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석 시 연구 >
白石의 詩, 그 높고 쓸쓸한 영혼의 독백 (2000)
최소영
Ⅰ. 서 론 < 연구사 > 백석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1930년대 후반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리 매김 하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문학사에서 유보되어 왔다. 정지용, 김기림과 함께 해금조치를 통해 활발히 연구대상으로 복권되었으나, 그의 삶과 문학적 행보의 독자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기존의 연구자들은 문학사에 편입시키기에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해금 이후 근래에 걸쳐 백석 詩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수준도 고양되고 있다. 1) 백석에 대한 평가는 <사슴> 출간부터 극단적인 양상을 띠었다. 김기림은 반복고주의와 반 감상주의를 읽어내어 ‘모더니티’로 규정하고, 박용철은 언어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방언을 통해 나타난 것으로 보는 면이 백석의 긍정적인 면을 높이 산다면, 임화는 백석 시에는 생생한 생활의 노래가 없고 보편성을 가진 전 조선적인 문학과 원거리에 놓인다고 하였으며 오장환은 갖은 사투리와 옛이야기, 연중행사의 묵은 기억을 질서 없이 그저 곳간에 볏섬 쌓듯이 구겨 넣은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등 혹평을 받기도 하였다. 백석에 대한 오늘날 연구방향은 세 가지로 전개되어 왔다. 첫째는, 리얼리즘 내지는 민족문학의 시로 문학사에 위치 시키려는 노력이다. 두 번째는 김기림이나 박용철과 같은 논의에 뒤를 이어 모더니즘이라는 잣대에 기대어 백석의 언어에 주목하며 그 특징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어느 특정에 의하지 않고 백석 시세계의 전모를 포용할 수 있는 내적 잣대를 귀납적으로 밝혀 내거나 변모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연구하게 되는 것은 백석 시는 여러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며, 그의 시어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방언적인 요소도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생애를 밝혀내는 전기작업의 과정에서는 벽에 부딪치는 점들은 시적 변모의 내밀한 이유를 짐작들로만 제시해야 하는 어려움도 상당부분의 이유이다. 2)
Ⅱ. 본 론
1) 백석의 삶 백석. 그의 詩는 감칠 맛 나는 글이다. 높고 쓸쓸한 지성과 시대적 삶의 회한을 구수함과 애틋함으로 감칠맛 나는 시의 언어로 표출한다. 그게 또한 백석의 글 맛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고향상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열망, 방랑적인 삶의 체험에서 오는 애환이 배여 있는 그의 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살아온 것을 잠시 보자면,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여우난골) 1013호에서 水原白氏 부친 백용삼과 모친 이봉우 사이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白蘷行, 白石은 필명이다. 주로 紙面에 작품을 발표할 때는 필명 白石을 통일시켜 사용한지라 백기행 보다는 백석이라는 이름을 많이 썼다.
