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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플라톤작품

플라톤 『파이돈』(57a-69d) 내용

작성자서창호|작성시간07.05.21|조회수797 목록 댓글 1
 

플라톤 『파이돈』(57a-69d)


【에케크라테스가 파이돈에게 이야기를 청함】


에케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원했다. 즉 죽음 직전의 소크라테스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가 들은 것은 ‘소크라테스가 죽었다’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에케크라테스는 죽음을 맞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기대감을 갖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분명 일반인과 다른 무엇을 보여주었으리라는 기대감이다.(57b, 266p)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처형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했다. 델로스에서 축제 사절단의 도착이 늦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8a-58d)


그리고 파이돈은 소크라테스를 회상하는 일이 즐겁다고 했다. 에케크라테스도 이에 동의했다.(58d)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면, 우리 자신을 떠올리면 기분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일 것이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죽던 날 현장에 있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죽는 것에 대해 비탄이나 연민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소크라테스로부터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마치 외국 나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듯한 인상으로 말하고 있다.(58e, 270p)


【사형날 같이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임종하던 날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쭉 공개한다(59b-59c, 270-272pp)


먼저 와있던 크산티페가 퇴장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통곡했다. 그러나 소리쳐 울었던 이유 때문에 위대한 철학자의 마지막 철학적 사유를 듣지 못했다. 가족으로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60a, 273p)


소크라테스는 족쇄를 푼 다리를 문지르면 괴로움 후에 즐거움이 함께 따른다고 말한다. 이는 죽음 앞에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죽음 이후에 즐겁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60b-60c, 274-275pp)


【소크라테스가 시를 쓴 이유】


이어 케베스가 질문을 하였다. 왜 소크라테스가 옥중에서 아이소포스(이솝)의 이야기로 시를 짓는지, 아폴론의 찬가를 짓는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시를 지으라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꿈에서의 계시를 지키기 위해 통속적인 시라도 써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뿐이지, 케베스가 말한 대로 에우에노스와 경쟁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뒤를 이으란 말을 전하라고 했다. 이에 함께한 사람들은 자살하는 것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고,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라면 죽음을 환영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한다. 이것이 논쟁거리가 되었다.(60d-61c, 276-278pp)


그리하여 죽음을 오늘(죽는 날)의 대화 주제로 삼자고 소크라테스가 제안하였다.(61e)


【자살하면 안되는 이유】


케베스는 도대체 왜 자살은 하면 안되는지 질문하였다.

소크라테스의 1차 대답은

1)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나은 경우란 인간에게 없기 때문이고,

2) 죽는 것이 더 나은 사람일지라도 자살은 경건치 못하므로 해서는 안되고, 죽음이란 타살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죽여주는 자는 은인이 된다! (61e-62a, 281p)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가정은 불합리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말한 바를 증명하기 위해, 자살과 관련된 은밀한 설이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일종의 감옥에 갇혀 있는데 아무도 스스로를 이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서는 안 되며 몰래 도망가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 감옥은 육체를 말한다. 스스로 감옥에서 풀려나게 하거나 도망가는 것이 자살이다.

그런데 인간은 신들의 소유물이다. 가축이 스스로 죽는 것을 소유주가 기뻐하지 않듯이 신들도 자살하는 인간에 대해 화내고 벌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오직 그 소유주가 되는 신들의 허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신의 죽음은 사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며, 사형집행은 이제 필연적인 것이고 신들의 허락으로 되어진 일이다.(62b, 282p)


이에 대해 케베스가 반론을 제기했다. 즉, 철학자들이 기꺼이 죽음을 환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지혜로운 자들인 철학자들이 가장 훌륭한 감독자인 신들의 보호를 뿌리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이다. 현명한 노예라면 좋은 주인의 보호를 받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자신의 죽음을 화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케베스의 반론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케베스가 모르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이 죽는 것에 대하여 성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1) 이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훌륭한 인간들 곁으로 가기 때문이다.

2) 다른 곳도 아니고 (아주 훌륭한 주인들인) 신들 곁으로 가기 때문이다.

3)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나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 있을 것이란 낙관적 기대 때문이다.(63b, 285p)

철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전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의 지적능력이 우수하다고 해도 모든 것을 포괄할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강현경님의 말대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인간이 못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가진 척도는 이생의 것이기 보다는 죽음 너머의 기준을 제시한 것 같다. 이런 부분은 유대교의 사두개파(현실주의자들)와 바리새파(부활과 내세를 믿는 사람들)의 차이점과도 같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오자, 시미아스는 소크라테스의 낙관적 기대론을 듣고자 했다.


