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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문

게옥 빌헴 프리드리히 히걸 - 세계사의 철학 강의-5(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작성자그녀생각|작성시간26.06.09|조회수28 목록 댓글 0

게옥 빌헴 프리드리히 히걸 - 세계사의 철학 강의-5(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Weltgeschichte, Berlin 1822/1823)

 

 

이제 로마인의 종교로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로마인이 여전히 '유한성의 지성'으로 믿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그들이 지성 규정에 얽매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종교도 이러한 (지성 규정의) 특성을 띤다. 

키케로는 ‘묶다' 라는 말로부터 ‘종교' 라는 말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하여 그는 다수(대중)의 진리에 만족한다.

로마인에게는 사실상 하나의 결속 상태가 있지만, 이에 비해 그리스인에게 종교는 자유로운 상상과 아름다움의 자유이다. 

한편, 기독교인에게 (종교는) 정신의 자유이다. 

그리스 종교와 로마 종교는 비록 그 이름은 유지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로마인의 경우에 그들 내에서의 ‘의견 불일치'라는 원리와 더불어 제한성과 특수성이 로마 국가 내에서 일반적으로 전개되고 규정된다.

정신 일반 내에 있는, 그리고 좀 더 상세히 보면, 정신의 의욕 내에 있는 부정태와 제한은 ‘유한하고 제한된 목적' 이다. 

로마다운 정신에는 유한한 목적이 최종 규정이다. 

로마인에게는 '인륜의 자유로운 향유' 없다. 

우리는 로마인에게서 '자유롭고 인문다운 전혀 보지 못하며, 그들의 목적 속에 제한된 관심사가 보여 주는 최대의 진지함을 본다. 

이에 비해 그리스인에게는 보다 심오한 진지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인은 견실하게 실천적(실용적)이다. 

로마인은 자신들의 목적 설정에서 이론적(관조적)이지 않고도 목적을 완수할 있다. 

왜냐하면 이론은 객관에 대한 공평무사한(이해관계 없는) 활동과 방향을 요구하며, 자유로운 객관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인의 신성과 종교다움은 전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체로 제한된 것이다.

이것(제한된 ) 대해 로마인은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며, 동시에 로마인에 대해 이것(제한된 )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성과 함께 더 나아가 로마인 속에 내면성이, 자기 자신에 대한 그(로마)의 확고함이 내면 자체에서 시작된다. 

이 같은 것이 분리이다. 

다시 말해 그(로마)의 자기 내 규정성이며, 목적의 제한성을 통해 출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것은 제한성을 통해 대체로 내면성 자체가 함께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로마인에게는 이렇듯 제한된 것이 최종적인 것이므로 제한된 목적에서 진지하고 실천적(실용적)이다. 

동방인(동양인)은 고요한 태만(관성) 상태에 있다. 

아울러 자신과 실체적 통일 상태에 있으며, 그 자신에게 침잠해 특수자에 관해서는 개의치 않는 다. 

그리스인은 무한히 유동적(활동적)이며, 아무 목적도 없는 가벼운 감각을 지니면서 곧바로 지나

가 버릴 뿐인 제한된 목적을 추동한다. 

왜냐하면 정신은 스스로 하나의 목적을 정립하는 한에서 이미 이 목적에 관해 자기 내에서 정신 자신의 확고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미신에 속박되어 있고, 그래서 너무 진지하다. 

로마인이 절대적이라고 직관하는 것 자체는 이미 속박되어 있으며, 특수한 목적의 제한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로마 종교에서 다수의 그리스 신과 그리스로부터 전해진 다른 것을 보지만, 이렇게 수용된 것도 둔중하게 느껴진다. 

우리에게는 그것(로마 종교)에서 로마인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외면적인(낯선) 것에 관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우리는 그것(로마 종교)에서 냉담한 상태를 유지한다. 

게다가 로마인은 시골풍의 순진함을 띠는 토착적인 본래의 몇몇 축제도 여는데, 이 축제에서는 명랑함이 수반되며 좀 더 명랑하고 심오한 기도가 있다. 

그러나 (로마 종교에서) 주요 특징은 특정한 의지와 목적에 대한 확고함이다. 

로마인은 자신들의 신들에게 이렇게 특정한 목적을 요구하며, 이 목적 때문에 신들을 숭배한다.