1) 김승구, 「백석시의 낭만성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1997.p.1 2) 이명찬, 『1930년대 한국시의 근대성』, 소명출판, 2000, pp. 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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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8세에 五山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문학공부를 하며 정주에 머물다가 이듬 해인 1930년(9세)에 『조선일보』사가 주관하는 신년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母와 아들」이 당선되었다. 이를 계기 로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東京,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4년에(23세) 귀국하여 조선일보 출판부로 입사, 계열 잡지『女性』․『朝光』등을 편집하였다. 1935년8월「정주성」이라는 시작품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하고, 1936년 1월20일에 첫 시집 『사슴』을 펴낸다. 이후부터 1941년까지 매우 활발한 詩作活動을 하며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면서 1941년까지 집중적으로 전개한다. 3) 1936년,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직을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가 되어 옮겨간다. 함흥에서는 김자야(김진향)라는 여인을4) 만나게 되는데, 백석의 삶과 문학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는 김자야는 후일 회고담 형식의 『내 사랑 백석』이라는 책을 내기도 한다. 백석은 부모님의 강권으로 고향에서 두차례 결혼을 하지만, 약 3년여 동안 다시 서울에서 김자야와의 실질적인 생활을 함께 한다. 그러나 모든 걸 뒤로한 채 1939년, 서울을 떠나 만주의 新京으로 가서 이방인의 외로움과 적막한 유랑생활의 생계를 꾸린다. 만주에서는 적성에 맞지 않는 측량원이나 세관원, 소작인등의 일을 하면서 쓸쓸하고 우울하게 보낸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신의주로 와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南新義州 柳洞 朴時奉方」을 발표하였으며, 다시 고향인 정주로 귀향한다. 그 후 61년까지 공산당 조선작가동맹에 관계를 맺고 문인으로 소속되어 <조선문학>紙에 아동문학평론, 창작시, 수필, 번역시등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했으며 지금은 그 생사를 알 수 없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식민지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정신적 갈등을 글로 승화시켜 내야만 했던 백석. 그는 또한 다소 복잡한 현실의 가정사에서 정신적인 번민과 갈등을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방랑적인 삶의 연속에서 고향의식에 근거한 시세계를 표출하게 되었다. 그의 詩作은 그러한 삶 속에서 분출되는 유일하고도 절실한 삶의 표현방법이었다. 또한 그의 결벽성과 페쇄적인 성격은 문단회피와 독자적인 詩作活動을 전개시켜 나가게 되었으며 그의 독특한 시세계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의 詩作品을 보면서, 방랑생활의 흔적에 따라 작품에 나타난 그의 사상과 심정을 추이해 볼 수 있으며, 토착어 중심의 독특한 詩語를 통해서도 백석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2. 詩작품의 경향 백석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작품의 경향과 그 특색을 살펴보기로 한다. 백석은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북방의 정서로써 시로 환기시켰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33편의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난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 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3) 이명찬, 「1930년대 후반 한국시의 고향의식 연구」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2 / p.59 고형진, 「백석시 연구」고려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3.12 / p.10 4) 김자야 회고, 이동순 정리,「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창작과 비평』복간호, 1988 김자야라는 이름은 김진향에게 백석이 지어준 이름이다. 당시 자야여사가 서점에서 <唐詩選集>을 사왔는데, 백석은 그것 을 읽고 子夜라는 호를 지어 주었고 둘만의 애칭이 되었다. 자야란 당나라 시인 이백의 <子夜吳歌> 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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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 뒤 발표한 시로는「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2- 1) 초기 문학 (1930 ~1936) (1) 토속적인 서민정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1930년대라고 하면 우리 문단에서는 근대정신과 도시문명에 관심을 둔 모더니즘 사조와 그 세계가 지식인들을 사로잡던 시대였다. 그러나 백석은 당대의 시인들이 보여 주었던 여러 유형의 모더니즘적인 정신구조나 그 시작세계와는 달리 자신의 시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절실한 체험과 내용을 작품화시켰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시인은 써야만 하는 것을 써내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것을 쓰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내면에 깊숙히 내재화 되어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만큼 그의 원체험으로 자리잡은 토속적 서민정신의 세계는 그가 넘을 수 없는 원형질이며 동시에 넘어보고 싶은 장애요인이기도 하다. 농촌과 산골의 배경과 순박한 사람들의 살아간 이야기며 정주지방의 독특한 사투리는 백석의 시에 있어 가장 강한 독특한 점으로 부각한다. 5)
그러므로 백석의 시는 근대인이 잃어버린 유년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그리움을 토속적으로 투명하게 조명하였다. 잃어버린 공동체적 삶과 우주적 합일의 세계를 민속적 상상력을 통해 복원하고 자 하였는데 이는 근대의 무미건조하고 텅빈 삶의 조건과 방식이 진전 되어가는 당시의 메마른 삶의 현실에 대한 길항작용에서 시작 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그러기에 과거를 떠올릴 때는 공동체적 유대감과 우주적 합일의 순간의 경험을 그리게 되지만 당대의 현실을 노래할 때는 그런 것들에 대한 결여 속에서 고독감과 허무감에 시달리는 세계와 물신화되어 소외된 삶, 파편화된 삶이 지배하는 모습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주로 <여승><팔원><촌에서 온 아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에서 잘 나타난다.
