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학교를 떠나면서......2019년 경주고 교지에 올린 글
강 대 춘
교직생활이 꼭 35년 6개월이었다. 대학 졸업 후 경제전문지 기자로 취업을 했지만 반년 뒤 가정사정으로 교직으로 옮겨 왔으니 평생을 교직생활로 보냈다고도 할 수 있다. 주변에서는 내가 교직에 어울리지 않고 사업이나 장사를 했으면 잘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스스로 생각해 보면 교직이 잘 맞는 것도, 잘 안 맞는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비교적 환경적응에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학교근무도 4개 학교를 거쳤으니 교직에서는 많은 현장을 경험을 했다고 본다.
35.5년의 교직생활을 거치면서 주변 환경들도 그렇지만 교직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지금 와서 예전의 교직생활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교직생활 내내 내 나름대로는 전공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무책임하고 싶지 않았고 예절이나 금연교육, 생활지도 등 인성교육에 비교적 섬세했다고 할 수도 있다. 자랑 아닌 자랑이지만 교직생활 시작부터 담임을 맡은 것이 4개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도 26년 연속 담임을 했다는 것이 특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에서 보듯이, ‘미칭개이’는 학생들에게 다소 엄해서 그렇게 불리워진 것 같고, ‘강대장’이라는 별명은 학생들에게 카리스마를 풍겼던 것 같고, ‘서울대제조기’라 불린 것은 진학지도, 특히 명문대 진학을 비교적 남들보다 많이 시켰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강 대 춘
교직생활이 꼭 35년 6개월이었다. 대학 졸업 후 경제전문지 기자로 취업을 했지만 반년 뒤 가정사정으로 교직으로 옮겨 왔으니 평생을 교직생활로 보냈다고도 할 수 있다. 주변에서는 내가 교직에 어울리지 않고 사업이나 장사를 했으면 잘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스스로 생각해 보면 교직이 잘 맞는 것도, 잘 안 맞는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비교적 환경적응에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학교근무도 4개 학교를 거쳤으니 교직에서는 많은 현장을 경험을 했다고 본다.
35.5년의 교직생활을 거치면서 주변 환경들도 그렇지만 교직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지금 와서 예전의 교직생활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교직생활 내내 내 나름대로는 전공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무책임하고 싶지 않았고 예절이나 금연교육, 생활지도 등 인성교육에 비교적 섬세했다고 할 수도 있다. 자랑 아닌 자랑이지만 교직생활 시작부터 담임을 맡은 것이 4개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도 26년 연속 담임을 했다는 것이 특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에서 보듯이, ‘미칭개이’는 학생들에게 다소 엄해서 그렇게 불리워진 것 같고, ‘강대장’이라는 별명은 학생들에게 카리스마를 풍겼던 것 같고, ‘서울대제조기’라 불린 것은 진학지도, 특히 명문대 진학을 비교적 남들보다 많이 시켰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교직생활 35.5년 중 경북의 명문 경주고에서 27년을 보낸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학교마다 학생들 수준이 다르고 제 마다 교육방법에 차이가 있으며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명문고교에 근무하니 지역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고 주변의 평판도 좋았던 것 같았다. 교직 아닌 다른 직장이었으면 어려웠을, 영화평론, 산악활동, 연주활동, 여행 등의 취미활동도 교직에 있었기에 꾸준히 할 수 있었다. 그 이외에도 야학활동, 각종 문화활동, 써클활동 등도 활기차게 할 수 있었다. 결국은 그런 것들로 인해서 내 삶은 더 풍부해 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바쁜 생활 가운데에 막내가 장애아가 되면서 뛰어든 가슴 아팠던 사회운동도 내 삶에서는 하나의 덤이었다.
남들이 말하기에, 교직생활 평생하고 퇴직하고 나면 자녀들 공부시키고 꼭 집 한 채 남는다더니 내 역시 그랬다. 아이들 다 공부시키고 지금 집 한 채 남아 있다. 난 살면서 저축에 집착한다든가 돈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낌없이 쓰고 없으면 안 쓰고’를 되풀이 했기에 이제 와서 보니 인심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남들이 말하기에, 교직생활 평생하고 퇴직하고 나면 자녀들 공부시키고 꼭 집 한 채 남는다더니 내 역시 그랬다. 아이들 다 공부시키고 지금 집 한 채 남아 있다. 난 살면서 저축에 집착한다든가 돈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낌없이 쓰고 없으면 안 쓰고’를 되풀이 했기에 이제 와서 보니 인심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경주고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경주고에서 거의 고3담임을 주로 했는데 나름대로는 명문대 진학에 신경을 쓰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 부분에서도 남에게 지기 싫었던 게 있었던가 보다. 교직생활 말기에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가 갑자기 관리자인 교감, 교장이 되는 바람에 내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경주고 교감으로 부임하고부터 나는 종래와는 다르게 바쁘게 움직였다. 내 인사보직이 중, 고등학교를 오가는 입장이 되었기에 나름대로는 학교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바빴다. 내가 경주고에서 해야 할 일을 ‘日暮途遠’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대가 너무 빨리 변화하여 거기에 기민하게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래 안정된 곳 일수록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던가?