따라서 로마 종교는 합목적성과 유용성, 그리고 제한성의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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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종교는 '유용성의 종교'이며, 종교에서는 특수성이 절대화 된다. 

이렇게 구분과 제한성을 신성화해 그로부터 초래되는 혼란은 국가 정체와 관련해서도 지배 원리가 된다. 

(로마 종교의) 전체 원리와 성의 불평등이 함께 초래하는 바는, 그리스에서처럼 어떤 평등한 민주정도, 구체적인 생동성도 발생할 없다는 것이다. 

(로마에서는) 일부 부족(가문) 압도적 통치권이 근본 규정이다. 

또한 여기에서는 어떤 군주정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군주정은 특수성이 자유롭게 발전되는 정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로마)에서 목적은 여전히 제한된 것이며, 국가 목적으로서 제한된 것에 개인은 속박되어 있다. 

로마의 원리, 로마의 정치체제는 귀족정 만을 허용하지만, 귀족정은 자체로 적대적이고 제한된 것이다. 

그리고 (귀족정은) 가장 완전한 실존 상태에서도 대자적으로 완성된 형태일 수가 없다. 

오히려 불행과 곤궁을 통해서만 일시적으로 균형이 이루어질 있는 대립과 투쟁을 자체 속에 지닌다.

귀족정은 본래 자체 내에서 통합될 없으며, 가혹함 만이 통합될 없는 것을 통합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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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구체적인 면은 아무런 관심사가 아니다. 

구체적인 면은 로마인에게 중요하지 않으며, 이러한 형태의 귀족과 선한 황제조차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들은 상황을 있는 대로 방치하고 아무런 흔적 없이 지나가고 사라지는 다행스러운 하나의 우연일 뿐이다. 

그들은 좋든 나쁘든 원하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는 어떤 저항도, 사상도, 반드시 산출되어야 하는 것도 없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들조차 어떤 (제도적) 기구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특수자, 특수한 의지에 머물고 말았다.

로마 세계는 순수한 특수성의 정점을 통해 견고하게 배열되었다. 

거대한 특수성은 무척 견고해 미덕과 악덕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동등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대립도 현전하지 않고 어떤 것도 타당하지 않으며, (만일 대립하는 양쪽이 있다면) 양쪽은 모두 특수성의 사안일 뿐이다.

단순한 유한성이 목적이므로 모든 일은 있는 그대로 배열된 상태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렇게 견고한 상태 속에는 정신의 외면성이 있고, 깊은 (단절) 놓여 있다.

그러나 주관은 이러한 질서와 유한성에 반대해 등장했다. 

추상적 유한성에 대비되는 '절대적 주관성 자체와 '자기 존재의 무한성' 이미 모든 것을 눈에 띄지 않게 전복하면서 파괴한다. 

정신은 단적으로 탈자적인 상태에 있으며, 정신은 세계를 통치하면서 질서에 절대적 근거가 생겨나고 주어진다. 

따라서 어떤 명의 자의가 전체 세계를 지배했으므로 커다란 틈이 생겼다. 

이를 통해 특정 주관성의 지배가 시작된 번째 사람, 대자적으로 최종자로서 타당한 유한성인 완전하고 단순한 통치자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통치 아래에서 (이와는 대립하는) 반대편인 무한성이 현상했다.

그러나 ( 무한성은) 대자적으로 규정된 유한성 자체의 원리와 통합되므로, 유한성은 단지 현상의 형식일 뿐이지만 내용은 '절대적이며 즉자대자적인 '이다. 

이로써 세계사의 사안으로서 기독교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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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이념(absolute Idee)은 즉자대자적인 보편자이며, 이 보편자는 오직 사상을 위해 사상 속에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 보편자가 추상적인 것, 공허하고 절대적인 본질은 아니다. 

보편자는 무한히 자기 내적으로 규정된 , 절대적 부정성 또는 모든 규정성의 형식을 자체 속에 무한한 형식으로 지니고 있는 보편자이다. 

신의 이념은 일자이며, 단적인(절대적인) 보편자라서 속에 모든 자연적이며 특수한 것은 가라앉아 있다. 

그러나 일자는 방식 면에서 여전히 추상적이다. 

하지만 ( 일자의) 구체적 규정은 확정되어야 하는데, (구체적 규정) 속성(고유성) 아니다.

