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같은 글을 또 적는다. 천진암에 관한 이야기다.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진암은 내겐 초년 기자시절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천진암터에 있던 절들이 이곳에 성지조성을 추진하는 천주교측에 의해 갖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현장 취재를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맹하를 방불케 하는 태양이 작열하던 지난 6월 어느 날, 나는 평소 가까이 지내는 지인들과 함께 광주 퇴촌리를 찾았다가 천진암을 들렀다. 무려 20년 만의 일이다.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라 애써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을 찾아와 옛날의 기억을 되새겼고, 천진암의 금당 자리에 줄지어 자리하고 있는 천주교인들의 묘를 다시금 살펴 보고는 기자의 오기가 발동해 ‘역사왜곡의 현장을 왔다’며 한 장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 일이 그만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게 된 ‘화근’이 된 것이다. 절터였던 천진암에 어떻게 천주교인들의 무덤이 들어섰고, 천주교 발상지가 되었는가를 심층취재로 알려달라는 댓글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천진암 금당터에 줄지어 자리하고 있는 이벽 등 천주교인들의 무덤들.

옛 천진암터를 알리는 팻말
사실 퇴촌리를 찾은 것은 천진암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주 맛나게 붕어찜을 하는 집이 있어 꼭 한 번 같이 가보고 싶다는 동행 지인과의 오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천진암 팻말이 붙은 퇴촌리로 접어들면서, 20년 전 천진암 취재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이 기억의 단편은 이미 3년 전, 이학종 칼럼 ‘향산 칼럼이 내 아픈 기억을 불러냈다-20년 전, 천진암에 얽힌 씁쓸한 나의 취재 이야기(2009. 7.10)’를 통해 이미 <미디어붓다>의 독자들에게는 알려드린 바 있지만, 여전히 그 당시에 받았던 아픔과 안타까움이 식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행들에게 부탁을 해 붕어찜은 먼저 천진암을 돌아보고 난 뒤에 먹자고 양해를 구하고 천진암으로 향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천진암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골똘해졌다. 1992년 경 막 부처님오신날이 지났을 무렵에 천진암터를 찾았으니, 아마도 지금과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길을 물어물어 비지땀을 흘리면서 찾았던 당시 천진암 취재의 기억이 목 뒤로 흐르는 땀과 함께 뇌리에 마치 곤두선 비늘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광활하게 터를 닦아 놓은 천진암 성역
“이렇게 변했나!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역사를 지어내고 그것을 실제의 역사로 만들어가는 왜곡의 현장. 나는 천진암 입구에서 얼어붙은 동상처럼 한 동안을 멈춰서 있었다. 이렇듯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는 감히 시시비비를 붙지 못할 정도로 웅장한 규모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천진암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안내소에 꽂혀 있는 리플렛을 살펴보니, 천진암은 옛 절터가 아닌 천주교의 성지로 완전하게 탈바꿈 되어 있었다.
“천진암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주역 이벽 성조께서 약 15년간(1770∼1784) 학업과 수도에 전념하던 독서처 천학도장(天學道場)이 있었고, 1777년부터는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젊은 선비들과 함께 천학(天學)을 연구 실천하였으며, 때로는 권철신 같은 당시 저명한 학자들도 참석하는 천주교 교리연구 실천 강학회가 개최되어, 학문적 수준에 있던 천학을 종교적 신앙차원으로 승화시켜, 천주교 기도와 음력주일 제정, 실천 등 천주교 신앙 실천의 도장이 있던 곳입니다.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이벽 성조를 웃어른으로 삼자, 문하생들에게 이벽 성조께서는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받아써서 배우게 하였고, 선비들은 천학총림(天學叢林), 즉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으며, 1783년에는 새로 개종하여 입교한 선비들과 힘을 합하여, 이승훈 진사를 대표자로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하여, 1784년 봄 2월에 영세하고 귀국하자, 그 해 4월 즉시 서울 수표동의 이벽 성조 자택으로 본부를 옮겨 집회소를 차렸으니, 천진암은 바로 한국천주교회 신앙운동의 국내 최초 본거지였습니다.”
천진암을 소개하는 어디에도 이곳이 불교의 암자였던 천진암의 자리였다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리플렛에 따르면, 천진암은 그저 옛날 천주교인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뤘던 천학총림인 것이다.
서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던 이벽 등이 천진암과 인근 주어사 등에서 강학회(세미나)를 가진 곳으로, 강학회에서 천주교와 관련된 의식을 실습해 보았다는 정도의 20년 전 기록을 감안하면, 20년 세월 동안 참으로 많은 부분이 보태지고 부풀려 졌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천진암 성역 입구에 세워져 있는 교황의 강복문.