여 승 ( 女 僧 )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 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5) 정효구 편저, 『백석』 문학세계사 p.189 6) 김재용 엮음, 『백석선집』실천문학사 p.482 , <팔원>에서는 보호받을 수 없는 계집아이의 고단한 삶을 그린다. 더 이 상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기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일을 해야하는 형편 을 말해주고 있다. 과거처럼 집안 전체가 보호하고 마을이 공동으로 돌보는 공동체적인 삶은 불가능한 것 이다.
팔 원 ( 八 院 ) ― 서행시초(西行詩抄) 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妙香山行) 승합자동차(乘合自動車)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慈城)은 예서 삼백오십리(三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백오십리(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어디메서 삼춘이 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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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車)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중략-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4-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제 해방과 함께 만주에서 신의주로 오게 된 백석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아내도 집도 잃고, 부모도 형제도 잃은 진한 쓸쓸함과 슬픔이 아주 짙게 녹아 있다. 술술 산문같이 읽히고, 감정의 정갈함을 불러 일으키며 실을 뽑아내듯 막힘없는 것이 그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상실감의 극에 달함에 있어 백석의 마치 독백과도 같은 그의 언어는 독자로 하여금 같이 아프지 않을 수 없는 마력으로 흡수한다. 누군들 그러한 상실감의 처지에 있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심정을 동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쫌 더 확대하자면 상실의 시대를 살아야만하는 조선인의 뼈아픈 민족적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야 마는 그의 시상은 서럽다 못해 절절하다. 마침내 드물고 정한 갈매나무로 귀결 시키면서 시인의 숙명을 합리화하고 만다.
그런데 그런 춥고, 애절함을 나타내는데도 어쩐지 따뜻하고 정감이 흐르게 한다. 그건 왜일까! 하니 토속적인 우리말의 어감 때문이란 걸 알 수 있다. 자신의 슬프고 처절한 처지를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차원 격을 높혀주어 승화시키는 묘미가 있다. 한마디 한마디에 들어있는 느낌, 그리고 감정의 순수도가 높기에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그 따뜻함에 빠져든다. 그래서 더욱 슬픔의 정서를 더욱 깊게 해 주는 것이다. 슬픔은 더 슬프게, 아픔은 더 아프게 끌고 들어가게 한다. 그냥 화롯불이 아닌, ‘딜옹배기 북덕불’ 이고, 그저 팔베개가 아닌 ‘손깎지 베개’...... 와 같은 더욱 구체적이면서도 섬세한 표현인 그의 탁월한 詩語는 정감이 묻어나는 그 자체다.
또한 백석의 시에서는 여유로움의 느린 행동들을 주목할 수 있다. 사색하는 행동들이 그대로 재현될 수 있는 묘사다. 천천히 느린 속도로 머릿속으로 그려지게 하는 데서 그 여유로움을 감지해 낼 수 있도록 한다. 그건 내면의 슬프고 처절한 자신의 모습을 토해내고 있지만 시인 자신은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내면에서 승화시키고 정제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미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백석은 내면의 정서가 마무리되는 찰나를 경험하면서 마무리되며 한 발 앞으로 시는 쓰여진다. 이는 근대의 속도를 거스르는 시인의 태도라고나 관조적 태도라 할까? 그래서 이토록 실을 자아내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적인 일들을 잔잔하게 담담히 묘사해내고 있지만 그 심정 밑바닥으로 흐르는 비애를 비장미로 객관화시킨다. 시인은 ‘일차언어와 평생 사랑놀음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듯이7) 백석의 시를 읽으면 이 사람이야말로 언어와의 사랑놀이에 빠져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건 자신의 현실에서 결핍을 느낄수록, 바닥으로 떨어질수록 그와 반비례하여 승화되는 높은 시적 체감도가 형상화되고, 백석에게 있어서는 그 분출구가 詩라는 문학이 매개체이고, 살아가는 존재하는 방식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식민지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야했던 생활인으로, 지식인으로 그가 감내해야 할 무게를 지탱하는 것이 詩였다. 누구든 어떤 처지에서건 살아 남아야하는 본능적인 돌파구를 나름대로 찾아 내듯이 백석은 詩만이 그 유일한 존재방식으로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은 시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통과의례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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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석은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하지 않는다. 그는 다분히 객관적이고도 관조적이다. 그래서 더욱 은근미와 비애미를 높인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화자는 언제나 그가 묘사하고 전달하는 객관적 상관물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출하기 보다는 그 대상을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의도가 더 짙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장된 감정노출이나 센티멘탈리즘적인 표현보다 객관적인 실체의 묘사와 시적기교가 뛰어나다. 8)
