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일찍부터 김제 죽산 (대산)을 지나 부안 백산(흰산)을 거쳐 고부 땅으로 들어갔다
맨 먼저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송두호 집을 찾았는데 송두호씨의 증손주 며느리가 살고 계시는데 연세가 많으셔서 집을 원형은 그대로 보존하되 부엌을 현대식으로 개조중이었다.
참 안타깝다
그곳이 동학농민운동이 맨처음 태동한 산실을 영구보존해야 할텐데 정읍시에서는 그대로 방치 하고 있으니....
근처에 있는 동학혁명 모의탑과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을 둘러보고 나와서 당시 악덕 관리 조병갑이 다스리던 고부 관아터를 찾아보니 그 관아터는일본 놈들이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초등학교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었다
동학군을 진멸한 일본놈들이 제놈들의 잔악상을 없애기 위해 역사의 흔적을 지우려한 행위이다
아쉬운 마음을 간직하고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하고 정면으로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 해서 전국적인 봉기의 시발점이 된 황토현으로 갔다
그곳에는 동학혁명 기념관이 있는데 나이 많이드신 어른이 해설사로서 수고 하시는데 알아듣기 쉽고 역사적으로 감명 받을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이평으로 이동해서 말목장터를 들러서 동학혁명의 발단이 된 만석보를 보기 위해 오다 중간에 만석보 혁파비를 보고 만석보 자리에 들렸다
정읍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곳에 보를 막아 농민들에 비싼 수세를 뜯어가려고 농민들 고역을 시켰던 슬픈 장소에 들어서니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이렇게 추운데 120여년전 옷도 얇고 배도 굶주린 백성들이 이 보다 더 추운 추위와 싸우면서 맨발로 질퍽거리는 물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조병갑이가 태인 현감으로 있었던 지 애비 조규순이 영세 불망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왜 고부 백성들에게서 수 많은 돈을 뜯었는지. ..
일단 태인은 거쳐 오면서도 시간이 없어 들리지 못하고 산외로 오면서 김개남 장군의 가묘에 들렸다
김개남 장군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시체는 찾을 수 없어 이곳 고향에 그분을 기리기 위하여 부인과 함께 가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니 후세들이 그분의 넋이라도 기리니라
때는 1894년 갑오년 음력 1월 10일 이었다
중앙정부는 아무런 힘도 없이 외세에 흔들리고 고관대작들은 자기들 살길만 찾고 지방 관아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한양에 있는 고관들에게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상납하던 시절이니 백성들의 험난한 고난은 미루어 짐작하리라
그날의 슬프고 아팠던 고통을 참다 참다 견디지 못하고 일어섰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등 민중이 들고 일어났던 봉기가 이 땅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터인데...
우리나라의 현재 국제적인 역학관계나 현실 정치가 그날을 닮아가는 듯하여 참으로 우려스럽다
동학 농민군들이 불렀다는
가보세 가보세 (갑오년) 1894년
을미적 을미적 하다가는 (을미년)1895년
병신되리 (병신년) 1896년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파랑새는 일본군. 녹두는 전봉준 장군)
이런 슬픈 노래는 역사적으로만 부르고 우리 현실에서 다시는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첨언:전봉준 장군의 키는 5척, 152쎈티미터였다고 한다. 녹두처럼 작지만 야물다고 해서 녹두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맨 먼저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송두호 집을 찾았는데 송두호씨의 증손주 며느리가 살고 계시는데 연세가 많으셔서 집을 원형은 그대로 보존하되 부엌을 현대식으로 개조중이었다.
참 안타깝다
그곳이 동학농민운동이 맨처음 태동한 산실을 영구보존해야 할텐데 정읍시에서는 그대로 방치 하고 있으니....
근처에 있는 동학혁명 모의탑과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을 둘러보고 나와서 당시 악덕 관리 조병갑이 다스리던 고부 관아터를 찾아보니 그 관아터는일본 놈들이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초등학교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었다
동학군을 진멸한 일본놈들이 제놈들의 잔악상을 없애기 위해 역사의 흔적을 지우려한 행위이다
아쉬운 마음을 간직하고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하고 정면으로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 해서 전국적인 봉기의 시발점이 된 황토현으로 갔다
그곳에는 동학혁명 기념관이 있는데 나이 많이드신 어른이 해설사로서 수고 하시는데 알아듣기 쉽고 역사적으로 감명 받을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이평으로 이동해서 말목장터를 들러서 동학혁명의 발단이 된 만석보를 보기 위해 오다 중간에 만석보 혁파비를 보고 만석보 자리에 들렸다
정읍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곳에 보를 막아 농민들에 비싼 수세를 뜯어가려고 농민들 고역을 시켰던 슬픈 장소에 들어서니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이렇게 추운데 120여년전 옷도 얇고 배도 굶주린 백성들이 이 보다 더 추운 추위와 싸우면서 맨발로 질퍽거리는 물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조병갑이가 태인 현감으로 있었던 지 애비 조규순이 영세 불망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왜 고부 백성들에게서 수 많은 돈을 뜯었는지. ..
일단 태인은 거쳐 오면서도 시간이 없어 들리지 못하고 산외로 오면서 김개남 장군의 가묘에 들렸다
김개남 장군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시체는 찾을 수 없어 이곳 고향에 그분을 기리기 위하여 부인과 함께 가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니 후세들이 그분의 넋이라도 기리니라
때는 1894년 갑오년 음력 1월 10일 이었다
중앙정부는 아무런 힘도 없이 외세에 흔들리고 고관대작들은 자기들 살길만 찾고 지방 관아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한양에 있는 고관들에게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상납하던 시절이니 백성들의 험난한 고난은 미루어 짐작하리라
그날의 슬프고 아팠던 고통을 참다 참다 견디지 못하고 일어섰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등 민중이 들고 일어났던 봉기가 이 땅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터인데...
우리나라의 현재 국제적인 역학관계나 현실 정치가 그날을 닮아가는 듯하여 참으로 우려스럽다
동학 농민군들이 불렀다는
가보세 가보세 (갑오년) 1894년
을미적 을미적 하다가는 (을미년)1895년
병신되리 (병신년) 1896년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파랑새는 일본군. 녹두는 전봉준 장군)
이런 슬픈 노래는 역사적으로만 부르고 우리 현실에서 다시는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첨언:전봉준 장군의 키는 5척, 152쎈티미터였다고 한다. 녹두처럼 작지만 야물다고 해서 녹두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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