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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Arles): 고대 로마 유적과 열정적 예술의 조화

작성자방브라치..|작성시간18.09.17|조회수172 목록 댓글 2

4월 10일(화): 아르르(Arles): 고대 로마 유적과 열정적 예술의 조화

 

오늘은 우리가 바르셀로나부터 시작한 남부 유럽 여행 33일 째 되는 날이다.  낭만과 사랑, 문화와 예술의 고장을 찾아서 한달 이상 무사히 다닐 수 있게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말세이유에서 이틀간 푹 쉬고 오전 10시 30분에 프로방스의 마지막 마을 아르르(Arles)로 떠났다.(6,938Km)

4월 7일 밤에 이곳에 도착하였으나, 투우 플라멩고와 파엘라(볶음밥)로 유명한 부활절 축제로 인구 5만 5천 여명의 주민과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축제의한마당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호텔 방을 구할 수 없어서 Nimes로 목적지를 변경하고 오늘 11시 30분에 이곳에 다시 왔다.(7,029Km)

길 가 주차장에 운좋게 주차하고 구시가지로 들어 갔다. 나는 이 곳에 위대한 그러나 특이한 두사람의 남자를

만나러 왔다.


들어서자 마자레스토랑 앞에 젊은 여인 마네킹이 서 있다.

알폰스 도데가 지은 단편 소설 '아르르의 여인'을 상징하고 있다. 아르르에 방문하는 이들을 환영하고 있다.

비제의 가곡' 아르르의 여인'의 정감어린 음악이 내 귀를 맴돈다.

정공은 아르르의 여인에 다가 가 뽀뽀를 하며 인사를 하니 Mrs. 정이 이 모습에 짙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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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르는 기원전 1세기, 카이자르 시대에 로마의 식민지가 된 후 1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개발된 도시다. 4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가끔 들렸으며 '갈리아의 작은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로마에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아직도 많은 로마 유적이 남아 있어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원형 투기장으로 가는 일행들.

주위의 쓰레기는 2일 전에 끝난 축제의 후유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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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프랑스 최대의 경기장으로 지름이 136m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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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Trophime 교회: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교회는 로마 유적이 많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중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이교회는 중세때 산티아고 드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에 있어

 많은 순레자가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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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 앞에서 한국인 유학생 부부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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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담벼락에서 내려다 본 이르르 마을 의 집들. 아르르의 특유한 누런 색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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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원형으로 된 계단식 좌석이 무대를 내려다 보고 있는 고대극장이다. 현재는 몇개의 대리석 기둥과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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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중심인 레퓨블릭 광장, 오른편 건물은 시청사,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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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카페"

후기 인상파의 거장 반 고흐가 아르르에 2년 여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이 카페에 들려

쉬기도 하고 한잔 마시며 괴로운 인생을 그림으로 달랬다. 고흐는 '밤의 카페(Le cafe la Nuit)'라고

이름 짓고 그림을 그렸다.  우리 일행도 고흐가 마신 Arles포도주를 들며 그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Lunch도 하였다. 샐각보다 값이 비싸지 않았다.

Wine은 14-22유로, 식사 메뉴는 13-15유로 그리고  lunch special은 7-8유로 정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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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반 고흐가 아르르에 도착하여 그가 하숙한 노란집 부근의 카페를 그렸다. 

카페의 밤(Le Cafe La Nuit) 풍경이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에는 세 가지 빛이 밤을 밝혀 주기 때문에 생동감이 있다.

테라스의 가스등, 건물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 그리고  밤하늘의 별빛이 노란색, 푸른 색, 주황색으로

고흐의 영혼의 색갈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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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가 입원한 적이 있는 당시의 정신병원, 지금은 종합 문화센터같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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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당시에 그린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 있다.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100여년전 나무가그대로 지금껏 있다.

그는 정신병원을 드나들면서 정원의 꽃과 나무 하나 하나와 그가 거쳐간 방들을 보면서

이곳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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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이 반 고흐가 입원한 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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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병원의 회랑을 고흐가 그렸다.

 


고흐가 그린 '별이빛나는 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 반 고흐 
[Starry Night over the Rhone]
 

 

 후기 인상파의 거두 아르르의 두 남자를 만나고 오후 3시 24분 '안도라'를 향하여 떠났다.

잊지 못할 프로방스여, 안녕! 다시 보자. 