고방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 래도록 남아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촌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촌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 에 두부산적을 께었다 7) 유종호, 『 시란 무엇인가-경험의 시학- 』 p.34 8) 정효구 편저 『 백석 』 p.194
손자 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 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이 둑둑 이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위 시에서 보면 시인은 저만치 물러서 있다. 오직 대상만이 자유롭게 놓여 있는 셈이다. 대상에 대한 이와 같은 집착, 그리고 그 대상을 개인의 주관적 감정으로 채색시키는 것을 금욕이라 할 만큼 꺼려하는 백석의 정신이야말로 그가 지닌 객관주의 정신의 한 모습인 것이다. 부질없이 감정을 작품 속에 드러내느니 대상이 있는 대로 묘사하는 것이 보다 진실에 접근하는 정직한 처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객관주의 정신은 시문학사에서 1930년대의 이미지즘이나 주지주의와 일맥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김기림과 김광균의 시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삶의 모습이 빠져 있다면 특히 백석의 시는 살아가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작용해서 시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이러한 정신에 기저하여 그 표현 방법으로 볼 때 열거식 병렬식을 주로 구사하였는데, 이는 그 어느 것도 특별히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한꺼번에 대등하게 강조하는 견해이다. 백석의 객관주의 정신과 병렬식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는< 정주성 >< 산지 >< 주막 >< 여우난골족 >< 고방 >< 여우난 곬 >< 초동일 >등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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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상의 감정과 의식세계를 그린다. 당대의 대부분 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의 감정의 세계는 일상보다는 일상과 다른 시상에서 쓴 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다른 정신세계의 추상적인 부분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순수한 감정의 상태의 시창작은 김영랑의 순수 서정시나 종교적인 명상시, 어떤 정의의 신념과 투사적 의식을 쓴 저항시나 카프계열의 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석은 지극히 일상의 감정이 시상이기 때문에 언제나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평범함을 내재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감정이 흥분과 과장으로 흐르지 않는 이유라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이 땅의 전통적인 사회적 문화덕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하고, 시인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세계를 담담하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시를 통하여 우리가 나날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작고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소중한 세계를 그려보인다. 10) (4) 어린이의 시점과 서사적인 문체이다. 9) 정효구, 『백석』문학세계사 p. 196 10) 『백석』문학세계사 p. 197 11) 『백석』문학세계사 p. 203
백석의 시는 어린이가 화자로 등장하여 어린이의 시점으로 작품을 구성한 경우가 많다.그러므로 자연스럽고,솔직하다. 또한 서사성이 짙게 나타나서 자기주변의 이야기를 비롯한 수채화풍의 여러 다른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거나 제시할 뿐이다.11)