왜냐하면 속성은 자체로 항상 하나의 특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들처럼 감각적인 특수자가 아니며, 오히려 일자의 속성(고유성)이다). 

그러나 속성은 자체로 오직 특수한 내용만을, 전능과 전선 만을 지닌다. 

이러한 규정은 주관(주체) 충족하지 못한다. 

동방인은 자신들의 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명명하지만 이러한 규정이 빠짐 없이 소진된 상태는 아니며, 그것들이 완수해야 할 것을 완수하지 못한 상술의 시도일 뿐이다. 

그래서 단지 '나쁜 무한(ein schlecht Unendliches)’일 뿐이다. 

따라서 속성(고유성)은 일자의 본질을 충분히 상술하지 못한다. 

참된 충만은 그것이 파악되었을 때 일자이다.

참된 충만이 충분히 상술된다는 , 그것은 다음과 같은 데서 존립한다. 

규정성이 다수의 특수자를 구성하지 않으며, 규정은 하나의 특수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체 내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규정은 자신을 자신 밖의 모든 것에로 내보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자신에게로 환수하면서 자신 내로 되돌린다는 , (그래서) ‘대자존재' 라는 점에 존립한다.

이것(대자존재) 무한한 충만(unendliche Fülle)이다. 

일자는 절대적으로 규정되고 자체 내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규정성은 '절대적 규정성(absolute Bestimmtheit)’이며, '공허한, 절대적인 무한한 규정성' 아니라 다른 자기 연관으로 자신 밖으로 내보내기' 존립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자기에게로 환수함으로써 이러한 측면 모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러한 복귀는 어떤 한계도 아닌 하나의 한계이다.

이러한 충만은 이념의 충만이다. 

이념은 스스로를 규정하고 특수화(분화)하는 이러한 일자이다. 

즉 이념은 이념 스스로를 이념 자신의 타자로서 산출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이념은 (자신의) 타자 속에서 스스로 어떤 타자도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부정태를 부정하며 '-타자' 정립하면서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일자이다.

신은 자신으로부터 타자를 배제하면서도 배제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무한한 삶이다.

이러한 관계가 사변적 형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양한 형식으로 아는데, 예를 들어 감각에서 그것을 '사랑'으로, '내가 타자 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지닐 '라는 것으로 안다.

내가 타자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에게 머물지 못하면 나는 불완전하며 타자 안에서 의욕과 앎을 지닌다. 

그러나 타자 안에서의 나의 앎과 의욕은 자신이다. 

그것(나의 앎과 의욕) 타자 속에서야 비로소 나에게 되돌려지기에, 타자는 나에게 타자가 아니라 단적으로 자신이 된다. 

양쪽(나와 타자) 모두 타자이며, 상호 배타적이면서도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한다.

고차적 형식에서 이념(Idee) 정신(Geist)이다. 

정신의 정의는 이와 동일하며 이러한 내용이 삼위일체(Dreieinigkeit)에서 기독교 교회의 교리로 표상되는 바로 그것이다. 

종교에서는 거기 (삼위일체)에서만 비로소 정신 개념이 표현되며, 그래서 정신의 본질이 계시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에서) 정신이 무엇인지가 계시되기(드러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신을 삼위일체로 알면서 신이 무엇인지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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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에서 이것(제한 상태) 다음과 같다. 

일자가 자체로 구체적이지 않고 어떤 내용도 없으므로, 내용인 '구체적이며 규정된 ' 일자 밖에 속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상태) 일자가 '규정된 것인 인간' 외적으로 연관되며, 인간은 정신을

신의 제한 상태에서 구성한다. 

정신은 오직 이렇게 규정된 것으로서만 파악되며, 규정된 것에 일자는 연관된다. 

따라서 (유대교에서) 일자는 '정신의 보편 개념'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신은 '개별적이고 제한되고 유한한 ' 관련이 있다. 

그래서 신은 오직 인간(유대인)에게만 연관되며, 신은 오직 유대 민족의 신일 뿐이다.

그러나 이 종교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대한 표상도 마찬가지로 인간 창조와 타락의 역사에서 보존되며 유지된다. 

인간은 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인식 이후에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운인 낙원을 상실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중적인 것을 말한다. 