【간수의 참견】


이때, 크리톤이 간수가 말을 많이 하면 나중에 독약의 효과가 약해진다는 말을 전했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했다. 중요한 일을 함에 있어 이렇게 부수적으로 보이는 작은 일들이 끼어들 때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 일을 적절히 처리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작은 일에 매여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그는 큰 일을 결국 못하고 만다. 지금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한 사유를 정리하고 있는 중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63e, 286p)


【철학자와 죽음】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계속 제시하며 논박에 들어갔다.

철학자들은 죽는 것과 죽음을 스스로 추구한다. 그것도 온 생애를 통하여 열망한다. 그런 그가 막상 죽을 때가 되자 죽음에 대해 성을 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를 시미아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더욱 세분화된 질문을 하였다.

 -(1) (철학자들이) 어떤 점에서 죽기를 바라는가?

 -(2) (철학자들이) 어떤 점에서 죽음에 대해 자격이 있는가?

 -(3) (철학자들이) 맞는 죽음은 어떤 종류의 죽음인가?


“죽음이란 있는가?”

“그렇다”


“죽음이란 혼이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죽음의 정의)

“그렇다.”


“철학자들에게 먹고 마시는 즐거움의 갈망이 어울리는가?”

“그렇지 않다.”


“성적 즐거움은?”

“어울리지 않는다.”


“장신구를 단다든지 하는 것으로 몸을 보살피는 행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철학자의 관심은 몸에서 멀리 떨어지고, 혼으로 향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혼이 몸과의 결합상태에서 최대한 분리되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 볼 때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다.” (64c-65a, 288-290pp) (철학자의 정의)


“지혜를 획득하는 데 몸은 방해가 되는가?”

“방해된다. 혼이 진실을 알려고 할 때 몸으로 인해 속임을 당한다.”(65a-65b, 291-292pp)


“혼에 명백한 것은 추론하는 일이다. 그리고 가장 훌륭하게 추론하는 것은 혼이 가능한 몸과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실에 이르는 것이다.” (65c, 292p)


“올바른 무엇인가는 그 자체로 있다(Idea)"

“아름다운 무엇인가(아름다움 자체), 좋은 무엇인가(좋음 자체) 등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몸을 통해 모든 것의 본질을 볼 수 없다.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사유를 통해서다.”

 -가장 정확하게 사유하는 이가 본질을 접할 것이다.

 -몸에서 최대한 해방된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다.

 -몸이 혼과 결합한 상태에서는 몸이 혼을 혼란스럽게 한다.


다시 말해서, 몸이 혼과 범벅이 되어 있을 때는 본질을 찾는 게 불가능하다.

 -몸은 분주한 일거리를 만든다. 예를 들어, 병이 들거나, 욕정에 휘말리거나, 두려움에 빠지면 그렇다.

 -욕망은 불화와 전쟁의 원인이다.

 -몸에 집중하면 철학할 수 있는 여가를 까먹게 되고, 혹 철학할 수 있는 여가가 생겨도 탐구과정에 끼어들어 소란과 혼란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뭔가를 순수하게 알려면 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되도록 몸과 전혀 같이 지내지 말라. 이런 내용은 후에 견유학파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65d-67b, 294-299pp)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나 자신과 같이 준비된 사람에게 죽음은 밝은 희망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죽음을 정화(katharsis)로 정의한다. 혼을 몸에서 분리하여 혼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철학자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힘쓰는 사람이다.(67c-68a, 300-301pp)


죽게 되었다고 성을 낸다면 그는 철학자가 아니라,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재물이나 명예를 탐내는 사람이다. (철학자는 재물이나 명예를 탐하지 않는다!)


철학자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 중 잘못된 것도 알 수 있다.(68c-69c, 303-306pp)

1) 용감함 : 사람들은 대개 죽음을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평판이 나빠지는 것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죽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을 생각해서 나서는 것이지, 죽음을 제대로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용감하다는 말은 왜곡되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2) 절제 : 돈 1000원으로 아이스크림과 호떡을 모두 살 수 없을 때, 한 가지를 포기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개의 절제가 이와 같다는 것이다. 정말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지혜이다. 지혜를 얻으려고 다른 것을 참는 것이 진짜 절제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입교의식을 확립해 준 사람들이 곧 애지자(철학자)라고 했다. 그들은 죽음 너머의 세계에 평소부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인이라고 하여 모두 애지자는 아니라고 하였다.(69d) 소크라테스 자신도 스스로 애지자의 길을 걸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는 조금 더 있어봐야(죽어봐야)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69d, 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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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유수정 | 작성시간 07.05.26 선생님 우리보다 좀 늦으면 정보를 얻을을텐데...멋진책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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