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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먹어치운 시

작성자배성근|작성시간26.06.10|조회수0 목록 댓글 0

고양이가 먹어치운 시

 

청암 배성근

 

고양이는 시를 읽지 않는다

밤새 붙들고 있던 원고를

앞발로 밀어 바닥에 떨어뜨릴 뿐이다

나는 한 줄을 찾기 위해

사전을 뒤적이고

고양이는 한 마리 벌레를 찾기 위해

창가를 뒤적인다

새벽 두 시

겨우 건져 올린 문장 하나가

모니터 속에서 물고기처럼 번뜩일 때

녀석은 하품을 하며

키보드 위를 건너간다

문장은 낯선 기호들 속으로 흩어지고

나는 한동안

그 폐허를 바라본다

이상하게도

애써 다듬은 문장보다

고양이 발바닥이 남긴 흔적이

더 오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서

아침이 오자

원고는 반쯤 사라지고

고양이는 햇살 한 장을 베고 잠들었다

빈 화면 앞에 앉아

먹혀버린 시를 생각한다

어쩌면 시란

끝내 지켜낸 문장이 아니라

한 마리 고양이가 지나간 자리에서

조용히 털어내는

흰 수염 한 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노트]

고양이는 시를 읽지 않는다. 시의 의미도, 문장의 완성도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때때로 가장 치열하게 문장을 붙들고 있는 순간, 고양이는 아무렇지 않게 원고를 밀어버리고 키보드를 가로질러 간다.

이 시는 그런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좋은 시가 치밀한 사유와 정교한 언어의 결과라고 믿지만, 정작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계산되지 않은 흔적들일 때가 많다. 고양이의 발자국, 실수로 지워진 문장, 뜻밖에 생겨난 여백 같은 것들 말이다.

창작은 무언가를 완성해 가는 과정인 동시에 끊임없이 무너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인은 문장을 다듬지만, 삶은 늘 그 문장 밖에서 개입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개입이 오히려 시를 살아 있게 만든다.

「고양이가 먹어치운 시」는 완성된 작품보다 사라진 부분들, 남겨진 흔적들에 관한 이야기다. 결국 시란 끝내 붙잡은 문장이 아니라, 붙잡지 못한 것들 곁에서 오래 머무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지나간 자리에서 발견한 흰 수염 한 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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