즉 (우선) 인간은 선악을 의식하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편으로 원죄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선악의 인식에서 신과 똑같게 되었다는 것이다. 

뱀뿐 아니라 신 자신도 동시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담은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다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으로 진실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에서 인간다운 본성의 고차적인 개념, 고차적인 질서(배치)이면서 인간을 고려하는 견해가 제시되는데, ( 견해에서는) 인간이 그의 자연성에서가 아니라 그의 개념에 따라 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 자체의 본성은 신과 통일되어 있다. 

우리는 그러한 표상과 사상을 다른 동방의 표상이나 그리스의 이야기와 신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그러한 견해)은 표상이기는 하지만, 전혀 사치스러운(너무 지나친) 동방적인 것은 아니다. 즉 그러한 표상은 표상의 형식을 갖춘 이성(Vernunft)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유대적 직관에서는 신화로 자리하고 있으며, 아무런 성과도 없는 (중요하지 않은) 상태로 있다. 

그리고 『구약성서』 어느 곳에도 인간의 이 개념에 대한 고려가 없으며, 이 역사에 대한 어떤 시사(암시)도 없다.

아울러 어느 곳에도 인간의 본질에 대한 내적 성찰이 없으며, 어느 곳에도 이 개념에 대한 회상(내면화)도 없다.

이러한 가혹한 운명의 예속 상태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고찰하는 경우가 비로소 발생하며, 이것이 이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 인에게 "인간이여, 자신을 알라!"라고 부과된 말은 이상 단순히 최초의 인식이나 단지 아름다움으로 진행해 가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면서 '신이 인간이 되었다'라는 표상을 통해 '보편적 의식'으로 나아가 '정신의 보편적 본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화해와 해방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 주어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해방이다.

 

이제 우리가 기독교를 통해 인간 의식 속에 들어온 것을 주시한다면, 첫째로 그것은 신의 객관적 본성과 객관적 이념이다. 

신은 자신의 진리에 따라 계시되었다. 

이제 그리스 철학의 추상적 여운은 인간에게 구체적 표상 속에서 계시되었다. 

둘째로 이념과 진리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다운 본성이 선이자 정신이다. 

인간은 본성을 "자신 고유의 (das Seinige)”으로 본다. 

아울러 인간은 본성, 참된 본질을 아들 속에 깃든 신다운 규정에서, 상세한 직관 속에서 지닌다. 

따라서 신다운 본질의 계기로서 인간은 스스로를 ' 안의 바로 이것'으로 발견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유한한 상태로 아는 한에서 인간은 자신을 자기목적으로도 안다. 

그렇게 신다운 이념이 자체로인간에게 이렇게 넘어옴 지니는 것처럼(인간에게로 넘어오는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를 자기 내에서 무한성으로 알며, 자신을 자체로 영원성의 규정에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 인간은 스스로를) 미래의 영원성이 아니라 현재의 영원성으로 (그렇게 안다). 

인간은 자신의 참된 실존을 자연적 현존재와 의욕에 대립해 무한한 내면성에서 지니며, "영원성 속에 존재한다라는 규정을 자연성을 깨뜨리는 노동을 통해서만 획득한다. 

깨뜨림이 자연의 고통이다. 

여기서 해악과 나쁨은 다운 본질 자체의 진행으로 등장하고 운동 상태에 있으므로 불운은 개념 파악이 가능하다. 

반면 이전에는 불운이 '개념 파악될 없는, 단순한 존재자 뿐이었다. 

이제 불운은 불운의 불행, 불운의 행복이라 불린다.

 

(주 : 불운이 개념 파악될 있으므로, 불운이라고 반드시 불행하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불운에 내재한 부정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부정태는 긍정태로도 전환될 있다.

앞에서 헤겔이 인간은 자연성을 깨뜨리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만 영원성을 획득한다고 언급한 맥락에서 불운을 이해할 있다. 

이 점에서 헤겔은 이후 부분에서 해악이나 나쁨 등의 부정태로부터 긍정태로의 전도(전환), 곧 '인간 자신에 의해 산출되는 좋음'을 논하려고 한다.)

 

부정태는 한편으로 단지 부정적일 뿐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념에서 자신의 전도(뒤바뀜), 해악의 전도이며,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자로서 긍정태이다.

