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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역사

[제미나이]역사적으로 중국의 '한중'쟁탈전이 많이 벌어졌나요?

작성자산들바람|작성시간26.06.22|조회수12 목록 댓글 0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중국 역사에서 '한중(漢中)'은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던 최고의 요충지이자 전장**이었습니다. 대륙의 패권을 쥐려는 영웅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땅입니다.

## 1. 한중(漢中)은 왜 그토록 치열한 땅이었을까?

중국 지도를 보면 한중의 가치가 한눈에 보입니다. 한중은 북쪽의 **관중 지방(시안/장안이 있는 중원의 핵심)**과 남쪽의 **파촉 지방(사천/청두가 있는 거대한 곡창지대)** 사이에 낀 분지 지형입니다.

험난한 진령산맥과 대파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당시 군사학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절대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 **파촉(사천)의 목구멍:** 사천 지방을 차지한 세력이 한중을 빼앗기면 중원의 침략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반대로 한중을 쥐고 있으면 중원으로 치고 올라갈 최적의 전초기지가 됩니다.

* **촉한의 인후(咽喉):** 삼국지에서 법정이 유비에게 "한중은 촉의 목구멍과 같으니, 이를 잃으면 촉도 없다"고 강조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 2. 역사를 뒤바꾼 결정적 '한중 쟁탈전'

### ① 한(漢)나라의 시작: 유방의 대반격

중국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전환점 중 하나가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초한지 시절, 패권을 잡은 항우는 라이벌인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변방 중의 변방이었던 '한중'의 왕으로 임명해 사실상 유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유방은 한중에서 힘을 기른 뒤, 항우의 방심을 틈타 장도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몰래 다른 험로로 빠져나가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의 계책으로 중원을 기습했습니다. 결국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자신이 힘을 길렀던 고향과도 같은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제국의 이름을 **'한(漢)나라'**라고 지었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주류 민족을 뜻하는 '한족(漢族)', 글자를 뜻하는 '한자(漢字)'의 유래가 바로 이 한중(漢中)에서 시작된 셈입니다.

### ② 삼국지의 정점: 유비 vs 조조의 '한중 공방전' (217년 ~ 219년)

많은 분에게 가장 익숙한 쟁탈전일 것입니다. 조조가 먼저 한중을 손에 넣자, 유비는 정권의 사활을 걸고 온 힘을 쥐어짜 내 한중으로 진격했습니다.

* 이 전투에서 유비 측의 노장 황충이 조조의 서쪽 방어 사령관이었던 **하후연을 정군산에서 베어버리는** 대사건이 벌어집니다.

* 분노한 조조가 직접 대군을 몰고 왔으나, 이미 요충지를 선점한 유비와 법정의 철벽 방어에 막혀 군량만 소모하게 됩니다.

* 이때 조조가 퇴각을 고민하며 남긴 유명한 말이 바로 **'계륵(鷄肋, 닭의 갈비)'**입니다. 먹을 것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깝다는 뜻으로, 당시 한중의 상황을 완벽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결국 조조는 철수했고, 유비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한중왕(漢中王)'**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제갈량이 위나라를 치기 위해 감행했던 5차례의 **북벌(北伐)** 역시 이 한중을 거대한 군사 베이스캠프로 삼아 진행되었습니다.

> **그 이후에도 계속된 피의 역사**

> 삼국시대 말기(263년) 위나라가 촉나라를 멸망시킬 때도 종회가 이끄는 주력 대군이 가장 먼저 피 터지게 공략한 곳이 한중이었으며, 남북조 시대나 송·금 전쟁기 등 대륙이 남북으로 쪼개져 싸울 때마다 한중은 항상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단골 전장이었습니다.
>
말씀하신 대로 중국 역사 속에서 '한중'이라는 두 글자는 **"이곳을 차지하는 자가 천하의 패권을 넘볼 수 있다"**를 증명하는 거대한 전쟁의 대명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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