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이라는 칼, 인간이라는 몸
—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황석영의 「손님」,
공산주의자라는 형상을 중심으로 —
소설은 때로 역사가 감히 발화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공문서는 사망자 수를 기록하지만, 소설은 그 죽음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와 황석영의 「손님」(2001)은 바로 그 기억의 자리에서 쓰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 학살이라는, 각각 다른 시간과 공간의 비극을 배경으로 하지만, 두 작품이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은 하나로 수렴한다. 이념의 이름 아래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조건 속에서 공산주의자라는 형상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해체되는가.
이 물음을 따라가기 위해 이 글은 세 개의 축을 설정한다. 첫째는 형식의 문제다. 두 작품이 채택한 서술 방식의 차이를, 3인칭 전지적 시점이라는 가상의 준거를 통해 역으로 조명한다. 둘째는 이념과 인간의 문제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각각의 목표를 위해 동원한 수단과 방법, 그리고 그 수단의 희생이 된 인간의 형상을 대비한다. 셋째는 종교적 언어의 문제다. 기독교 신학의 시각을 주축으로, 불교적·무속적 사유를 보조 축으로 삼아 두 작품이 품고 있는 구원과 용서의 가능성을 묻는다.
1. 전지(全知)를 거부한 서술 — 형식이 윤리가 되는 자리
소설의 서술 시점은 단순한 기술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역사 앞에서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키느냐의 윤리적 결단이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2인칭과 1인칭, 3인칭을 장마다 교체하며 서술자의 자리를 끊임없이 이동시킨다. 독자는 어느 한 자리에 안착하지 못하고, 그 불안정한 시선 속에서 피해자의 내면과 가해자의 논리, 그리고 생존자의 죄책감을 차례로 통과해야 한다. 황석영은 「손님」에서 씻김굿의 형식을 빌려 망자들이 직접 말하게 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대신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스스로 제 죽음의 진실을 발화하는 구조다.
만약 두 작품이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서술자는 광주 도청 안의 시민군과 계엄군 지휘부를 동시에 조망하고, 신천의 우익 기독교인과 좌익 청년대를 함께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전지성이 이 두 비극 앞에서는 하나의 폭력이 된다. 학살의 현장을 균형 잡힌 시선으로 조망하는 서술자는, 어느 쪽의 고통도 충분히 담지 못한 채 역사를 하나의 사건으로 납작하게 만들 위험을 안는다. 한강과 황석영이 전지적 시점을 의도적으로 회피한 것은, 역사적 진실 앞에서 전지(全知)를 참칭할 수 없다는 서술 윤리의 표명이다.
한강의 2인칭 서술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너는 열다섯 살이었다"로 시작되는 문장들은 독자를 강제로 피해자의 자리에 세운다. 이 서술 전략은 기독교 신학의 언어로 읽으면 하나의 성육신(Incarnation)적 몸짓에 가깝다. 고통은 멀리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신학적 명제를 서술 형식 자체가 수행한다. 황석영의 씻김굿 형식은 불교와 무속이 공유하는 중음(中陰)의 감각,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를 전제한다. 망자의 목소리가 현재 안에서 울릴 수 있는 것은, 그 죽음이 아직 충분히 애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형식은 서로 다른 언어로 동일한 문학적 신앙을 고백한다. 죽은 자를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 그들의 고통을 서술자의 언어로 번역하여 소비하지 않겠다는 것. 이 거부가 두 소설의 형식적 선택을 단순한 기교가 아닌 윤리적 행위로 만든다.
2. 목표의 순결과 수단의 오염 — 이념이 인간을 부수는 방식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표방하는 목표에서 각각의 숭고함을 지닌다. 공산주의는 착취 없는 평등 사회를 꿈꾸고,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두 이념이 한반도의 특수한 역사 지형 위에서 충돌했을 때, 목표의 순결함은 수단의 폭력성 앞에서 그 빛을 잃었다. 「소년이 온다」와 「손님」은 이 역설의 핵심을 가장 날카롭게 파고드는 작품들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논리는 명확하다. 그들은 폭도를 진압하고 있으며, 그 폭도는 암암리에 공산주의자와 동일시된다. 빨갱이라는 호명은 단순한 욕설이 아니라 살인을 허가하는 언어적 장치다. 한강은 이 장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직접 논증하지 않는다. 대신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눈을 통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과 기억을 지닌 존재인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공산주의자라는 추상적 범주가 인간을 지워버리는 데 동원되는 동안, 소설은 그 지워진 얼굴들을 한 명 한 명 복원한다.
