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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영 목사님 설교 4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06.09.12|조회수243 목록 댓글 0
 

네 번째 시간


요한복음 10장 10절

풍성한 삶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모든 삶을 돌아볼 때, 나는 날이 갈 수록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풍선에 바람이 가득해서 팽팽한 것 같은...

구원의 기쁨을 넘어서 풍성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며 살아왔지만, 영적인 삶을 열심히 살아왔지만, 풍성한삶을 살아오지 못했었다. 이제 다르다 깊이 하나님을 말씀을 알게 된 후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죄의 결과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산책하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동행할 수 없었다. 하나님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 믿고 난 후에 난 결과는 다시금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빛 가운데 행하면, 즉 동행하면...


믿음의 결과는 동행이다.


에녹을 표현할 때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표현한다.

노아는 당대의 완전한 자다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한다.

같은 목표를 향해서 함께 걸어가는 것을 동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 예수님과 혹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계시자로서 예수를 보내셨고, 예수님은 당신의 계시자로 성령님을 보내셨다. 성령은 예수님의 보냄을 받고 우리 안에 계신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

첫째, 구원 사역에 동행(구속의 동행)

교회를 통해서 양육, 구속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쓰임 받는 것. 이부분은 그런대로 지식도 있고 행동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창조의 동행

창조의 동행 또한 중요하다.

오늘은 이 창조의 동행에 대해서 나누고자 한다.


성령님을 어떤 존재신가?

기독교 신학에서 많이 배우고 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신학의 성장에 측면에서 볼 때 성령신학이 제일 늦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전에 우리를 구속하시기로 계획하셨고, 2000년 전에 예수님을 보내서 약속을 성취하게 되었다. 오신 예수님은


2000년이라는 시간의 제한, 공간의 제한을 오고 오는 모든 민족 속에 배달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사람의 마음을 만저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를 성령 시대이다.


창세기 1장 2절에 성령이 태초에 혼든의 위에 역사하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최종적인 손을 보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기본적인 창조는 되었지만, 이 창조는 계속된다.

우주에 모든 것이 생로병사로 이어지고 있다. 모든 자연계가 너무나도 정확하게 짉서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은 성령께서 콘트론 하시는 결과이다. 수많은 나라가 생겨나고 부흥하다가 사라졌고, 한 국가의 정치경제 문화도 성령께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활동하는 것도 셩령의 역사이시다.


개신교회에도 극우파가 있고 극 좌파가 있다. 그런데 개혁교의 모토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성령님의 통제하에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다. 성령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뜻이다. 한평도 그분의 관할 밖에 있을 수 없다.


성령님의 창조 사역에 어떻게 동행하고 있는 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예배당에서는 배우고, 교회 밖에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에배당 생활은 잘하고 있지만 예배당 밖에서의 생활은 영 엉망이다.

히11은 “믿음으로 세상은 말씀으로 ...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 보이지 않는 것또한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감각적인 실체들과 보이지 않은 영적인 실체들로 이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

영적인 영역이 더욱 본질적이고 크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세상이 나온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이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들이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익숙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든다면 성례이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를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통해 알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매개물이 성례이다. 세례역시 그러하다.


설교 역시 인간의 말이지만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라고 볼 때 성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클라스터? 성령론의 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감각적인 실체들이 악한 것이 아니라면 세크라멘트(성례)로 사용될 수 있다. 지극히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숨이 막힌다.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술도 그렇다. 압도되는 이유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역사하시기 때문.


자연계에서 기기묘묘한 것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을 보고 느낄 때 성령님과 동행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다 이쁘다. 미학적으로 볼 때가 아니라 아이들 자체가 다 이쁘다. 그런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역사임을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세계를 보고도 하나님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은 죄 때문이다. 거듭난 우리들은 그 모든 것들이 회복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이시다.


직장에 가서 일할 수 있다는 것. 맛을 본다는 것. 구석 구석에 성령님이 계시고 일하시는 것이다.


직장생활은 대단히 중요하다.

목사 선교사는 성령의 동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직업또한 그러하다. 모든 사람들의 활동들이 성령님이 인간사를 역사하시고 운행하는 것인데, 성령님께서 세상을 움직여 가시는 것들이며 우리는 그 속에 쓰임을 받는 중요한 사람들이다.


교회나 사회에 갈등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를 보내시고 화해의 성령님과 함께 이 일을 회복시키신다.  