-7- 2) 중기작품(1936 ~ 재북이전) (1) 주관주의자 정신과 낭만적 동경의 생성 백석의 신변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로 말미암아 그 시세계도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백석이 만주로 이주한 후로 보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거처를 옮긴 후이다. 일제말기의 어두운 시기를 이국에서 보내며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 측량원이나 소작인등의 일을 하면서 고독하고 쓸쓸하고 우울하게 보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러한 정서가 詩로 표출된다. 더 이상 전기의 객관적이고 관조적일 수 없는 그의 현실은 자신은 객관물 뒤로 물러서서 묘사하는 것이 아닌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격정적인 자기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주관적인 경향으로 변화한다. 작품에는< 북방에서> <허준><힌바람벽이 있어><촌에서 온 아이>< 귀농>< 남시느이주 유동 박시봉방>등에서 보면 낭만주의적 고백의 정신이 시집 사슴 이후에 쓰여진 중기 작품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12) 과거로의 회귀가 불가능을 인식한 다음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내면속에 잇는 동경을 성취하기 위해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이는 타자성을 배제하던 방식을 취하던 것을 좀더 정직하게 수용하는 것으로 현실의 이곳 저곳을 유랑하면서 주체의 자의식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3) 그의 시 최초로 이 타자성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야말로 역사적 현실에 눈뜨는 순간이며 그가 그간에 진행해 왔던 기획의 무의미를 깨닫는 순간이다. 이 당황스러운 허무 앞에서, 이제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차례가 된 것이다. 오로지 백석의 시적 형상화 과정은 바로 이 지점을 향해 달려온 셈이다 그 지점에「힌 바람벽이 있어」나 「 남신의주 유동박씨봉방」이 놓여있다. 이 시들에 와서야 백석이 가장 솔직한 태도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 지적 방법론에 얽매이지 않는 백석의 맨 얼굴과 만나게 된다. 최초이면서 마지막이 되어버린 성찰의 유형인셈이다. 14)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12) 정효구, 『백석』문학세계사 p. 211 13) 김승구, 「 백석시의 낭만성 연구 」서울대 대학원 석사논문 , 1997, p.34 14) 이명찬, 「1930년대 후반 한국시의 고향의식 연구」서울대 대학원박사논문, 1999.2 p.96~97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것과 -8- 내 손에는 신간서(新刊書) 하나도 없는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
나와 세상과의 괴리,나와 타인과의 분리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하고 싶은 욕구, 상실감의 인정, 또 한편 그러한 자신의 자포자기의 순간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차라리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풀어놓은 백석은 이젠 세상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타자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것이 또한 자기를 지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2) 이방인의 비일상적인 감정과 의식세계 백석은 이국에서의 궁핍한 생활로 인해 불안정한 사람의 비일상적인 감정과 정신상태였을 것이다. 고향에 두고 온 것들과의 거리감,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의 소외감들은 감정의 격렬함- 9 - 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뿌리를 내릴 수 없거나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했으며 자신의 작품에서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힌바람벽이 있어」와 같은 시는 만주의 쓸쓸하고 추운 방에 홀로 앉아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바람벽을 보며 온갖 상념과 감정에 젖어 쓴 시라고 볼 수 있다. 마음속에 그려지는 회한의 풍경일 뿐, 그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리움은 더욱 사무친다.
(3) 낭만주의적인 방법 초기에 대표적으로 쓰여진 여우난골족과는 다른 양상인 주관의 세계를 직접 전하는 경향으로 간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객관적 입장에서 주관적 입장으로 경향이 달라지면서 객관적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고백한 자화상을 보는 느낌에 빠져든다. 이러한 변화는 백석의 詩作 방법이 전개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블룸에 의하면 , 중세의 <편력-로망스의 내면화>이다.로망스양식이 대체로 기사들의 사랑과 모험담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백석이 만주로 이주 하기 이전까지의 발표된 시의 많은 부분이 자신의 편력경험과 낭만적 사랑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기의 시들은 < 편력- 로망스가 내면화> 된 낭만적 서정시로 보는 관점은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15)
3) 후기 작품 백석은 분단 후 월남하지 않고 그대로 북한에 있었다. 그가 시작품을 발표한 곳은 조선 공산당 신하 조선 작가 동맹기관지인 <조선문학>이었던 점으로 보아 북한 시단에 속하여 활동한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 시단에서 발표한 작품은 모두 북한 문단의 창작방법과 그 정신을 따라갔다. 북한은 시인을 비롯한 작가들이란 준공무원의 신분이고, 당에서 제시하는 창작방법과 정신을 지지하며 수용해야만 했기에 자유로운 글을 기대할 수 없다. 백석은 더군다나 카프계열의 시를 써온 것이 아닌데, 북한 문단에 적응하여 활동하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을 것이다.
