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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바닷바람을 담은 붉은 열매

작성자배성근|작성시간26.06.14|조회수0 목록 댓글 0

[수필]바닷바람을 담은 붉은 열매

 

청암 배성근

 

 

해당화가 피는 계절이면 바닷가에는 은은한 향기가 번진다. 파도는 쉼 없이 모래사장을 어루만지고, 짭조름한 바람은 꽃향기를 품은 채 먼 곳까지 흘러간다. 붉은 꽃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꽃이 진 자리에는 작은 열매가 맺힌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 꽃으로 차를 만들고 술을 담그며 계절의 향기를 저장해 왔다. 짧게 스쳐 가는 계절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해당화 향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모래밭 가장자리나 둔덕에 무리지어 피어 있던 꽃들은 바다를 배경으로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붉은 꽃잎은 노을빛과 뒤섞여 어디까지가 꽃이고 어디까지가 석양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계절은 늘 지나갔고, 해당화는 그 계절의 한복판에서 짧고도 강렬한 시간을 살아냈다.

 

해당화는 화려하지 않다. 장미처럼 화려한 정원을 갖지도 못했고, 난초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거친 모래땅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바닷바람과 염분을 견디며 살아가는 강인함이 있다. 그래서인지 바닷가 사람들의 삶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견뎌 내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도 해당화와 닮아 있다. 누구나 인생의 모래바람을 만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아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이 삶의 길목마다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견뎌 낸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꽃은 눈에 보이지만 열매는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의 성숙도 그러하다. 젊은 날의 열정이 꽃이라면 세월이 남긴 지혜는 열매일 것이다.

 

가을이 되면 해당화 열매는 붉게 익어 간다. 여름 내내 햇빛을 품고 바닷바람을 견디며 천천히 단단해진 결과이다. 사람들은 그 열매를 따서 효소를 담그고 술을 빚는다. 유리병 속에서 숙성되는 시간은 어쩌면 사람의 기억이 익어 가는 시간과도 닮았다. 갓 겪은 일들은 날것의 감정으로 남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아픔도 그리움도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서운함은 이해가 되고, 상처는 추억이 된다.

 

나는 가끔 유리병 속에서 천천히 익어 가는 해당화주를 바라보며 시간을 생각한다. 우리는 늘 빠르게 살아가지만 정작 소중한 것들은 천천히 완성된다. 좋은 사람과의 인연도, 삶의 지혜도, 마음의 깊이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긴 기다림과 묵묵한 인내 속에서 비로소 제 빛을 낸다.

 

꽃은 향기로 기억되고, 열매는 시간 속에서 익어 간다. 그리고 사람은 기억 속에서 성장한다. 바닷바람을 품은 붉은 열매 하나에는 계절이 담겨 있고, 그 계절을 살아 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해당화는 피고 지겠지만, 그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추억 속에 머물고, 누군가의 술잔 속에 익어 가며 또 다른 계절을 기다릴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도 한 알의 해당화 열매와 같다. 바람을 견디고 햇빛을 품으며 천천히 익어 가는 것.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향기로 남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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