모든 과정에 성령님이 지혜를 주시고 모이게 하시고 역사하게 하시는 것임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 들이다.


거듭난 영혼들은 성령님의 역사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성령의 역사로 바라보게 될 때에는 감동이다. 엄마들은 많은 창조를 경험한다. 아이를 잉태해서 생산하는 ...


아이들을 키울 때에 아이들을 엉망으로 만든다. 성령님과 동행을 잘 동행하지 못할 때가 자녀 양육인 것 같다. 성령님이 길러 가시는 아이들을 섬기는 일 또한 성령과 동행하는 것이며 이것을 인식할 때 기쁨이다. 가사일 조차도, 한 가정이 원만하게 잘 진행되어 가는 것 또한 성령의 역사를 이루는 유니트이다.


주부들도 그 일(지겨울 수 있는)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 아름다운 경치, 파도, 산의 구름들을 잘 보아야 한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음악, 미술, 소설, 음식 먹을 때, 사람들을 대할 때도 모든 인간사와 관계된 것들을 역사하신다는 성령님을 인식하지 못할 때 종교적인 영역과 세상적인 영역으로 나누게 된다. 아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역이고 성령의 활동의 영역이다.


성령님의 활동에 대해서 인식하여야 하는데 어렵지 않다. 성령님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영역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인식하게 된다.


사회악이 밝생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는 분노하시는 성령님을 경험하면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안될 까?  왜 못 누릴까?

그것은 자유함이 없기 때문이고 할 수 있다. 뭔가 매여있기 때문이다. 죄에 매여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삶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서 애쓰기 때문이다.


박경리 토지

그 글을 쓸 때 유방암에 걸렸다. 하루는 창밖을 보는데 아름다웠다. 늘 보았던 일상이었지만,   내가 다시한번 시장에 가서 물건도 사보고 할 수 있다면...


모래시계

태수의 사형집행날 끌려 가는데 종이 울리고, 새가 날라 가는데 경이로움으로 바라보는 모습!


모든 욕심,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 비로서 성령님의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연 속에 있는 성령님을 보기 위해서는 이런 지식을 가지고 유심히 보아야 한다. 이목을 집중해야 한다. 자연을 보면서도 성령님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다.


지상생활동안 허락되어진 성령님과의 동행을 삶을 누릴 때 풍성한 삶이 이루어진다.


세상은 힘이 있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얼굴이 예쁜 것도 그렇다 이것은 세상의 기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최고의 가치기 때문에 풍성할 수 있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몰두하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이목을 집중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세상의 가르침과 가치 기준에서 자유해야만 가능하다.


이 세상에 매이지 않으면 생명력이 넉넉해진다. 성령의 역사를 인식하게 되고, 비로서 성령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안에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풍성한 삶은 세상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예배당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채움을 받으려고 하다보니 항상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다른 것은 있으면 좋고 있어도 좋은 것들이 될 때에 나의 모든 것으로 이웃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만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가치가 최고이니 더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니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은 동행하신다. 다만 그 장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뿐이다. 그는 하나님께 이용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단순한 노동을 하고 있더라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긍심이 있게 되고 인생을 풍성하게 한다.


명백한 악한 일외에는 모두 다 성령님의 동행이다.


부도덕성이 있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어떠한가?

폴스티분슨이 쓴 “일상의    ”

어쩔 수 없다 잠정적인, 하나님이 참아주시는 데까지 가야만 한다

직장생활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만족감과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삶의 모든 현장, 자녀를 키우는 것이 성령의 현장이요. 즐겨야 한다.

삶을 즐긴다는 것은 방탕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 현장에 깊이 동참해서 일해가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둘러싼 모든 영역이 성령님의 역사 영역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동행하는 것이 행복이다.


직업, 취미, 먹고 마시고, 사귐을 통해서 행복해야 한다.

금욕적이고, 억압적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더욱 높이는 것을 참으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세상은 어둠의 영역이 있다. 그러한 영역을 눈여겨보고 성령의 영역을 그 족으로 확장해가는 것도 성령과의 동행이다.


진실로 우리의 삶에 성령의 동행임을 알고 즐겨야 한다.

그리고 나서 교회에 와서 종교 활동을 할 때 더욱 풍성해 진다.

교회일이라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교회의 일이고,


헬렌켈러가 쓴 사흘만 본다면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보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이 확장 팽장되는 것이다.

완성된 천국에서 있게될 완전한 것을 오늘을 통해 맛볼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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