 

 

   (수필)                                 아르르의 두 남자

                                                                                                      표 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는 ‘갈리아의 작은 로마’라고 불리 우는 아르르가 있다. 기원전 1세기 줄리어스 시저가 프랑스를 정복하면서 건설한 도시로 로마시대의 유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원형 투기장과 고대 극장 그리고 공중목욕탕과 같은 오래된 유적이 잘 보존되어있어 이 마을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있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나도 친구 부부와 함께 스페인과 폴투갈 그리고 남프랑스 여러 마을을 순례하는 도중 한 달 여 만에 이곳을 찾았다. 오래 전부터 이곳에 꼭 오고 싶었었다. 나는 마을에 들어서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프랑스 작가 ‘알폰스 도데’의 ‘아르르의 여인’으로 알려진 이곳에 위대한 남자의 고통과 열정에 찬 삶의 여정을 볼 수 있어서이다.

  끝없는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 분홍의 체리 꽃이 펼쳐진 이 마을로 오는 길은 영화 ‘마농의 샘’에서 보았던 풍경과 같다. 언덕이 많고 그 위에 집들은 주황색타일의 지붕과 흰색의 벽, 그리고 푸른 숲이 어우러져 있다. 프로방스 특유의 강렬한 햇살과 자연이 뿜어내는 빛과 색의 조화로 모든 이를 매료시킬만한 곳이다. 이곳을 채색의 마술사 반 고흐가 미친 듯이 심취했던 '고흐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후기 인상파 폴 고갱이 이곳에 와서 두 달 간 고흐와 짧은 교류를 나누며 그림을 그린 곳이다.

   약간 붉거나 황토색의 페인트를 칠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는 좁은 골목길로 가니 고흐가 자주 다녔던 카페가 나온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곳이다. 늦은 밤 카페에서 나오는 가스등의 진한 노란색과 밤하늘의 파란색은 카페 벽의 초록색으로 인해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잘 어우러진 그림이다. 반 고호 특유의 색갈이다.

  고흐는 밤늦게까지 혼자서 상념에 빠지거나 고갱과 함께 술을 마시며 속내를 들어 내놓고 토론도 하고 언쟁도 벌인 곳이다. 고흐는 이곳을 ‘밤의 카페(Cafe la Nuit)라고 이름 지었다.  그래서 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나는 그가 즐겨 마신 Arles의 와인을 들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예술을 불꽃처럼 불태운 비운의 천재화가를 생각한다.


  ‘봄이 되면 프랑스 남부 푸른빛과 눈부신 땅으로 갈 생각이네’  그의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화상(畵商)인 테오는 형 고흐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는 후원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8년이 되던 고흐는 인상파 그림과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그때까지 그리던 렘브란트나 밀레의 어두운 화풍을 버리고 밝은 색채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활동했던 파리를 떠날 계획을 하였다. 그리고 마음이 맞는 화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 날 ‘남부 화실’을 구상한다.

 

  1888년 2월 20일 고흐는 아르르 역에 도착한다. 이곳에 와서 그는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를 지방에 머물었던 2년 여간 400여 작품을 완성하여 10여 년 간 그림을 그린 생애 중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이글거리는 밝은 태양, 빛나는 별, 삼나무 숲, 카페, 강과 다리, 맑고 밝은 아르르의 풍광에 사로잡혀 건강도 돌보지 않은 채 오로지 그림만을 그렸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화가 고갱을 초청한다. 고갱은 반 고흐처럼 생활비를 대주는 동생도 없어서 몹시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청을 받아들인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아침 기차 편으로 도착한다.     고흐는 노란 집을 빌리고 그 자신이 그린 해바라기 그림으로 실내를 정성껏 꾸몄다. 비전을 실현하려는 고흐는 고갱을 중심으로 ‘미술가 마을’을 추진코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일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두 사람의 의견은 자주 충돌하였고, 고갱의 오만한 성격은 반 고호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했다. 이들이 만난 지 두 달이 되는 12월 23일 밤 사소한  일로 반 고호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광기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린다. 다음 날 고갱은 그의 곁을 떠나고, 반 고호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져서 아르르 근처의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그러나 그의 창작활동은 정신병원에서 요양 중일 때에도 더욱 불꽃을 피웠다. 퇴원을 하고서도 혼신의 열정으로 그림을 그리다  1년 후 오베르 마을에서 권총 자살로 37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은 에고이스트들이다. 주위 사람들이나 가족들이야 어떻게 되었던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예술적 성취만을 생각 하였다.

  폴 고갱의 경우는 고흐보다 더 이기적이다. 삼십대 후반에 잘나가던 주식 중개사 일을 집어치우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아내와 자식을 저버리고 집을 나간다. 고흐와 헤어진 그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이티에 정착해 원주민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여생을 마칠 때까지 한 번도 가족을 찾지 않는다.


  후기 인상파의 거장 반 고흐와 폴 고갱의 두 달간의 동거와 충돌 그리고 이별한 사건은 두 사람의 기질적 차이가 얼마나 컸던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어찌 이러한 일이 두 화가들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우리 인간은 서로 다른 성격으로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경험한다. 가까운 부부사이나 친구 간에도 사소한 일로 서로의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여 헤어지는 경우가 많이 일어나지 않는가? 절친한 친구들이 여행 중 겪은 사소한 오해로 지금까지 30년의 우정을 단절한 경우를 보았다.