우선은 학교의 비효율적인 면들을 바꿔 나갔다. 인사문제에서의 비효율적인 것들, 조직이나 시설, 교육활동, 시스템, 규칙 등에서 개선할 점을 찾았다. 아울러 직원들이 평소에 불만족스러워했던 부분들을 협의를 통해 바꿔 나갔다. 맨 먼저 한 것이 시설이었다. 각 室의 이동거리 등의 효율성과 용도의 적절성을 감안한 위치 배정, 비효율적인 표지판, 실내 기물의 재배치 등을 손댔다. 다음에는 조직 개편문제와 수업방법 개선이었다. 불필요하고 종래 허술하게 운영되었던 부서를 통폐합 또는 바꾸었고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수업방법 개선에 몰두했다. 당시 한창 얘기가 많이 되어지던 ‘학생활동중심수업’으로의 변화를 선생님들에게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물론 입시가 존재하고 있어 모두가 성적하락을 우려했음을 물론이다. 또 대학입시가 시험점수로 해결하던 정시입학보다 학생활동을 평가하던 수시입학으로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많은 고민을 했다. 전방위적으로 많은 것을 바꾸어 나갔지만 가장 컸던 것은 금, 토요일을 이용한 특기적성활동이었다. 학생들은 대거 교외로 나가게 되고 당연히 자습활동은 줄어들게 되어 성적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 밀고 나갔다. 그것은 그동안 공부로 혹사당하던 아이들로 하여금 숨통을 트게 하는 것이어서 그 뒤 학교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반대하던 사람들보다 찬성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특기적성지도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반을 개설했고 강사들을 모셔왔다. 아울러 야구부의 재창단, 관악부의 재창단도 그 변화의 일련 선상에 있었다.
우선은 학교의 비효율적인 면들을 바꿔 나갔다. 인사문제에서의 비효율적인 것들, 조직이나 시설, 교육활동, 시스템, 규칙 등에서 개선할 점을 찾았다. 아울러 직원들이 평소에 불만족스러워했던 부분들을 협의를 통해 바꿔 나갔다. 맨 먼저 한 것이 시설이었다. 각 室의 이동거리 등의 효율성과 용도의 적절성을 감안한 위치 배정, 비효율적인 표지판, 실내 기물의 재배치 등을 손댔다. 다음에는 조직 개편문제와 수업방법 개선이었다. 불필요하고 종래 허술하게 운영되었던 부서를 통폐합 또는 바꾸었고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수업방법 개선에 몰두했다. 당시 한창 얘기가 많이 되어지던 ‘학생활동중심수업’으로의 변화를 선생님들에게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물론 입시가 존재하고 있어 모두가 성적하락을 우려했음을 물론이다. 또 대학입시가 시험점수로 해결하던 정시입학보다 학생활동을 평가하던 수시입학으로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많은 고민을 했다. 전방위적으로 많은 것을 바꾸어 나갔지만 가장 컸던 것은 금, 토요일을 이용한 특기적성활동이었다. 학생들은 대거 교외로 나가게 되고 당연히 자습활동은 줄어들게 되어 성적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 밀고 나갔다. 그것은 그동안 공부로 혹사당하던 아이들로 하여금 숨통을 트게 하는 것이어서 그 뒤 학교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반대하던 사람들보다 찬성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특기적성지도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반을 개설했고 강사들을 모셔왔다. 아울러 야구부의 재창단, 관악부의 재창단도 그 변화의 일련 선상에 있었다.