긍정태로의 전도는 본성상(자연에 속하는) 인간의 좋음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의한 좋음'이자 '해악(나쁨)으로부터의 전도' 통한 좋음이며, '부정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산출하는 ' 통한 좋음이다. 

(이것은) 내적인 것으로서 정신이며, 정신은 스스로 속죄(참회)하고 가다듬으며, 바로 거기서부터 행동한다.

같은 것이 종교적 의식의 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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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세계가 새롭게 도야• 형성되고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필요와 교양 (도야• 문화)을 알게 되며, 민족이 그들 상황에 적응하게 됨으로써, 모든 관계는 사적인 관계로 특수하고 흐릿하게 규정된다. 

규칙과 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이 여기서는 무한한 수의 우연성과 의존성이다. 

단순해야 하는 것이 무한히 얽힌 것이 되고, 원칙은 복잡하게 얽혀 합성된다. 

기독교의 통일성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민족은 특수성에 자리 잡는다. 

보편자가 특수성이 되면서 전체의 통합과는 완전히 대립하는 방향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전체의 통합)에서는 모든 사적 사안이 격파되고 주관성은 모든 내외적 제한으로부터 정화된다.

이러한 극단인 다른 혁명(Revolution)은 동방 세계이다. 

동방에서는 단순한 일자가 의식의 절대적 대상이 되었으며, 모든 행위의 최종 목적, 현실의 최종적인 것이 되었다.

무관계가 모든 실존의 관계가 되었다. 

우리는 이전에 동방의 실체적 통일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사상과 자연스러움의 통일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정신은 자연에 얽매여 있었고 자유롭지 않았다. 

(동방에서) 현존재와 표상은 무수히 많은 신성으로, 자연적인 집단인 다수의 신으로 분산된다. 

그러나 이제 '일자의 순수 사상'에서는 모든 결속하는 특수성이 소진된다. 

'일자의 순수 사상 현실에서 어떤 특정한 것에도, 어떤 유기적 조직에도 일자의 등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특수자는 무한한 폭넓음에 대해 단지 하나의 우유성(偶有性)으로만 정립되고 우발 적이며, 거기서 이념적(관념적)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일자) 페르시아인의 빛이지만, 빛도 단지 자연적인 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동방의 일자는 오히려 유대교(유대 정신) 일자이며, 일자는 동방의 종교인 이슬람에서 완성된다. 

이 일자로 의식되고 기독교다움(기독교 정신)에서 내면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상태로서, 그것(일자)은 완성의 다른 방식이다. 

이 일자는 자신의 진리를 기독교다움에서야 비로소 자체 내에 충만되고 규정된 상태로서 지닌다.

일자(하느님) 규정하는 다른 방식은 일자를 모든 자연적 특수성으로부터 해방된 사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자는 모든 자연다운 것에 대해, 그리고 모든 특수성에 대해 부정태이다. 

일자가 절대자로 의식됨으로써 일자의 종교는 현실화되어야 하며 현실적으로 현전해야 한다. 일자가 '유일하게 타당하고 지배적이고 인정받으며 바라는 이라는 점이 여기에 속한다. 

일자의 직관은 '유일하게 인정받고 통치하는 라는 점이 여기에 속한다. 

일자 만이 타당하고 실현됨으로써 이것(일자) 모든 구분의 파괴이자 광신주의가 된다. 

종교는 '개인의 순수한 의식'으로서 광신주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광신주의는 추상적인 것을 원하고 모든 특수자와 특정한 것에 대해 부정태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것이 감각이라면, 감각은 광신적이다. 

감각으로서 일자는 모든 객관적 존재에 대립한다. 

왜냐하면 객관은 본질적으로 자체 내에서 분절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객관적인 것에 비해 광신적이지만 단지 감각만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현실성을 부여하는 일자인 추상적인 것의 표상도 광신적이다.

따라서 이슬람은 자신의 화려함과 자유, 폭넓음과 분명한 명료함에서 특수한 상태에 있는 기독교 세계의 심화에 대립한다. 

모든 결속은 사라진다. 

이 일자 속에서 동방의 모든 특수성이, 모든 계급 구분이, 모든 출생의 권리가 사라진다. 

어떤 실정법도, 개인에 대한 어떤 정치적 제한도 현전하지 않는다. 

재산과 소유, 일체의 특수 목적은 타당하지 않다.

