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에네이스 Aeneis』에 대하여

작성자서창호|작성시간08.11.07|조회수189 목록 댓글 0

『아에네이스』

  1) 『아에네이스』는 미완성 작품이다. B.C. 29년 베르길리우스가 41세 되던 해에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이누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베르길리우스는 마에케나스와 <전원교향시>를 낭송했는데, 거기서 서사시의 착상으로 <아에네이스> 를 주제로 정하였다고 한다. <아에네이스>는 11년에 거쳐 만들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에네에스>의 집필을 마치고 그리스와 아시야 여행을 결심하였다. 자신이 쓴 서사시의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수정하는 데 다시 3년이 소비되었지만, 그리스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메가라를 방문하던 중 열병이 든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와 이탈리아로 B.C. 19년에 돌아와 사망하였다. 그는 죽기 전 이 작품을 불살라달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했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이 작품을 남기게 하였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문예담당관 바리우스(Varius)와 투가(Tuca)가 원본을 조금 잘라내어 출판했다.

 

  2) <아에네이스>에 나오는 대로 로마인이 트로이 후손이라는 전설은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근거는 없다고 한다.

 

  3) 옥타비아누스는 서사시에 의거하여 아이네아스를 시조로 하는 율리우스(Julius)의 가계(家系)를 찬양하고, 예언을 빙자하여 로마와 옥타비아누스 자신의 역사적 개선을 세밀히 쓸 수 있었다. 즉 아이네아스가 베누스 여신의 친자라는 것은 왕가의 신통성을 보여준다.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는 율리우스라고도 불렸기 때문이다. 또 이 서사시를 통해 로마의 기원을 밝힌 것은 로마의 역사적 정통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옥타비아누스의 후원을 받은 베르길리우스가 로마의 국민적 서사시로 구상하여, 오랫동안의 내란을 수습하고 평화를 실현시킨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한 의도로 씌어진 것이다.

 

 4) <아에네이스>가 탄생하게 된 시대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옥타비아누스는  제1, 2차 삼두정치를 종식하고 제정시대를 열었다.  삼두정치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정치형태로, 용병을 사병화한 군인정치가들의 정치를 말한다. 제1차 삼두정치(60-50 B.C.)는 카이사르(시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정치를 말하는데, 크라수스는 전사하고, 남은 두 사람이 대결하여 카이스르가 승리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일당독재가 계속되자 공화파인 브루투스 일당이 카이사르를 암살한다. (언젠간 본 TV에서는 카이사르가 불멸의 명예를 얻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알고도 죽음의 장소로 나갔다는 설도 있다.)

 

          카이사르 암살 후 그의 부하인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양아들이 된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이끄는 제2차 삼두정치가 수립되었다. 이들은 로마를 3분하여 각각 통치하였다. 즉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각각 장악하였다. 장군으로서의 역량이 부족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아그리파의 지휘하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100년을 이어온 공화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B.C.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호칭을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고 제정(帝政)시대를 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새 제국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그러나 공화제 말기 키케로 시대의 문인들은 이전의 공화정에 향수를 느껴 아마도 침묵을 지켰거나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반대했지만, 신세대들은 새 시대의 영감을 받아들였다.

 

          이때 베르길리우스는 오랫동안의 내전이 종식된 데 안도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감사를 느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내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했으며 로마 인들에게 민족적 긍지와 용기, 절약, 의무 등 새로운 덕목을 고취시켰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 체제가 약속해주는 로마의 재건에 대해 열광을 느낀 베르길리우스는, 드디어 자신이 평소 준비해온 로마 건국을 찬양한 장편 서사시 <아에네이스>를 집필하였다.

 

           그러나 11년의 집필 후에, 그리스와 아시아의 여행 후에 그는 죽기전 <아에네이스>를 분서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은 <아에네이스>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의심하게 한다.

 

 5) 베르길리우스 사후 <아에네이스>는 로마의 청소년 교육을 위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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