"시체들을 날랐다. 그것들은 가벼웠다. 그것들은 무거웠다. 그것들은 사람이었다." (「소년이 온다」 중)
이 단호한 문장들은 이념이 인간에게 자행한 분류의 폭력에 맞선다. 시체는 그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사람이었다는 마지막 문장의 과거형은, 그 사람다움을 빼앗아간 것이 무엇인지를 무언의 고발로 지시한다.
「손님」의 구조는 더욱 복잡하다. 황석영은 공산주의자를 일방적인 피해자로도, 자유 민주주의자를 일방적인 가해자로도 그리지 않는다. 신천 학살에서 좌익과 우익은 서로를 향해 동일한 폭력을 행사했다. 교회 장로가 인민위원회 청년들을 죽이고, 인민위원회 청년들이 기독교인들을 죽인다. 이념은 살인의 언어를 각자에게 공평하게 빌려준다. 황석영이 이 두 이념을 통칭하여 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치적 중립의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두 이념이 공히 한반도의 몸에 외래의 역병처럼 침투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죽음으로 갈라놓았다는 진단이다.
칸트는 정언명령을 통해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두 소설이 증언하는 것은, 이념이 극단화될 때 이 명령이 가장 먼저 폐기된다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은 인간은 더 이상 목적 그 자체인 존재가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이념의 장애물로 환원된다. 그리고 이 환원의 논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름 아래서도, 공산주의의 이름 아래서도 동일하게 작동했다. 이것이 두 소설이 이념 비판의 차원에서 공유하는 가장 날카로운 통찰이다.
그런데 이념이 인간을 부수는 방식에는 단순한 물리적 폭력 이상의 것이 있다. 「소년이 온다」의 생존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의 포로가 된다. 그들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에 대한 부채 속에서 산다. 「손님」의 주인공 류요섭 목사는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가 뒤늦게 고향을 방문하여 형의 영혼과 마주하는 것은, 이념이 가족을 갈라놓고 기억을 차단했을 때 생존자에게 남는 상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념의 폭력은 죽은 자의 몸만이 아니라 산 자의 기억과 관계를 오래도록 훼손한다.
3. 공산주의자라는 형상 — 호명, 타자화, 그리고 인간 회복
문학에서 공산주의자라는 형상이 구성되는 방식은 그 사회의 이념 구조를 반영한다. 냉전 체제 아래 한국 문학에서 공산주의자는 오랫동안 인간 이하의 타자로 그려졌다.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 혹은 비극적 희생자로 단순화된 형상이 반복되었다. 한강과 황석영은 이 관습에 정면으로 저항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시민군은 공산주의자로 호명되지만, 소설 안에서 그 호명은 한 번도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몸이다. 뜨거운 밥을 먹고 싶어 하는 몸, 어머니를 부르는 몸, 총탄 앞에서 떨리는 몸. 공산주의자라는 기표가 지워버리려 한 것이 바로 이 몸의 구체성이다. 한강은 이 구체성을 끈질기게 복원함으로써, 호명의 폭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이었는지를 서술 자체로 증명한다.
「손님」에서 공산주의자의 형상은 더욱 복잡한 방식으로 해체된다. 인민위원회 청년들은 그들 나름의 이상과 두려움과 어리석음을 지닌 인간들이다. 황석영은 그들을 영웅으로도, 악마로도 그리지 않는다. 씻김굿의 마당에서 좌익의 망자와 우익의 망자는 동등한 목소리로 제 억울함을 토로한다. 이것은 역사적 상대주의가 아니다. 두 진영이 저지른 폭력은 모두 실재했고, 그 폭력의 무게는 각자가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두 진영의 인간들은 동일하게 용서받아야 할 존재, 동일하게 애도 받아야 할 존재로 선다.
"형님, 우리가 다 같이 귀신이 됐지유. 살아 있을 때는 남이었지만 죽고 나니 한데 묶이는구먼유." (「손님」 중)
이 대사는 이념이 죽음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살아서 적이었던 자들이 죽어서 같은 망자의 자리에 선다. 공산주의자라는 형상은, 그것이 아무리 강고하게 구성되더라도, 인간이라는 더 근본적인 조건 앞에서 결국 해체된다.
4. 십자가, 씻김, 그리고 업 — 종교적 언어가 닿는 자리
두 소설에서 종교는 장식이 아니다. 「손님」에서는 기독교와 무속이 텍스트 구조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으며, 「소년이 온다」에서는 종교적 언어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수난과 부활, 증언의 서사 구조를 이룬다.