즉 거기에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어떤 설정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부당함이 실현되면서 파괴적이고 초토화하는 상태가 된다. 

따라서 이슬람은 모든 것을 황폐화하고 개종시키고 정복한다.

이슬람은 7세기 초에 등장했다.

그리고 이슬람은 우리가 서양에서 보는 것, 서양의 원리에 대한 보완물을 이룬다. 

일자(하느님) 대한 믿음에서 의식은 오직 일자 만을 인정하고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기에, 이러한 광신주의에서 이슬람은 한편으로 자체로 오히려 무기력해질 있다. 

그러나 행위가 발생해야 하는 한에서 정신이 현실과 관련을 맺고 현실로 스스로를 고양하는 ,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특징은 광신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적 삶은 구체적이다. 그래서 이 현실적 삶은 규정으로 진행된다. 

이슬람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규정된 것은 구체적으로 현상하지만, 단지 우연적인(우발적인) 것, 상이한 것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그것은 모래 위에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현상하려는 모든 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며, 행운의 변동(새옹지마)은 모든 관계를 지배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개인과 전체 제국과 관련해 변동의 토대, 지속적 변화의 토대가 있다. 

개인은 이제 노예가 될 수도, 반대로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지배자, 군주가 될 수도 있다. 

또한 호화로운 상태에 잠겨 있던 어떤 제국은 그 고유의 원천으로부터 재건될 수도 있다.

수많은 왕조는 노예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나 하나의 제국이 안정적으로 보이면 그것은 곧 멸망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갱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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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대제 이후, 제국은 분리• 분열되었다.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은 실재적인 제국, 곧 상위 통치권이 되었다.

만일 이 상위 통치권이 그로부터 더 확대되고 후속하는 상황이 전개 될 수 있는 토대로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그 관계는 서유럽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서쪽 제국은 정신적인 제국이다. 

여기서는 정신이 통치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정신은 '자기 복귀'이다. 

따라서 '자기 복귀'는 자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자기 복귀'는 그(정신) 결과에서 자연 계기에 고착된 상태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도 자신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은 스스로 있는 것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것처럼 외적인 것도 하나의 직접자이며, 직접자는 의지의 개별성, 마음의 집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를은 로마 황제가 되었고 그의 제국은 정당하게 고대 로마 제국의 연장으로 간주할 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에서 최종적인 것이었던 '의지 개별성의 확고함' 유럽 세계에 처음부터 여하면서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 개별성으로, 그리고 '무한한 다수의 의존성이 보여 주는 형식적 정당성'으로 게르만 세계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게르만 세계는 직접적 규정성에 대한 반작용이며, 반작용은 여기서 '자연의 강제력' 아니라 '유한한 정신의 강제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세 시대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지닌다. 

즉 실재 통치권이 하나의 관념적(이념적) 통치권이 되고 전 세계 기독교가 가슴속으로 스며 들며, 진정으로 기독교다운 세계가 된다.

이 같은 것이 특히 기독교 정신과 교회의 시대이다.

게르만 민족(나라)(Nationen)은 일찍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기독교 정신은 피상적이었고 일체의 정신다운 관계를 통해 전혀 다듬어 지지 않았다. 

카를 대제는 이전에 부르고뉴인과 다른 부족처럼 색슨족에게 이교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의 개종은 단지 형식적이었다. 그들에게 며칠 동안 교리를 강연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독교 정신은 주관적 믿음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관계의 철저한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여전히 전적으로 피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정신은 이제 '세계 통치자' 되어야 하지만, 이를 통해 기독교 정신은 "나의 왕국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반대로 자체로 세속적이다.

세속성 이후에 다음과 같은 일이, 세속성이 정신다움(영성)(Geistigkeit) 분리되어 지양되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는 요소(기반)에서 정신답고 이성다워져야 하며, 교회다움은 세속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순수해져야(정화 되어야) 한다. 

최종적인 것은 요소가 (각기) 대자적으로(독자적으로) 자신들을 형태화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그렇게 해서만 요소의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회와 세속은 직접적 통일 상태에 있을 없지만, 양자가 참된 일치(Einigkeit) 구축할 있으려면 총체성으로 형성(토야)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세에 교회는 세속화된다. 

