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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생 중년소녀의 돌로미테 트레킹 3편

작성자카페 지기|작성시간26.07.06|조회수72 목록 댓글 0

56년생 중년소녀의 돌로미테 트레킹 이야기. 3편


돌로미테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을 묻는다면 화려한 정상보다 두 곳의 산장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카사 알피나에 짐을 풀고 저녁 무렵 숙소 주변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일정에 쫓기던 하루가 끝나고 나니 비로소 돌로미테의 시간이 보였습니다.

에메랄드빛 호수에는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잔잔한 물결이 일었고. 구름은 호수 위를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숲에서는 새소리만 들렸고. 멀리서는 나무배가 물살을 가르며 지나갔습니다.


호수 가장자리 바위 위에 친구와 함께 서서 두 팔을 벌렸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예순을 넘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소녀처럼 마음껏 웃었습니다.

호수를 한 바퀴 걷다 보니 같은 풍경인데도 보는 자리마다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숲 사이로 바라본 호수는 액자 속 그림 같았고. 들꽃 너머로 바라본 물빛은 에메랄드보다 더 맑았습니다.

호숫가에는 여행객보다 먼저 산책 나온 강아지들이 뛰어다니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돌로미테에서는 천천히 걷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보는 사람이라는 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스코이아톨리 산장으로 향했습니다.
산장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바위 능선과 석양이었습니다. 낮에는 회색이던 암벽이 해 질 무렵에는 황금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친퀘토레 산장은 마치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진 작은 집 같았습니다.
비록 기대했던 별은 보지 못했습니다.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아쉬웠지만. 대신 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노을이 별보다 더 오래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스코이아톨리 산장에서 가장 큰 배움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격전지였던 참호와 동굴을 직접 걸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좁은 바위길을 따라 이어진 참호. 총을 겨누기 위해 파 놓은 구멍. 바위를 깎아 만든 통로를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감탄하며 사진을 찍는 이곳에서. 불과 백여 년 전에는 서로 살아남기 위해 싸우던 젊은이들이 있었겠구나.

같은 산인데. 누군가에게는 절경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전쟁터였습니다.
그 순간 여행이 관광이 아니라 역사 공부가 되었고.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가주오이 정상 십자가 앞에서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창한 소원은 빌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달라는 기도. 그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내려다본 돌로미테는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걱정은 참 작은 것이었습니다. 산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구름은 흘러가고 또 흘러갔습니다.
마지막 날 코르티나 담페초에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토파나 전망대 3191m에 올랐습니다.

평생 많은 풍경을 보았지만. 그날 바라본 풍경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눈앞에는 돌로미테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파도처럼 이어졌고. 발아래에는 하트 모양의 호수가 조용히 숨어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자연은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도 바로 그곳에서 찍었습니다.

사진을 볼 때마다 풍경보다 그날의 바람과 냄새.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이 먼저 떠오를 것 같습니다.
이번 돌로미테 트레킹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두 개의 산장에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호텔에서는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장에서는 자연과 함께 잠이 듭니다.
새벽 햇살에 눈을 뜨고. 구름이 산을 넘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해 질 무렵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

그 모든 순간이 마음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습니다.
56년생 중년소녀는 돌로미테에서 높은 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천천히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건강하게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면.
별을 보지 못했던 그 밤도. 참호를 걸었던 그 시간도. 가족을 위해 기도했던 십자가 아래도.

모두 다시 만나고 싶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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