우리는 과거에 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새로운 교육활동과 프로그램을 많이 개설했다. 그와 연계하여 학교에서는 다양한 행사와 발표회, 경시대회 등이 새롭게 많이 개최되었다. 1년간 우리가 한 일들을 얘기하자면 끝도 없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큰 부담을 가지면서도 많은 변화를 주도했다. 아마 그 뒷 배경에는 그동안 변화에 갈증을 느끼던 많은 선생님들의 동참이 있었고 우리 학교 교사들의 남다른 수준이 뒤에서 받쳐줬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직장에서 창의적으로 뛰든 몸으로 열심히 뛰든 기본은 근무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일을 하면서 괴롭고 부담스럽다면 그 결과는 바람직한 쪽으로 간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관리자로서 늘 선생님들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혹여나 선생님들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그리고 난 중학교 교장으로 갔다가 1년 만에 다시 경주고 교장으로 돌아왔다.
교장하면서 줄곧 나를 괴롭힌 것은 고교평준화 문제이다. 새로 온 정치가들은 표를 의식해서인지 늘 이 문제를 들고 나섰다. 경주고가 평준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치가 그 방향으로 간다면 당연히 찬성하고 거기에 맞춰서 나갈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말을 먼저 꺼낸 사람들이 늘 “경주고가 평준화를 반대하고 있어서 매우 어렵다”라고 했다. 내 나름대로는 학교 입장에서의 시대적 가치, 우리가 어떤 교육적 방향을 설정하여 나아가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해 생각하면서 기민하게 때로는 강하게 대응해 나갔다. 늘 말하지만 경주고가 평준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퇴직한 후에도 여전히 집으로 이 문제를 가지고 방송국에서 인터뷰하러 찾아오기도 했다.
인구 급감에 따른 학급 감축문제도 그렇다. 불필요한 학교를 마음대로 만들고 허가를 내 주고는 이제 학생 수가 줄어드니 전체 학교가 똑같이 정원을 줄이자고 한다. 어느 학교는 학생지원수가 넘쳐나고 어느 학교는 늘 미달인제, 그 상황에서 어떻게 똑 같이 학급을 감축하자는 얘기인가? 나는 누가 뭐래도 늘 시장주의자이다. 장사건 학교 운영이건 시장의 질서대로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모집 못하면 감축하면 되고 학생이 넘쳐나면 늘이든지 그게 허가 안 되면 현상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학교마다 지역마다 상황이 모두 다른데 늘 행정은 똑같이 획일적으로 줄이자고 밀어부친단 말인가? 학교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학급감축이 불가능하기에 나는 누가 뭐래도 경주고의 학급감축은 반대해 왔다.
인구 급감에 따른 학급 감축문제도 그렇다. 불필요한 학교를 마음대로 만들고 허가를 내 주고는 이제 학생 수가 줄어드니 전체 학교가 똑같이 정원을 줄이자고 한다. 어느 학교는 학생지원수가 넘쳐나고 어느 학교는 늘 미달인제, 그 상황에서 어떻게 똑 같이 학급을 감축하자는 얘기인가? 나는 누가 뭐래도 늘 시장주의자이다. 장사건 학교 운영이건 시장의 질서대로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모집 못하면 감축하면 되고 학생이 넘쳐나면 늘이든지 그게 허가 안 되면 현상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학교마다 지역마다 상황이 모두 다른데 늘 행정은 똑같이 획일적으로 줄이자고 밀어부친단 말인가? 학교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학급감축이 불가능하기에 나는 누가 뭐래도 경주고의 학급감축은 반대해 왔다.
많은 복잡한 문제들을 학교에 남겨놓고 나는 이제 학교를 떠나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은 그동안 배운 지식과 경험으로 이 지역사회에서 봉사할 일을 고민하고 있다. 내 교직생활이 성공적이었느냐는 문제는 주변에서 평가해 줄 것이고 어떤 평가가 있든 나는 개의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많은 제자가 찾아오는 교사중의 하나이고 여전히 그 제자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의 교직생활은 내 나름대로는 행복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마음만은 수봉동산의 정원에 남겨놓고 몸은 정든 학교를 떠나왔다. 퇴직하던 날, 전혀 예상치 않았던 어느 선생님이 울먹이는 것을 보고 “아! 내가 교직생활을 헛되게 한 것은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었을까?
연초에 나의 세 딸들이 정착한 제주에 와서 눈 덮인 한라산 윗부분을 쳐다본다. 나도 이제 세월을 제법 산 것 같다. 어느새 은퇴하여 노후 아닌 노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요즘 나는 퇴직 전부터 시작한 대학원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공부가 이게 끝이 아니며 나는 또 다른 것을 꿈꾸고 있다.
2018.12 제주에서.....
2018.12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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