돈사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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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기울 누룩의 감자술 만들어 사료에 섞기도 하였다. 류화철 용액으로 더운 물로 몸뚱이를 씻어도 주었다. 그러나 한 번식돈 관리공의 성실한 마음 이것으로 다 못해 이제 이 깊은 밤을 순산을 기다려가슴 조이며 분만 앞둔 돼지의 그 높고 잦은 숨소리에 귀 기울여 서누나. 15) 김승구, 「백석 시의 낭만성 연구」 서울대 대학원 석사논문, 1997.2 p.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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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가면 공안에 안개는 돌아 /돈사네모퉁이의 가스불빛도 희미해진다. 그러나 돈사에는 이 불 아니 도 하나 불 있어/ 언제나 꺼질 줄도, 희미해 줄도 없이 밝은 불.
이 불 한해에 천마리 돼지를 한 손으로 받아/사랑하는 나라에 바치려,사랑하는 땅의 바람을 이루우려 온 마음 기울여 일하는 한 젊은 관리공의 / 당 앞에 드리는 맹세로 켜진, 그 붉은, 충실한 마음의 불 <조선문학> 1959년 9월호에
위 글을 보더라도 얼마나 작위적이고 인위성이 짙은지 바로 알 수 있다. 결국은 기쁨으로 노동하는 긍정적인 인간형과 당에 충성하는 무비판의 공적 인간형을 그리기 위한 것이 이 작품의 숨은 목적인 것이다. 백석은 아동문학에도 관심이 지대하여16) 당의 아동문학 분과위원회 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아동문학을 한 차원 승화 시키고자 하였으나, 경직성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당의 방침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3. 백석의 詩語와 詩形態 백석시의 두드러진 특질 중의 하나인 토착어상의 특징중의 하나인 시언어상의 특성을 보면 한자어나 외래어는 거의 없고 전적으로 토착어로 표출되어 있다. 우리의 토착어가 관념과 사상을 전달하기보다는 감각과 정서를 환기시키기에 더욱 적합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러한 토착어의 사용은 사실의 전달에 뛰어난 점을 나타낸다.17) 그 환기력이 백석의 시에서 탁월한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며, 그가 구사한 다양하고 섬세한 토착어는 그의 시가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를 호소력있게 환기시키는 데, 적절히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음식물에 관한 詩語가 무수히 등장한다. 한 편 김명인은 이러한 백석의 음식물과 식생활에의 관심을 향수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미각의 선
명함으로 찌릿하게 회상되는 추억, 식욕은 어린시절을 교감하게 되고, 실향의 고단한 삶이 주는 외로움을 뼈저리게 한다. 이는 기억의 무수한 입자들이 되어 거기에 엉겨드는 수 많은 연상들을 반추해 내면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만추 해 내주는 역할을 한다. 단지 잃어버린 것은 미각뿐이 아니라 맛을 통해 추억되는 유년의 아득한 시간인 것이다. 18) 또한 그의 시에는 감각적인 표현이 많다. 식생활에 대한 관심과 토착어, 그리고 감각적인 표현은 그 자체가 구상물들의 성격을 선명하게 만들어 주지만, 대부분 체험적인 서술과 부연에 중첩되어 토속적인 세계의 명등한 심상으로 상승하게 한다. 그리하여 자칫 느슨해지기 쉬운 향수에 긴장된 호흡을 부여하는 것이다. ‘포족족하니’ ‘선득선득하니’ ‘시금털털하니’‘히근하니’‘그느슥한’‘재릿한’‘비릿한’‘해정한’‘어득시근한’‘장글장글한’‘잠풍하니’‘햇슥한’등의 감각적인 수식어들은 백석시의 시어적 정향을 짐작하게 한다. -11- 백석의 시에는 步格의 규칙성이나 詩行 또는 聯의 정연함의 형식적인 패턴을 형성해가려는 노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토착적인 방언을 토대로한 민속적인 체험에 구체성을 부여해 가려는 것이 그의 문체적인 특징인 것이다. 그리하여 律的 조형의 선명한 제시보다는 연쇄나 부연으로 이야기 흥미를 자극하고, 경험세계에 활기를 부여하려는 그의 독특한 표현이 구체화 되는 것이다. 그가 긴 줄글의 문장을 취택하면서 띄어쓰기 표시에도 그 나름대로의 개성을 보이는 것은 작품의 형식미를 강조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서사의 진행과 관련하여 리듬의 속도감을 살리면서 의미에 유기화 되는 총체적인 분위기를 전달하고 지속시키려는 시적 의도와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文體에서는 표충의 산만함과는 달리 심층에서는 보다 큰 단위의 리듬이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 律的 價値의 판단에는 매우 신중한 태도가 요청된다. 