「손님」의 가장 날카로운 역설은, 신천 학살의 가해자들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던 공동체가 동일한 이름으로 이웃을 학살했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이 정면으로 직면해야 할 질문이다. 신앙이 이념의 도구가 될 때, 복음은 어떻게 폭력의 언어로 전락하는가. 이 질문에 황석영은 직접 답하지 않는다. 대신 씻김굿이라는 무속 형식을 통해 기독교적 용서 서사가 감당하지 못한 것을 보완한다. 굿판에서 원혼은 말하고, 산 자는 듣는다. 이 말하기와 듣기의 의례가 완수될 때, 비로소 죽은 자는 떠날 수 있고 산 자는 조금 자유로워진다.
기독교 신학의 핵심 언어인 화해(Reconciliation)는 단순히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의 실재를 인정하고, 가해의 책임을 고백하며, 용서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손님」의 류요섭 목사가 고향에 돌아와 형의 영혼과 대면하는 여정은 바로 이 화해의 과정을 몸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저지른 폭력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망자들의 씻김에 동참함으로써 비로소 용서의 첫 걸음을 뗀다.
「소년이 온다」는 종교적 언어를 직접 동원하지 않지만, 그 서사 구조는 기독교의 수난과 부활 신학을 깊이 공명한다. 동호는 죽지만, 그의 죽음은 소설을 통해 반복적으로 소환되고 증언된다. 이 증언의 행위 자체가 부활의 한 형태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논하며,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들의 고통 안에서 함께 고통 받는다고 선언했다. 광주 도청 안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고통은, 기독교 신학의 언어로 읽으면 하나님이 외면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깊이 임재한 자리다. 한강이 그 고통을 소설로 복원하는 행위는 신학적 의미의 증언(martyria), 곧 목숨을 건 진실 발화다.
불교의 관점에서 두 소설이 형상화하는 고통은 업(業)의 연쇄로 읽힌다. 신천의 학살과 광주의 학살은 각각 역사적으로 축적된 증오와 두려움, 그리고 구조적 폭력이 특정한 순간에 폭발한 결과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이 연쇄를 끊을 수 없다. 가지가 포로수용소에서 그러했듯, 동호와 신천의 청년들도 거대한 업의 그물망 속에서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폭력에 휩쓸린다. 그러나 불교는 이 업의 연쇄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전환의 첫 걸음이라고 가르친다. 두 소설이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이 의미에서 업의 직시이자 그 전환을 향한 문학적 수행이다.
무속의 씻김굿은 이 세 종교 전통 가운데 가장 집단적이고 의례적인 방식으로 상처를 처리한다. 한(恨)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짊어진 역사적 정서다. 씻김은 그 한을 풀어내는 집단적 의례이며, 이 의례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는 잠시 동일한 공간에 공존한다. 황석영이 씻김굿 형식을 차용한 것은, 기독교적 고백과 용서, 불교적 업의 직시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집단적 정서의 층위를 포착하기 위함이다. 세 종교 전통은 각자의 언어로 동일한 상처 앞에 서며,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 또한 각자의 고유한 의례를 통해 수행된다.
5. 결어 - 용서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용서는 쉽지 않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용서는 불가능하다. 「소년이 온다」의 생존자들에게 광주를 용서하라는 말은 모욕에 가깝다. 「손님」의 학살 피해자 후손들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용서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화해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독교 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용서를 두 층위로 나눈다. 하나는 행위에 대한 용서이며, 다른 하나는 행위자에 대한 용서다. 행위에 대한 용서는, 그 행위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 행위가 행위자의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손님」의 씻김굿은 바로 이 두 층위의 용서를 동시에 수행한다. 죽은 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은 학살이라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행위를 저지른 인간들 역시 용서의 가능성 안에 놓인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 장에서 한강은 소설을 쓰는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등장시킨다. 이 자기 노출은 단순한 메타픽션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증언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증언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작업인지에 대한 고백이다. 작가는 이 고통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와 함께 그 고통의 자리에 선다. 이것은 신학적 의미의 연대(solidarity)이며,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성육신적 몸짓이다.
공산주의자라는 형상은 두 소설에서 끝내 해체된다. 그 형상이 덮어씌우려 한 인간의 얼굴이 복원되고, 이념의 칼이 부수려 한 몸의 구체성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이 복원과 부활은 결코 값싸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죽은 자를 기억하는 긴 시간의 대가로, 산 자의 고통을 마주하는 용기의 대가로, 그리고 용서의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화해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의지의 대가로 얻어진다.
한강과 황석영은 이 대가를 치르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한강은 고통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고, 황석영은 역사의 전체를 굿판 위에 펼쳐 보인다. 그러나 두 작가가 공유하는 것은 하나다. 이념이 부수려 한 인간을 문학이 다시 세워야 한다는 믿음. 칼보다 몸이 먼저이며, 이념보다 인간이 먼저라는 믿음. 이 믿음이야말로, 두 소설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