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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역사

[제미나이]조조는 왜 서주에서 대학살을 했을까요?

작성자산들바람|작성시간26.06.23|조회수8 목록 댓글 0

조조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이자, 삼국지 역사상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인 **서주 대학살(서기 193~194년)**은 표면적인 도화선과 함께 조조의 심리적 상태, 그리고 군사 전략적 의도가 복합적으로 맞물려 일어난 비극이었습니다.

조조가 서주에서 그토록 잔인한 학살을 감행한 원인을 3가지로 정리해 드립니다.

### 1. 직접적인 도화선: 아버지 조숭의 비극적인 죽음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아버지 **조숭**의 죽음이었습니다.
당시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조조가 자리를 잡은 연주로 이동하던 중, 서주 영토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서주의 지배자였던 **도겸**은 강력해진 조조와 잘 지내보고자, 부하 장수 **장개(張闓)**에게 군사를 주어 조숭 일가를 안전하게 호위하도록 명했습니다.

하지만 황건적 출신이었던 장개는 조숭이 가진 엄청난 재물에 눈이 멀어, 밤중에 **조숭과 그 일가족을 몰살하고 재물을 훔쳐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이 모든 것이 도겸의 음모라고 판단했고, 이성을 잃을 정도의 극단적인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혀 서주로 진격하게 됩니다.

### 2. 공포 정치를 통한 저항 의지 꺾기 (전략적 테러리즘)

아버지를 잃은 사적인 복수심도 컸지만, 역사학자들은 조조가 **'공포'를 전략적 도구로 사용**했다고 분석합니다.
당시 조조는 연주를 거점으로 이제 막 세력을 키우던 단계였고, 주변의 군웅들을 압도해야 하는 정치적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조조는 자신에게 맞서거나 해를 끼치면 어떻게 되는지 천하에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서주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함으로써 주변 세력과 서주 내 잔여 저항 세력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리려는 잔인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 3. 군량 확보와 철저한 경제적 고사(枯死) 작전

당시 조조의 군대는 만성적인 군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반면 서주 지역은 대륙 동쪽에 위치해 전쟁의 피해가 적고 땅이 비옥하여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조조는 서주를 단순히 점령하는 것을 넘어, 도겸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지역의 모든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백성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며 서주의 풍요로운 식량과 자원을 싹쓸이하여 제 군대의 군량으로 삼았고,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전부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 慘 (참혹했던 역사적 기록)
역사서인 《후한서》와 《정사 삼국지》는 당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조조가 지나간 곳에서는 무수한 백성이 학살당해 **닭과 개조차 살아남지 못했고, 그 시체들이 사수(泗水) 강물에 가득 차서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수십만 명의 남녀가 무참히 죽임을 당해 서주 땅은 순식간에 황무지가 되었다."
>
## 🔄 조조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학살

이 잔혹한 학살은 단기적으로는 도겸을 코너에 몰아넣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조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악재**가 되었습니다.

* **민심의 이반과 유비의 성장:** 서주 백성들과 지식인들은 조조를 '인간의 탈을 쓴 악마'로 보며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도겸을 구하기 위해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온 **유비**는 백성들을 지키며 서주 민심을 완전히 사로잡았고, 이는 훗날 유비가 서주의 주인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 **인재들의 탈출:** 앞서 이야기한 **제갈량**을 비롯해 서주에 살던 수많은 명문가와 인재들이 조조를 피해 남쪽(형주, 강동)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조는 거대한 인재 풀을 제 손으로 쫓아내며 스스로 적을 키우는 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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