백석시의 문체는 표면적으로는 산문적인 진술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세부에 있어서는 대개 부연과 반복. 중간운 종결의 일치등으로 공유되는 운의 효과나 리듬의 긴장이 살려지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감정의 진폭을 확장시키고 개별적인 기억들을 상호 침투케하여,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생생한 직접성으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위급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있는 매 시행의 휴지 단위는 그 場景에 부합되는 감각으로 표방되고 있어서 짧은 한 행에 집중되는 선명한 심상의 효과 이상으로 체험에 적확한 구체성을 부여한다. 통사의 뛰어난 중첩과 부연은 고요하고 고요하고 평명한 추억의 세계를 서로 긴밀하게 연결시키면서 그 지속에 엉겨붙는 수 많은 삶들을 역동적으로 통합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락의 표층에서는 비록 정밀하게 다듬어지는 율격의 작위가 없지만, 전체적으로 작은 파장들의 긴 연쇄처럼 유연한 리듬이 살아나는 것이 백석기의 문체적인 특징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사실의 환영이나 내밀화된 기억으로써 추억의 세계를 선택적으로 재구할 뿐, 오히려 어떠한 서정시보다도 선명한 서정성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 백석의 시이다.이러한 특징에 주목하여 그의 시적 정향을 서술시(narrative poetry)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
16)「집게네 네형제」 와 같은 동시를 쓰고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해 북한에서 노력했다 17) 고형진, 「백석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83, p. 18 18) 김명인, 「1930년대 시의 구조연구」, 고려대 대학원 박사논문 1985, pp. 80~81 19) 김명인, 같은 논문 pp.144~146 20) 김명인, 「1930년대 시의 구조연구」, 고려대 대학원 박사논문 1985, p.71
1) 平北方言과 土着的 情緖 백석의 시에서는 아주 특별한 특성을 보인다. 어미나 어투에서는 표준어 표기를 하지만 명사나 지명 등에는 그 지방 특유의 토속어를 활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이들 방언들이 기행체험을 시화하고 있는 시편들보다는 산골마을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시편들 속에서 압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의도적인 토착어 발굴의 열의를 짐작하게 한다. 20)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의 변화에 따라 방언과 표준어를 적절히 취택하구 있으며 시 언어와 작품세계를 효과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백석은 표준어를 바탕으로 시작에 임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심화 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12- 2) 식생활에 관계되는 어휘의 사용 그의 시 91편에서 나타나는 식생활과 관계되는 언어는 무려 150여종에 이른다. 대체로 이들 음식물들은 평안도 지방의 토속적인 것이다.백석의 시에서는 거의 매편마다 음식이 등장하는데나타나지않는 것은 30여편에 지나지않 는다.이처럼 그의 시에서 음식에 대한 시어가 많이 표출되는 것은 그만큼 시에 우리의 삶에 대한 모습을 집중적으로 詩化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음식을 통해 그가 작품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끈끈한 삶의 유대를 나타나내고자 하였으며 거기서 인간미있는 삶을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국수는 식생활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어떻게 言表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눈이 많이와서 산엣새가 멀로 나려 멕이고 눈두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즐거운 굿함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김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 멍에 같은 분들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넷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먼 넷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넷적 큰 아버지가 오는 것 같이 오는 것이다. -국수- 일부