  우리도 45일 간 함께 생활하면서 여행하는데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하곤 하였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로 여행을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 친구와 함께 여행한 아름다운 과거를 생각하고 현재의 감동에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니 괴로움이 기쁨으로 바뀔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친구와 더 보람된 인생 여정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운 마음으로 45일 간의 남유럽 여행을 끝낼 수 있었다. 

  고흐는 친구 이상으로 고갱을 사랑하였다. '미술가 마을'을 만들어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랑했던 고갱에 실망이 컸고 그와의 활동에 감동이 사라짐에 따라 미술가 마을을 만들어 작품 활동을 해 보겠다는 미래의 희망이 사라져 버리고 고갱과 헤어지는 슬픔을 안게 된다.

  나는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를 본다. 그의 고통과 비애가 작품 속에 그대로 묻어난다. 고개 숙인 해바라기들은 고흐의 마음과 언어를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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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해바라기 그리기를 좋아 했다.  그는 폴 고갱을 맞이 하기 위해

해바라기 그림으로 그의 방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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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자화상; 1988년 12월 23일 밤  고흐는 옆방에서 자고 있는 폴 고갱의 침대로 칼을 들고

접근한다. 자고 있는 고갱을 고흐는 노려 보았다. 잠에서 깨어 난 고갱은 급히 피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고흐는 바로 그 칼로 귀를 자른다. 그리고 아르르의 한 병원에 입원한다.

폴 고갱은 12월 24일 아르르를 떠난다. 

 

 

                                 





          Georges Bizet(1838-1875) -
          L'Arlesienne Suite No.2 in Eb major Menuetto 
          아를르의 여인 조곡 제2번 미뉴엣

 

 

프랑스 문호 도데의 희곡 [아를르의 여인]에 삽입된 27곡의 극음악으로

후에 27곡중 4곡을 발췌해 관현악용으로 편곡하였음.

이것이 [제1모음곡]이며,그 뒤 다시 4곡을 발췌하여

편곡한 것이 [제2모음곡]이다.

특히 희극 제3막 2장 중에 연주되는“메뉴엣”은 플룻

독주로 청아하게 테마로 소개한 뒤 다소 거칠은 중간부를 두고

플룻은 하프의 오블리카토를 얻어 아름답게 끝난다.

이 메뉴엣은 오페라'아름다운 빼르뜨의 딸' 의 제 3 막에서전용한 곡이며

안단티노 알레그레또, E 플랫 장조, 4분의 3 박자. 하프의 반주를

타고 풀룻 독주를 시작한다

차츰 다른 악기를 추가하며 진행 하다가  풀룻과 하프만으로 조용히 끝난다






Georges Bizet  비제(Georges Bizet, 1838-1875)

성악 교사인 부친과 피아니스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유한 음악적 환경에서 자라면서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4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 악보, 문자 읽는 법을 익혀 뛰어난 기억력과 음악적 재능으로 9세 때에는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해서 피아노와 오르간 부문에서 우등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화성법과 푸가, 작곡을 배워 1857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피아노 솜씨는 당대의 거장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로마에서 귀국한 1860년 이후에는 극음악 작곡에 몰두하였다.

25세 때 발표한 오페라 '진주잡이(Les Pecheurs de Perles)'는 약간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었고, 34세에 쓴 극음악 '아를르의 여인(L'Arlesienne)'으로 처음 빛을 보게 되었다. 하기도 한다.  작품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희곡을 가지고 만든 것으로, 나중에 8곡만 추려 연주회용의 제1, 2모음곡으로 만들어졌다.

비제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오페라 '카르멘(Carmen)'은 1875년 3월 3일, 파리의 오페라 코믹 극장에서 초연 되었는데 도둑떼, 집시, 비천한 연초공장 여직공들이 등장하고, 칼부림하며 시체가 뒹구는 등 그 내용이 당시 귀족들의 취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카르멘의 참신한 소재와 혁신적 기법이 기존의 신화나 전설, 귀족들의 낭만적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던 오페라계에 일대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음은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비제는 카르멘이 초연 되고 3개월이 되는 6월 3일에 결핵성 호흡기 질환의 악화로 죽게 되는데 어떤 이는 비제의 죽음이 심혈을 다해서 작곡한 카르멘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있으며, 그의 재능이나 투지를 높게 평가해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만큼이나 아깝게 요절한 작곡가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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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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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페지기 | 작성시간 18.09.17 아를의 자취와 고흐의 발자국이 진하게 남아있네요.. 편안히 감상해봅니다.
  • 작성자위대한유산 | 작성시간 19.08.13 즐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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