한편으로 점은 매우 하찮은 일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다고 너무 높게 평가받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치는 아직 참된 일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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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근본 규정은 '신다운 본질과 인간의 통일’, '인간다운 본성과 신다운 본성의 통일'이며, 신은 인간에게 현상했고 단적으로(절대적으로) 현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이 무한한 형식의 요구이다. 

따라서 신다운 본성은 '바로 이것이라는 규정을 자체 속에 지닌다. 

그리스도는 현상했으며, 그리고 현재는인간다움과 신다움의 통일', '신다운 본성과 인간다운 본성의 통일로서, 세계가 그것을 향해 영원히 추동되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의 규정 일반이 관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 현재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바는 교회가 그 자체로 번성하고 전체 세계에서 통치권을 위해 자체 내에서 스스로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정점은, 신다움은 항상 '바로 이것'이라는 규정을 지니고 현재의 기적을 향한 외적 추동이

며, 신은 정신답고 정신(성령) 속에도 현재한다는 것이다. 

전체는 이 지점을 중심으로 삼아 회전한다. 

교회 내에서 이 같은 것은, 예를 들어 빛과 같이 직접적으로 자연스러운 상태로 존재할 수 없었다.

이 현재는 외적이거나 직접적 방식으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었다.

신, 신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직접자로서 시간적인 것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하나의 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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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것으로서바로 이것' 이제 정신 외적인 것이다. 

정신이 갈망했고 '정신 자신에게 외적인 '이지만, '정신 자신의 '으로 원한 바는 바로감각적인 이것 다음'이다. 

그리고 외적인 것은 '정신 자신의 '이면서 동시에 타자이므로 세계와 세속적 본성은 정신에 관심을 끄는 것이 되었다. 

타자인 자연(본성) '정신 자신의 '이다. 

자연(본성) 정신 자신이지만 타자로서 (정신 자신으로) 존재한다. 

정신은 자연(본성) 관심을 가졌으므로 자연에 (정신이) 전념하는 것은 정신 자신에게 이제 정당한 작업(노동)이다. 

그래서 정신은 이제 속에서 자신이 노동하고 자신을 향유하는 것으로서 자연(본성) 다룬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점이 이제 '바로 이것' 의욕되는 입장이지만, ( 입장은) 정신으로부터 비롯될 때에만 진실할 것이다.

외적인 것이 자연(본성)이고 정신과 분리되며, 정신의 타자이다. 

그러나 정신은 타자를 동시에 원했으며, 타자에게 몰두하는 과정을 정신은 스스로 정당하다고 느낀다. 

더구나 이로부터 분명해진 점은, '감각적인 바로 이것' 교회 내에서 발견되지 않고 밖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은, 인간이 세계로 향하면서 세계를 자유롭게 '바로 이것'으로 방면하고 세계에 대해 인간 자신을 확신하며, 세계에 실천적으로 개입하고 인간 자신이 자유로운 것처럼 그렇게 세계를 자유롭도록 해주는 것이다. 

정신은 교회에서 '감각적인 바로 이것'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를 통해 완전히 다른 정신의 출현이 시작되며, 이것이 시기의 번째 규정이다. 

번째는 '교회의 통치권'이었으며, 번째는 교회가 '바로 이것' 의욕하고 교회 밖에서 찾는 이었다. 

번째는 외부와의 평화로운 관계, '바로 이것' 세계 자연 (본성) 대한 평온한 태도이다. 태도는 '바로 이것' 전유할 있고 '바로 이것' 교회 밖에서 내적으로 상상할 있다. 

외부 세계는 이제 교회에 외적으로 대립한다. 

그리고 정신은 이제 교회를 다루어야 하고 (교회) 속에서 자신의 규정을 발견한다. 

이러한 특징이 세계 내에 출현하면서 다양한 현상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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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한 마지막 내용은, 세속성은 대자적으로 스스로 발전했으며, 정신은 대자적으로 그것(

속성) 전념했다는 점이었다. 

세속성은 교회 밖에서 발전하는 '바로 이것' 원리이다. 

정신은 '바로 이것' 완성을 추구했으며, '바로 이것' 교회를 위해 발견했다. 

그러나 정신은 교회로부터 '바로 이것' 차단함으로써 교회를 배제했다. 