-13- 국수는 우리 전통음식으로 이 시에서는 의인화 되어 나타난다. 겨울밤 국수를 먹으면서 느껴지는 정겨운 우리 정서와 잔잔한 어조로 言表됨으로써, 아름다운 詩情을 느끼게 해 준다. 정겨운 우리네 토속 풍경을 엿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음식물에서 느끼는 소박한 정서를 통해 삶의 모습이 풍성하게 고조되고 있는 점이다. 여기서 환기되는 「국수」의 정서를 통해 삶의 모습이 풍성하게 고조되고 있는 점이다. 여기서 환기되는 국수의 정서는 단순히 개인의 기호물이 아닌 마을 사람 모두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끈끈한 유대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21)
Ⅲ.결 론 이런 사실들을 볼 때, 백석은 현실의 좌절을 어린 날의 풍요로움을 극대화 시키는 쪽으로 투사함으로써 거기서 작고 가난하지만 굳세고 의젓한 공동체를 발견 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북관의 삶이라는 변방성을 제거해 버리고 ‘흰색’일반화로서의 원시적 민족성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그 민족적 시원을 찾아 정신의 탐색과 공간적 탐색을 병행하려했다. 그것이 속악한 현실과의 대결에서 이기는 길이라고 믿었던 탓이다. 그러나 현실과의 교섭을 막은 상태에서는 결국 퇴행과 허무에 이른다. 그것이 파탄이라는 점을 깨닫기 때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성찰이 그에게 높이 초월이라는 동경의 형식을 부여하기에 아름다운 비관론의 한가운데 우뚝 솟게 되는 것이다. 22) 이와같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백석은 어느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인으로서 객관주의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주관적 감정이나 사상을 개입시키지 않고 작품을 아주 냉정하고 묘사적으로 제시하고 물러서는 주지적인 시인이자 모더니스트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러다가 시집<사슴>이후로 분단 이전까지 내면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내적 감정과 내밀한 정신적 풍경을 그대로 고백하듯 쏟아 놓아, 주관적이고도 낭만적인 표출을 한다. 그러나 해방후 분단 이후(1961년까지)의 북한에서의 활동은 공산당원이나 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선전하는 공인의 자리에서 당이 정한 공산주의 혁명을 위하여 자신의 문학행위를 바친 이상주의이자 혁명옹호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백석은 당대의 우리민족 대다수의 정신적 상황을 상실감과 운명론적 세계관으로 규정한다면 이에 대한 가장 뚜렷하고 정직한 반응을 보인 문인의 하나였다. 적어도 1930년대 중만에서 1940년대 초반까지의 그의 창작활동은 문학사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문인의 입지로 부각되는 것이다. 23)
21) 고형진, 「백석시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논문 1983, p 37 22) 이명찬, 「1930년대 후반 한국시의 고향의식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92.2 p.100 23) 정효구, 『백석』문학세계사 p.253
< 참고문헌 >
- 이명찬, 「 1930년대 후반의 한국시의 고향의식 연구 」 서울대 대학원(박사논문), 1999 - 고형진, 「 백석 시 연구」 고려대 대학원(석사논문), 1983 - 김승구, 「 백석 시의 낭만성 연구」 서울대 대학원(석사논문), 1997 - 김미경, 「 백석 시 연구」 서울대 현대문학 연구회, 현대문학연구 제154집, 1993 - 정효구, 『백석』 문학세계사, 1996 - 김재용, 『백석전집』 실천문학사, 1997 - 시와 사회 편집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백석 시집』 도서출판, 시와 사회, 1997 - 김명인, 「1930년대 시의 구조연구 」 고려대 대학원(박사논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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