“이제는 이곳이 절이었던 사실조차 감추려 하고 있구나!”
천주교 일각에서, 이제는 천주교 전체가 한국천주교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현장에서 바라보며 나는 일종의 두려움으로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는 것을. 불교가 절터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던 절이 내쫓길 때에도 눈길 한 번 준적이 없었는데 이제와서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기술된 천진암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鶯子峰)에 있었던 사찰. 한국천주교회의 발상(發祥)과 관련되는 사적지로, 지금은 폐사(廢寺)되었다. 18세기 중엽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한 남인계 소장학자들은 이익(李瀷)의 서학열을 이어받아 독특한 학풍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경기도 광주시과 여주군 등지의 사찰에서 강학(講學)을 가졌다. 이 강학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천진암이다.
강학의 내용은 주로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를 위주로 하였으나 당시 전래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도 집중적으로 검토되어 결국 천주신앙으로 전개되었다. 천주교에 관계하였던 인물들 중 이곳을 자주 방문하였던 인물로는 이벽(李檗)과 정약용(丁若鏞)이 대표적이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에는 천진암과 관련된 시문이 여러 편 보인다. 그 때 벌써 퇴락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여유당전서≫ 중 “석재기해동강학우천진암주어사설중이벽야지장촉담경(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庵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의 구절을 종래대로 “기해년 동월에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의 모임이 열렸을 때 눈 속에 이벽이 야밤에 찾아들었다.”라고 해석하지 말고 “이벽이 눈 속에 주어사에서 천진암으로 찾아왔다.”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천진암은 5년간 천주교신앙운동의 본산역할을 한 반면, 주어사는 권철신이 잠시 머물던 휴양처라고 보게 되어 천진암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러나 서학에서 천주신앙으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장소가 천진암인가에 대하여서는 많은 이견이 제시되어 있다.
천진암은 그 뒤 폐허가 되었으나 1962년 남상철(南相喆)에 의하여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1979∼1981년 사이에 이벽·정약종(丁若鍾)·권철신·권일신(權日身)·이승훈(李承薰) 등 한국천주교회 초기 인물들의 묘소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천주교 수원교구가 중심이 되어 이 일대 개발이 추진되어 현재 신도들의 순례에 필요한 각종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고, 가르멜수도원이 세워져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천진암에 관한 내용을 냉철하게 살펴보면, 유학을 중심으로 한 강학회의 장소로 여주 일대 주어사와 천진암 등이 있었다는 점. 강학의 내용 가운데 서학에 관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진암을 천주교 신앙운동의 본산으로 만들기 위해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구절의 해석을 달리 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는 점, 천주교 일각에서도 천진암을 한국천주교 발상지로 보는데 대해 이견이 존재한다는 점 등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다.
아무튼, 역사를 만들어내려는 천주교인들의 집요함과 강한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천주교가 외국의 선교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서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신앙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절의 암자를 이렇게 천주교의 발상지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에게는 그들이 언제가부터 성조(聖祖)로 받들고 있는 이벽(李檗)이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배교(背敎)를 했다는 점, 이곳을 천주교의 성지로 만드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달레 신부의 기록이 그의 정신질환 등으로 인해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이 천진암이 박해를 받던 천주교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폐사가 되었고 이곳에 살던 스님들도 처참하게 처형되었다는 점(20년 전 취재 당시 인근 관음리 주민들의 증언), 정약용이 천주교인이었다는 주장은 학계와 유교계 등으로부터 강력하게 반박을 받는 등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 그 후 이곳에 있던 영통사 등 사찰이 그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이전했다는 점 등은 안중에 없는 듯이 보였다.
거듭 밝히거니와 이제와 이런 글을 쓰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옛 천진암에 살았던 스님들이 강햑의 장소로 절을 빌려 주었다는 고마움, 천진암이 천주교인들을 숨겨주었다가 폐사가 된 데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이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이곳이 불교의 암자였다는 사실조차 애써 감추려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처량한 넋두리일 것인가.
언젠가 쓴 칼럼에서도 나는 이런 제안을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 소용도 없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한국 천주교여. 당신들이 정말로 과거의 과오를 씻고 용서와 화해, 사랑의 종교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당신들에게 강학의 장소로 암자를 빌려주고, 또 당신들의 조상들을 숨겨주었다가 폐사가 되고, 암자에 살던 스님들이 죽임을 당한 천진암을 잘 복원해 불교계에 ‘감사장’과 함께 되돌려 주는 게 온당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