네덜란드의 화가, 헤라드 반 혼토르스트(Gerard van Honthorst)가 그린

[방탕한 아들]에도 세 쌍의 젊은 남녀와 포주로 여겨지는 노파가 등장하여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화면 전경 푸른 옷을 입고, 거의 눕다시피 몸을 젖힌 이가 방탕한 둘째 아들로

그가 들고 있는 유리 술잔은 무절제와 낭비를 의미한다.

혼토르스트는 1616년 이탈리아 여행 후,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화면을 어두운 배경과 강한 하이라이트의 대조로 이끈다.

이 작품에서도 노파가 들고 있는 촛불로 인해 주인공인 작은아들과 창녀의 얼굴에 빛이 집중되고,

이들의 쾌락적인 표정이 환히 드러난다.

자비로운 아버지

종교개혁과 반종교 개혁기를 거치면서 화가들이 방탕한 아들을 묘사하는 관점에는 변화가 생긴다.

바로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그를 맞아주는 아버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1669년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를 제작한다.

이 작품은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려진 것으로 강력한 명암대비보다는

부드러운 빛을 사용해 화면의 요소들을 융합한다.

화면 전경,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머리는 마치 죄수처럼 밀어버린 거칠고 비루한 모습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무릎을 꿇은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려,

혹은 노안으로 시력을 잃은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들의 어깨에 놓인 아버지의 커다란 손에서는 보호와 따뜻함이 느껴진다.

 

 

Rembrandt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c. 1669
Oil on canvas, 262 x 206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embrandt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detail)


이 아버지의 손을 자세히 보면 왼손과 오른손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튈프박사의 해부학 교실]에서 손의 해부장면까지 정확하게 묘사했던 렘브란트가

왜 이렇게 형태가 차이가 나는 손을 그렸을까?

부드럽게 묘사된 아버지의 오른손은 모성을, 그리고 굵고 투박하게 묘사된 왼손은 부성을 상징한다.

즉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손으로 성부의 자비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성부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던 중세시대,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손이었음을 상기하면

이러한 표현은 어색하지 않다.

그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포옹하는 두 부자 뒤로, 서 있는 한 여인과 앉아있는 남자가 어둡고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 빛은 화면 중경에 서 있는 큰 아들의 얼굴을 비춘다.

큰 아들은 방탕한 아들에게 이런 환대를 하는 것이 공정한지 의문을 가지며 아버지에게 불평을 한다.

물끄러미 서 있는 큰 아들과 포옹하는 두 부자 사이의 거리는

그들을 질투하는 큰아들의 심리적 거리로 여겨진다.


 


Rembrandt

The Anatomy Lecture of Dr. Nicolaes Tulp
1632
Oil on canvas, 169,5 x 216,5 cm
Mauritshuis, The Hague

 

 

Lionello Spada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7 C

Oil on canvas, 119cm×160cm

Musée du Louvre, Paris


한편 카라바조의 제자로 알려진 볼로냐 출신의 화가,

레오넬로 스패다 (Leonello Spada)가 그린 [돌아온 탕자]에는

질투하는 큰 아들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고,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모습만이 등장한다.

어깨가 들어날 만큼 헤진 옷을 입고, 걸인처럼 지팡이를 짚고 온 작은 아들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누가 15:17)라며

아버지의 처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순명을 상징하는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아버지는 지친 아들을 자신의 망토로 감싸 안는다.

자비를 구하는 애처러운 아들의 눈빛과 자비로운 아버지의 눈빛은

칠흑 같은 배경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글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정은진)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sola fides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