하지만 교회는 '외적인 바로 이것, 감각적인 것을 자신 속에서 유지했으며, (그렇게 해서) 이중화된 감각적인 것은 '바로 이것'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감각적인 것은 교회 내에도 존재하지만, 교회에 의해 배제되기도 한다. 

교회는 최초의 교회로서 직접성인 감성의 계기를 그 자체에 지니며, 이 감성은 아직 정신다움 그 자체로 복귀되지 않은 상태이다. 

교회가 이렇게 감각적인 것을 자체에 지님으로써 감각적인 것은 내밀해지고 변용되었는데, 변용은 예술을 통해 발생했다. 

예술은 '외적이며 감각적인 ' 정신을 불어넣고 고양시켰으며, 혼을 불어넣는다. 

예술은 '정신에 속하는 형식'으로 외적인 것을 고양시킨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심정과 기도는 더 이상 단순한 사물에 대해 관계하지 않으며, 혼으로서 영혼충만한 것, 하나의 정신에 관계한다. 

그리고 또 다른 면은 정신이 기도를 추구하는지 여부와 정신이 성체나 유향나무처럼 하나의 사물로서 스스로를 숭배하면서 정신과 관련을 맺는가의 여부이다. 

정신은 그러한 관계에서 정신다운 것과 관련을 맺으면서 그것의 동일한 상(닮은꼴)이 정신인 그러한 것에 대해 자유롭고 대자적이다. 

경건함(신앙의 독실함)은 어떤 사물과 경건하게 관련을 맺을 수 있으며, 단순히 감각적인 것에서도 기도하는 감정을 느낄 수는 있다. 

더구나 이를 통해 신적인 은총이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나면 감각적인 것은 전혀 불필요하다. 

참된 것은 객관적 형태로 자신을 표현해야(현시해야) 한다. 

사물은 전혀 객관적인 ,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비진리이며, 정신은 이것(비진리인 사물) 대해 자유롭지 않으며, 진리와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단적으로 의존적이며 예속되고 얽매여 있다.

왜냐하면 정신은 비정신적인 , 비진리인 것으로 향하고 오직 진리에서만 자유롭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 자유롭지 않은 의존성이 '종교의 관점이자 요구'라고 한다면, 정신의 그러한 요구는 '아름다운 것과의 관계'에서 전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속의 요구에는 가장 천박한 표현이 가장 합목적적이기(목적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가장 진실한 표현인 라파엘로의 「성모 마리아」는 더 나쁜 표현(작품)이 즐기는 것처럼 그렇게 숭배를 즐기지도 못한다는 점을 경험은 보여 준다.

경건함(신앙의 독실함)은 진정한 예술작품을 스쳐 지나쳐 버린다. 

그래서 경건함은 진정한 예술작품을 덜 경배한다는 사실도 경험으로써 증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진정한 예술작품)은 내적인 만족과 자유로 이끌지만, 이에 비해 경건함은 단지 '둔감하고 의식 없는 의존성의 상태'에서만 부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경건함은 진정한 예술작품을 그냥 스쳐 지나친다. 

왜냐하면 경건함은 내적으로 끌리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둔감한 의존성의 느낌만이 요구될 때에 거짓 주장(요구)은 (내적으로 끌리지 않고)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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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세계사를 간략히 서술했다. 의도는 다음과 같다.

(세계사의) 전체 진행은 '정신의 일관된 진행'이며, 전체 역사는 '국가가 수행한 정신의 실현 과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 그리고 국가는 '세계사의 세속적 실현 과정'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참된 것은 한편으로 '객관적이며 발전된 체계' 순수 사상 속에서 현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속에서도 현전해야 한다. 

그러나 참된 것은 외면적인 객관적 상태로 유지되어서는 된다.

오히려 동일한 주관적 정신이 객관성 속에 대자적으로 자유롭게 존재해야 한다. 

번째로 존재자의 내용을, 객관적 세계정신의 내용을 정신 자신의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정신은 스스로에게 증언하는 정신이며, 그래서 정신은 속에서(정신 자신에게 증언하면서) 자기에게 머무르며 자유롭다.

정신은 역사와 현재 속에서만 해방되고(자유롭게 되고) 만족할 있다는 통찰, 그리고 발생했고 발생하는 것은 단지 신으로부터 유래하지만은 않고 신의 작업(작품)이라는 통찰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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